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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공감 2016.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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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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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6-02-21 20:32 조회 14,97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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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발 역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번화해 가고 있다. 몇 해 동안 울타리만 쳐진 채 빈 공간이었던 널따란 터에 엄청난 규모의 빌딩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다. 새롭게 들어선 어느 빌딩 안에 공감이란 제목의 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무슨 디자인 사무실인 것 같다. 그 제목 공감이란 단어가 인상 깊게 눈길을 끌었다. 사무실 안이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분위기였다. 그 이름처럼 막힌 곳이 없이 바깥과 안이 하나인 일체감을 주었다. ‘공감’(共感)이 무엇인가. 영어로는 ‘sympathy’라고 한다. ‘sym’이란 접두어는 ‘syn’에서 유래하였는데 함께라는 뜻이다. ‘pathy’감정, 괴로움등을 의미한다. 사전에는 공감이란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왜 현대인들이 점점 고독해 하는가.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타고,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값비싼 여행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문화 혜택을 누리면서도 우울증이나 고독이 병으로 깊어가는 이유가 뭘까. 공감하는 상대가 없거나 적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남녀 노유가 뒤 섞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모든 것들이 충분하게 다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그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감옥에서도 독방이 주는 중압감이 그런 것 아닐까. 그 현상이 가장 심각한 곳이 가정이다. 그러므로 고독이나 외로움이란 혼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진솔하게 나누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공감이란 소통의 능력이며 배려하는 정도이며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공감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통한다. 사랑한다면 공감하게 되어 있다. 사랑한다면 눈과 눈이 마주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생각과 생각에 교감이 생기며 느낌과 느낌에 생기(生氣)가 돌게 마련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Luhmann)사랑은 소통(疏通)이다.”라는 정의를 내린바 있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소통과 공감이 잘 되는 가정은 부부와 부모 자녀와 형제들 간에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매사에 사사 건건 의견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이기적이라면 가족들 간에 서로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공감과 거리가 먼 상태를 말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므로 서로가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공감 능력이란 소통 능력이다. 개와 고양이처럼 꼬리를 내리는 신호와 꼬리를 올리는 신호가 서로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으르렁 거리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말 중에 하나가 개와 원숭이의 나쁜 사이를 일컫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란 표현이 아닌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물건도 잘 팔린다. 공감에 불이 붙으면 살 맛 나게 된다. 공감하는 능력은 곧 세상을 밝게 하는 힘이다. 남녀가 만나 연애의 감정을 가지고 장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대화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은 공감의 공간을 만들어 가는 삶 그 자체이다. 이는 마치도 수만 마리의 벌이 육각형의 집을 연이어 짓고 그 공간 안에서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며 그 일정한 공간 안에 꿀을 보관해 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 살고 싶어라는 꿈을 날마다의 현실로 누리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가려면 가까이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 갈 줄 알아야 한다.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제목의 그 노래의 후렴에는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삶의 모든 희로애락을 마음 쏟아 나누는 공감이 가능하다면 누가 부럽겠는가. 무엇이 부럽겠는가. 그 어느 영웅호걸 절세가인이 부럽겠느냔 말이다. 그런 공감이 이루어지는 일상을 살아간다면 임금이 부럽겠나. 혹은 대기업의 총수가 부럽겠나. 모자와 어깨에 별을 네 개씩 달았다고 부럽겠나.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이율은 그의 새롭게 출간한 에세이집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 중에서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이 쉽게 일어나는 법을 안다고요? 많이 아파본 사람이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요? 오랫동안 홀로 지내온 사람이 외로움에 단련이 되어 있다고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 말아요.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이 또 넘어지면 더 힘들어지고 많이 아파본 사람이 또 아프면 더 절망하게 되고 홀로 지내본 사람은 더더욱 외로운 법이에요. 심장에 맷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장에 굳은살이 박인 것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모르면서.”라고 썼다. 그렇다. 공감이란 그러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부자가 끼니 걱정하는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어찌 알까.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 직전에 라브리 마을에서 날품팔이로 지내며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 명을 먹여 살리며 살았다. 어느 날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5년 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늘 감옥 밖에 있는 가족들을 걱정하며 탈옥을 시도하다가 다시 붙잡혔고 결국은 19년 형을 받고 지내다가 13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난날들을 뉘우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적개심을 불타오르고 있었다. 장발장 이야기를 더 쓸 공간이 없지만 가난과 배고픔과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저들의 심정을 잘 모를 것이다. 즉 공감이 쉽지 않단 말이다.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다. 다윗은 평범한 베들레헴 촌로(村老)8번째 막내아들로 배고픔과 온갖 고난을 수 없이 겪었지만 솔로몬은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왕궁의 최상의 환경이 주어진 왕자였다. 그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으나 말년에는 심각한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고 이방 여인들 사이에서 타락해 가며 초라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삶의 본질을 공감하며 살아가지 못한 불행한 인생의 한 예가 아닐 수 없다. 매 순간 힘겹게 병든 목숨을 연명하며 심한 진통제의 힘에 의지하여 긴긴 하루 밤을 뒤척이는 환자의 그 고통을 늘 건강한 사람이라면 어찌 공감 할 수 있을까.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강화도 시골의 고등학교 가을 문학제 때 불렀던 노래의 가사인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신앙생활은 이 땅에 본향 집,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보냄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심정을 공감해 가는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아들을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 은혜와 구원과 죄 사함과 거듭남의 출발이다. 세상에서 죄와 악에 빠져 허덕이는 인생을 하나님 나라의 본향 집인 그 집이 곧 내 집인 것을 깨닫고 그 분의 초청과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는 예수의 초청은 완전하고 영원한 공감의 나라인 천국 백성으로의 초청이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주님의 이 말씀은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이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원한 삶 즉 영생으로 초청하시는 공감(共感)의 집으로의 초청장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처럼 낮아지면 공감하게 되고 주님처럼 겸손해지면 그 공감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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