의(義)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믿음(롬5:1-6) 2025. 6. 15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생각이 악하고 입의 말이 악하고 행실이 악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이후의 말씀 가운데 일관되게 교훈하고 있다. 로마서 3장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나 다 인간은 죄 아래 있는 상태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3장 10절 이하에서 시편 14편의 말씀을 인용한다. 시편 14편은 다윗의 입을 빌려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이얼마나 악하고 죄 아래 있는 자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인간은 다 치우쳐서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그들의 혀로는 속임을 일삼는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이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다.”(롬3:10-18)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는 그러한 악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아서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소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예를 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것은 그의 행실의 열매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진 것이다.”(롬4:3) 일하고 받는 것은 보수이다. 일한 것이 없는데도 일한 자들과 같은 보수 만큼의 삯을 받았다면 그것은 보수가 아니라 은혜인 것이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가 그러한 내용이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자의 삯과 포도원 문 닫기 한 시간 쯤 전에 포도원에 들어가 일했는데도 종일토록 애쓰고 땀을 흘리며 일한 자와 같은 품삯을 받았다면 불공평하지 않나.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은혜요 구원인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로마서 5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한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이며,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로마서 3장을 먼저 보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3-24)
그렇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 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죄 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량의 은총을 받을 때에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값 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게 된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결과가 무엇일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화평’이란 몇마디의 설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만을 일컫는 표현이 아니다. 샬롬, 에리에네는 분쟁이나 싸움이나 다툼이 없는 상태, 마음이 평안한 상태 그 이상의 그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 표현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특별한 상태를 경험하기 위해서 마약에 손을 댄다. 마약에 빠져 든다.
이번 태국 북부 선교사 수양회 새벽 말씀 강사 목사님이“우리 가게는 행복을 팔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약을 판다”라는 태국 길거리의 안내 문구를 가게 문 밖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무엇인가를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넘석거린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화평은 주를 믿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설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축복의 선물인 것이다. 물론 이 표현 속에는 ‘보상, 회복’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깨달아 믿고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선물이 화평이다. 이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막힌 담이 헐려 나간 상태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이다. 내 죄가 깨끗이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세를 회복한 상태이다.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이 표현이 너무나도 좋은 표현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 더불어’누리는 복인 것이다. 집을 떠나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던 둘째 아들이 돌아 왔다. 주색잡기를 즐기며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다 탕진하고 말았다. 그런 아들인데 아버지는 돌아 온 둘째 아들은 반겨 맞았다. 큰 아들이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게 되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하려고 일부러 아버지의 곁을 떠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개의 인간은 둘째 아들과 같은 경험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 온 자가 경험하는 크나큰 은혜인 것이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나 주를 멀리 떠났다>라는 273장 찬송가 1절이다. 그렇다. 아버지를 떠나 사는 인생이 누리지 못하는 그 무엇,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아들의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자의 축복 그것이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은혜는 누리는 것이다. 복은 누리는 것이다. 은혜, 평강, 화평, 화목, 화해 이 모든 것들은 누리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상을 숭배하며 어리석게 살아가던 이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 그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자 손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 대표적인 가문을 이루었다. 물론 우리는 안다. 언약의 백성들일지라도 그 언약에서 벗어날 때에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애굽의 노예 살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그 대표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은 상급도 주시고 심판도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그 모든 좋은 것들을 화평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자녀의 권세인 것이다. 이런 축복의 깨달음이 화평을 누리는 선물로 계속하여 공급되기를 축원한다.
믿음으로 인한 은혜(恩惠)를 누리게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은혜의 증거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절을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맞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이 은혜와 이 은총을 누리는 자들이 된 것이다. 복 중의 복은 누리는 자의 복이다. 이 누리는 자의 복이란 소유하려는 자의 복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푸른 하늘, 공중의 새, 웅장한 북한산, 푸르른 숲, 아름다운 꽃, 둘레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 꽃 하나라도 누리는 자의 복이 따로 있는 법이다. 시원한 바람, 지저귀는 새 소리, 느껴지는 꽃 향기, 도도하게 흐르는 한강, 내가 살아가는 동네에 흐르는 실개천의 송사리 떼 몇 마리라도 관찰해 보면 내 주변에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나의 나됨, 이만한 건강, 이만한 삶의 여건, 이만한 인간 관계, 그 모든 것들이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주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 아닌가.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양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은혜를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은혜 중의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성도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통해서 장차 영화롭고 영광스러운 자녀의 권세를 영원히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 은혜를 깨달아 알고 이 세상에서부터 그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목요일 밤에 라후 족 교회에 방문하였다. 라후 족은 중국,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대만 등지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100명 정도의 종족이다. 그 중에 10여만명이 태국 북부의 산속에서 살아간다. 그들 중에서 산 아래로 내려와 살아가며 신앙생활하는 이들을 만나 보았다. 해 맑은 표정과 행복해 하는 모습이 크게 은혜와 도전이 되었다. 예배 후에 저들의 거쳐를 둘러 보았다. 열악하기 그지 없다.그런데 저들에게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유와 행복감이 느껴졌다.
은혜는 누리는 것이다. 화평도 누리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환난(患難) 중에도 소망(所望)을 이루게 된다.
이 세상에는 환난이 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없는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도 바울 자신도 끊임이 없는 고난과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몸도 병약했다. 위협을 당하는 박해의 순간도 많았다.
그 누가 전쟁이 계속되는 나라에서 살아가길 원하겠나. 누가 난민의 운명을 선택하겠는가. 누가 고아로 자라나길 원하겠는가. 누가 내게 불치의 암이 찾아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누가 내게 이혼의 아픔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했겠나. 내 남편, 내 아내에게 그렇게 일찍이 죽음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나. 내 아들딸에게 그런 시련, 그런 아픔, 그런 불행이 닥칠지 누가 꿈에라도 생각했겠나.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할 줄을 누가 미리 알았겠는가. 내가 그런 크 사고의 현장에 휩싸일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누가 실패나 가난이나 궁핍을 선택하겠는가.
그렇다. 이 세상에는 별의 별 일들이 다 많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별의 별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35절에서 말하는“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의 위협을 누구라도 겪으며 살아간다. 히브리서 11장 35절 이하에 보면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겪는 별의 별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투옥, 돌에 맞아 죽고, 톱으려 켜는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칼로 목을 베었다. 양과 염소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들판과 돌굴에서 유리하며 지내야 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불 같은 시험에 타 없어지길 원하신다. 불 같은 시험을 이겨 내길 원하신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라.“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4-27)
바울의 신앙은 특별했다. 그의 교회 사랑과 성도 사랑은 남달랐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28-30)
“불 같은 시험 많으나 겁내지 맙시다
구주의 권능 크시니 이기고 남겠네”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더욱 더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해 주신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 선교의 시작은 1864년에 30살이던 다니엘 맥길버리 선교사가 치앙마이에 도착하였고 1868년 치앙마이 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지금도 열악한 곳이 많은데 그 당시의 선교는 구한말 조선 땅을 선교하던 때와 비슷하다. 서민들은 바지나 치마만 입고 윗도리는 벗고 살았다. 복음에는 힘이 있다. 몸과 마음을 싸매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소망을 이루게 한다. 고난의 끝에 낙이 있다. 환난의 끝에 즐거움과 기쁨이 찾아 온다. 환난은 소망을 이루는 밑 거름과 같다.
더워지는 날씨, 주 안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