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동행(同行)한다는 말은 ‘함께 걷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단순히 보조를 맞추어 함께 걷는 정도를 동행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군대의 경우를 예로 들면 함께 정해진 복장을 입고, 같은 환경에서 제식훈련을 하고, 고단하고 어려운 군사훈련을 같이 하며, 같은 내무반에서 지내는 선후배 동료들 간에라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를 보라. 그러므로 동행이란 단순히 한 솥 밥을 먹고 한 내무반 생활을 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동행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5장 22절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하였다. 그가 인류 역사에 최 장수한 아들인 무드셀라를 낳을 때의 나이가 육십 오세였다. 그 아들을 낳은 후에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러 자녀들을 낳았다. 아마도 에녹이 무드셀라를 낳은 이후부터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보면 그 즈음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체험하는 영적 임재의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이 세상에 더 이상 있지 않았다.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에 대하여 더 이상 자세한 기록으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된 그 ‘동행’이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하다. ‘할라크’(והלכו)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가다, 걷다, 뜻을 좇다, 삶을 살다’는 등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지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자녀다운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내용이 아닌가. 시대적인 부패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결한 삶을 산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증거 하는 표현이 ‘하나님과 동행하며’(창5:22)가 아닐까. 부부가 오륙십년을 함께 살아도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사는데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니 얼마나 다양한 인생살이를 겪으며 살았겠는가. 노아는 에녹의 증손자이다. 성경은 그 중간 조상들의 신앙생활 면모에 대하여는 거의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창세기 6장 이후에 무려 다섯 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에녹의 증손 노아에 관한 기사를 다룬다. 노아는 증조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중에 홍수 심판을 경험하고 가족 구원을 은혜로 덧입은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완전한 자로 인정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장본인이다.(창6:8-9) 그는 평생토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며 살았던 순종의 사람이었다.(창6:22) 그러면 동행한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시편 25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말씀이 나온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잘 알게 된다. 즉 하나님 지식이 늘어난다. 이걸 깨달은 솔로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1:7)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과 친밀해 지는 시작이다. 여기 ‘친밀하다’는 히브리어 단어인 ‘소드’(סוד)는 ‘비밀, 은밀한 만남’이란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만나셔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숨기지 않으시고 밝히 보여 주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막힘이 없는 관계’를 뜻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정치, 경제, 문화, 음악, 미술, 체육계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한 각 분야의 스타들에 대하여 많이 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그들에 대하여 아는 것과 그들이 개인적으로 나를 알고 나도 개인적으로 그들을 잘 아는 친밀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가 하나님을 아는 정도를 갖고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 대하여 알지만 그는 나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축구에 열광하는 이들이 데이비드 베컴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여도 정작 그가 나를 만나면 내게 눈길조차 줄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도를 갖고 친밀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친밀하다는 영어 단어는 ‘confider'이다. 그 뜻은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그런 인물이었다. 역대하 20장 7절에 보면(개역한글), ‘주의 벗 아브라함’(Abraham your friend)이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일흔 다섯 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로 그는 몇 번의 결정적인 실수와 부족을 들어내는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평생토록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았던 언약의 사람이었다. 그가 나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나중에 하나님이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니 내어 드리는 장면(창세기 22장)을 보면 과연 하나님이 그를 친구라고 여기실 만하다. 존 비비어의 책, <동행>에도 그런 내용들을 다루는 묵상의 장면이 있다. 아모스서 3장 3절에 보면,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서로 뜻을 같이 하지 못하며 동행하는 척 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모세의 오경을 다 외우고, 복음서와 계시록을 통째로 암송한다고 하여도 그것을 증거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는 할 수 없다. 전국 성경 큐즈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았다고 하여도 그것을 갖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그런 모습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몸부림 중의 하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까지 극찬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람이요 의롭다고 인정받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거룩한 경외심과 사랑의 증거가 곧 순종으로 드러난 것이다. 존 비비어는 앞에서 인용한 그의 책에서 명쾌한 묵상을 전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옳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편 25편 14절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친밀하게 대해 주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이 얼마나 황홀하고 복된 영적 관계인가. 이는 가족들 간의 가정생활, 성도들 간의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 간에 그런 영적 친밀함이 나에게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스스로 불행한 것이다. 출애굽기 33장 11절에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했다. 모세 시대에 광야에 그렇게 많은 백성들이 함께 살았으나 하나님 앞에서 모세는 달랐다. 부럽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고 하였다. ‘친구’란 그런 사이를 말한다. ‘동행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친밀하다’는 말씀도 그런 내용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은 비밀이 없는 친구처럼 친밀하게 나를 대하여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그것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요15;14) 더 이상 종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대하여 주시겠다고 하였다. 가롯 유대는 삼년 반을 예수님의 제자로 지냈지만 주님과 그런 관계를 맺지 못했다. “난 요즘 어떤가?”, “나는 요즘 교회와 가정과 세상 중에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서먹하지는 않은가?” 가롯 유다는 최후의 만찬 상에서 예수와 마주 앉아 같은 떡 그릇에 손을 넣어 떡을 집어 먹으면서도 예수님과 친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밤에 불행한 길을 가고 말았다. 인생은 매 순간의 선택이다. 솔로몬은 우여곡절이 많은 인생이었지만 그의 잠언의 고백만은 너무나도 금언(金言)이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22:11)고 했다. ‘동행!’(同行) 이것이 신앙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