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혜사(保惠師)인 성령(요14:10-17)
2025. 6. 8.
성령강림주일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나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던 120여 성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성령의 강림으로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였다. 성령의 강림은 그 날 그 현장의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회개할 때에 성령이 임한다.“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라고 하였다. 순종할 때에 성령이 임한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행5:32) 안수할 때에 성령이 임한다(행8:15, 행8:17, 행 19:6),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임한다(행10:44)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방법이 성령의 임재이다. 누구나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신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영의 눈이 떠져야 한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의 눈이 떠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24)라고 하였다. 영의 사람만이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영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예배를 구경하고, 감상하고,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 되면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10)라고 제자 빌립에게 물으셨다. 11절에 보면 반복해서 강조하셨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라고 권면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말씀들은 스스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라는 권면도 하셨다.
오늘 본문은 빌립이 예수님께“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는 요구에 대답해 주신 긴 설명의 말씀이다.
그리고 12절에서 이어서 강조하신 것이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는 축복이다.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가시고 성령이 임하면 그런 날이 올 것이란 말씀을 하셨다. 12절의 “나를 믿는 자”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을 주목하고 믿을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이적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하셨다. 로마서 8장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하였다.
13절에 보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그 무엇”가운데는 성령에 대한 간구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할 때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주를 믿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주께 성령 받기를 간구하고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우상 앞에 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게 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면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은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하였다. 그렇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는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에 그 기도에 응답의 열매가 맺게 되는 법이다.
5월 초에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귤나무에 하얀 꽃이 한창이었다. 마치도 육지에 아카시아꽃이 피면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하는 것처럼 귤꽃 향기가 가는 곳곳마다 꿀단지를 쏟아 놓은 것처럼 가득하였다. 그런데 몇 주만에 그 많던 꽃이 다 지고 지금은 귤나무마다 콩알만한 귤이 송글 송글 맺혀서 자라오르는 것을 관찰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열대 환경의 따뜻한 햇볕을 받는다. 자주 내리는 비와 한라산에서 사방으로 내려 덮히는 이슬과 안개로 충분한 수분을 흡수한다. 제주도의 강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흙의 기운과 영양을 흡수하면 탐스러운 귤이 귤나무 가지마다 풍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고 사모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의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예수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신다고 약속해 주셨다. 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였다. 보혜사(保惠師)란 돕는 영을 말씀한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보혜사이신데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는 ‘곁으로 부르다’라는 의미인데 이는 “변호자요 대언자요 보호하고 은혜 주시며 가르치시는 영”이란 뜻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변호하시는 영이시며 대언해 주시는 영이시다. 그 뿐만 아니라 믿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가르쳐 주시고 도와 주시는 좋으신 영이시다.
16-17절에서 예수께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고 약속해 주신 성령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
영원(永遠)토록 함께 있는 영(靈).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좋으신 영이신 성령은 잠시 동안 머물다가 떠나가는 영이 아니다. 성령은 영원토록 믿음의 사람과 함께 계시는 영이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르실 189장 찬송가의 가사 1절에 보면,
“진실하신 주 성령 성도 곁에 계시사
순례길을 갈 때에 손을 잡아 주소서”
라는 기도와 간구의 마음을 담아서 찬송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험한 나그네 인생길의 순례자의 길을 갈 때에 평생토록 매 순간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각 사람의 손을 꼭 붙잡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욱더 그렇게 해 주실 것이다.
찬송가 563장<예수 사랑하심은> 가사를 보라.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가게 하소서
이런 은혜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날마다 그리고 평생토록 영원히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진리(眞理)의 영(靈).
요한 1서 5장 6절에 보면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시고 예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성령 또한 진리이다.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보혜사인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라고 설명해 주셨다. “세상은 능히 그(성령)를 받지 못하나니”(요14:17)라고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은 진리인 성령을 환영하지 않는다. 성령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인한 열매도 보지 못한다. 성령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 안에서 주의 도우심으로 열매 맺는 성령의 열매를 거부한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말초적인 사랑, 타락하고 병든 사랑을 좇게 한다. 부도덕한 사랑, 비윤리적인 사랑의 늪에 빠져들게 한다. 세상적인 기쁨과 즐거움, 세상적인 향락을 찾아 나서게 한다.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의 관계를 유지하며 그걸 화평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참을성이 없다. 참지 않는다. 그래서 미워하고 시기하고 살인한다. 거기에는 자비도 없고 양선 즉 착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충실하게 대하지 않는다. 되는대로 살아간다. 그런 상태에서는 온유도 절제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 물론 세상에도 착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착하게 살아보려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아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그렇다. 그러므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인 성령을 싫어한다. 성령 받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박해한다. 예수 믿는 성도들, 성령을 사모하는 성도들을 심지어는 죽이기도 한다. 로마 시대의 핍박이 그랬다. 이천년 교회의 역사가 그랬다.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여전한 핍박과 박해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진리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진리이신 성령의 힘은 설명하고 또 설명하여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처럼 크나큰 은혜이며 축복이며 기적인 것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첫주일은 방주교회, 그 다음 주일은 서귀포 중문교회, 지난 주일은 제주시에 있는 성안교회에서 예배드렸다. 중문교회나 성안교회는 100년이 넘은 교회이다. 성안교회는 1908년에 설립되었다. 평양신학교 제 1기생인 7명의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인 이기풍(李基豊, 1865-1942) 목사가 선교사로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평양에서 인천항으로, 인천항에서 군산항으로, 군산항에서 목포 항으로, 목포 항에서 제주 항까지 가는 뱃길을 멀고 험한 길이었다. 배가 파선되고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이기풍은 평양의 깽패였다. 동갑내기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선교사에게 29살 때에 돌을 던져서 턱뼈가 부러졌다. 그의 한국이름은 마포삼열(馬布三悅)이다. 예배당 건축 현장에 동료 깡패들을 동원해서 건축 중이던 예배당을 부숴 버리기도 했다. 꿈에 주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기풍아 기풍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기풍은 가난한 집 아들이었지만 명석했다. 한학에 능했다. 글도 잘 썼다. 그러나 가진자들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싸움질을 좋아했다. 그런 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32살 때인 1897년도에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전도 열매였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은 던진지 3년 후에 일어난 기적이다. 그 당시의 제주도는 육지에서 멀고 먼 섬이었다. 가난하고 외로웠다. 지난 날 몽골의 침략과 지배를 100년이나 받았다. 일본군대의 침탈도 심각하였다. 그래서 배타적이고 상처와 아픔과 슬픔과 박해와 가난 속에 소외 되어 살던 땅이다.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기풍 목사는 1942년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심한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해방을 맞지 못하고 사망했다. 선교사 이기풍이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117년 세월이 흘렀다. 제주 성안 교회는 대형 교회이다. 신제주 노형동의 거대한 귤밭을 사들였다. 거대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주일 예배에 사지 사방에서 예배자들이 몰려든다. 117년 전의 묘목과 같은 작은 복음의 시작이 오늘 날에는 거대한 겨자나무로 자라난 것이다. 성령을 의지하라. 개인, 가정, 자녀, 직장, 일터, 범사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의지하고 사모하자. 교회 생활, 예배 생활, 전도 생활, 봉사 생활 다 마찬가지다. 제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깨우쳐 주시고 새 힘 주시고 새길로 인도하시는 진리이신 성령을 의지하자.
예수께서 곧 진리이시고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이 곧 진리이시다.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약속해 주셨다. 맞다. 성령은 믿음의 사람들인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요15:26-27)
진리이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생각나게 하시고 깨우쳐 주시며 좋은 길과 바른 길로 가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계속하여 간구하고 사모하며 의지하는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믿는 자 안에 계셔서 알게 하시는 영(靈).
성령은 믿는 자와 함께 거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믿음의 사람의 마음 속에 임재하시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성령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아 알게 된다. 세상은 성령을 모르지만 믿음의 사람은 성령님을 알아보게 된다.
7절에 보면, 예수께서 장차 어디로 가실 것인지에 대하여 질문하는 도마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리고 하셨다. 그런데 17절에 보면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관심도 없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르다. 성령 받은 사람은 다르다. 믿음의 사람은 진리인 성령에 대하여 안다. 알 뿐만 아니라 성령의 현상, 성령의 증거, 성령으로 인한 열매를 보며 살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아는 만큼 보인다. 보는 만큼 깨닫는다. 깨닫는 만큼 믿음이 역사한다. 믿음만큼 성령 안에서 새로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주일 예배 후에 몇 장 들고 가는 전도자 나누기의 부담에 갇히지 말고 전도자의 일상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열망하자.
아프리카 밀림 숲에서 선교사가 길을 잃었다. 두려웠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던 중에 원주민을 만났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길 원했다. 원주민은 앞장 서서 밀림을 헤쳐 나갔다. 선교사가 물었다. “길이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내가 원하는 곳을 찾아 갈 수 있다는 말이냐”그 때 원주민이 대답했다. “밀림에는 길이 없다. 내가 가는 길이 바로 길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길이다. 예수님이 진리이다. 예수님이 대답이다. 예수님이 전부이다. 길과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믿고 따를 때에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을 영원한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손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