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의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는 세상
<25시>의 저자인 게오르규(C. V. Gheorghiu, 1916-1992)는 루마니아 동부에서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독일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23살 때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엿새 전에 명문가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닷새 만에 징집되고 말았다. 28살 때인 1944년에 루마니아가 소련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함께 독일로 망명하였다.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적성국가인 루마니아 국민이라는 이유로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2년간 수용소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33살 때에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 전에 이미 집필해 놓은 소설 <25시>를 프랑스어로 출간하였고 세계인의 관심 속에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몇 권의 소설을 계속하여 출간하였다. 47살 때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 서품을 받고 파리의 교회에서 봉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여러 권의 소설을 더 썼다. 58살 때인 1974년에는 언론사와 문학사의 공동초청을 받고 부인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여러 도시에서 강연한 적도 있다. 글의 서두에 게오르규의 생애를 길게 다루는 이유는 그의 삶이 평생 전쟁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 <25시>의 내용은 마치도 자신이 겪었던 인생 경험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소설의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는 아버지 몰래 스잔나와 지내면서 두 아이를 낳았다. 열심히 일해 땅과 집도 마련하였다. 그런 그의 아내에게 어느 헌병이 다가 와서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가 헌병을 쫓아 내 버린 일주일 만에 요한 모리츠에게 징집 명령이 전달되었다. 스잔나를 차지하기 위해 헌병이 루마니아인인 그를 유대인으로 몰아 강제 수용소로 보낸 것이다. 그가 강제 노동에 종사한 지 육 개월 쯤 후에 그의 아내가 이혼 신청서를 보내 왔고 강제로 서명 당하고 말았다. 그는 나중에 유대인의 압박이 없는 헝가리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간첩 혐의로 고문당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헝가리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다시금 강제 노동을 하던 중에 헝가리 정부에 의하여 독일로 팔려가게 되었다. 독일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에 그는 인류학을 연구하는 독일군 대령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대령은 그를 우생학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대령의 명령으로 그는 독일군이 되었다. 그 후에 독일 여자 힐다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다. 한동안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런 어느 날 연합군의 승리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승리의 날에 아내와 자식을 보살펴 준다는 조건으로 그는 프랑스인의 탈출을 도우면서 자신도 그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들은 다행히 ‘국제 연합 구제 협회’인 URA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적국 루마니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금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청원서를 통해 자신이 갇혀야 하는 이유를 밝혀 달라고 호소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장모로부터 패망한 독일에 관한 소식과 힐다와 함께 살던 집이 불탔고 아이를 껴안고 불에 타 죽은 힐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비보(悲報)가 날아 왔다. 그런 그는 열다섯 번째의 수용소에서 우연히 고향의 신부(神父)를 만나게 되었다. 첫 아내인 스잔나는 그녀를 유혹하던 헌병한테 온갖 협박을 당하던 중에 강제로 이혼 신청에 서명했다는 소식이었다. 세월은 흘러갔고 꿈처럼 요한 모리츠가 수용소에서 석방되는 날이 왔다. 그 동안 13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동안 수 없이 수용소를 전전한 뒤에 겨우 아내와 자식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왔다. 그의 아내 스잔나 곁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린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옛날과 다름없이 스잔나를 뜨겁게 포옹하며 재회의 감격을 나누었다. 13년 동안의 불행했던 모든 순간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순간도 18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동부 유럽의 외국인들을 모든 수용소에 감금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제 도망갈 만한 용기도 없었다. 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미국 군대에 외국인 의용군으로 지망했다. 그래야만 가족들이라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원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리츠는 자기를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징집 소장은 아내와 낯선 막내 아이가 바라보는 앞에서 요한 모리츠에게 사진을 찍으면서 ‘웃어’하고 명령하였다. 징집 소장은 의용군 신청자가 넘쳐 나자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웃으라는 명령 앞에서도 요한 모리츠의 착잡한 마음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웃기는커녕 절규하고 싶은 참담한 절망감과 분노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끌려가야 하는 전쟁터의 장면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징집 소장의 큰 소리가 다시 들렸다. “웃어 웃으란 말야...”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던 시대나 지역은 없었다.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 간에도 싸움과 투쟁이 없을 수 없듯이 전쟁 없는 세상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는 성경의 역사도 갈등과 대립과 증오와 시기와 보복과 싸움과 투쟁과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지 않는가. 성경은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생을 말씀하고 있다. 크게 보면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한 천사인 사탄과 하나님의 영과의 대립과 싸움의 과정이 성경의 내용이다. 창조의 원형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구원이며 거듭남과 죄 사함과 영생의 시작이 아닌가. 성경에서 대할 수 있는 싸움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싸움이며, 악에 대한 선의 싸움이고, 거짓에 대한 진실과 정직의 싸움이며, 어둠과 빛의 싸움이고, 죽음과 생명과의 싸움이다. 부활이란 생명을 삼키는 죽음을 멸하므로 영생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하는 구원의 은총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초청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E. H. 카(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말했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다."라고 말했다. 이 모두 공감이 가는 정의가 아닌가. 전쟁 이후 세대로 태어난 이들 중의 한 사람인 자신이 이런 글을 쓰기에는 부담이 크다. 올해는 6. 25 전쟁이 일어난 지 64년이 되는 해이다. 휴전이 된지도 벌써 61년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 몽골, 러시아, 일본 등의 틈바구니에서 지난 1,000년 동안 평안할 날이 별로 없었다. 오늘 날도 남북의 분단 상황에서 극동 아시아의 세력 불안정은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나의 선친은 20살 때에 6. 25 전쟁이 터졌다. 급하게 징집되어 간단한 사격 훈련을 받은 후에 최전선에 투입되었고 동족인 인민군과 싸워야 했던 참전 용사였다. 전쟁 중에 당한 상해로 후송 병원에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치료를 받고 전역되었다. 장남이었던 그는 휴전이 되기 이전부터 강화도의 섬마을에서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을 받아 전쟁 중의 어린 아이들을 가르쳤고 사 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전쟁이 나의 선친에게 죽음으로 답했다면 나의 생은 이 땅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청년기에 이 땅에 전쟁이 있었다면 나 또한 전쟁의 현장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권의 역사 대하소설을 쓴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 선생께서 쓰기 원했던 이 민족의 뼈아픈 구한말로부터 일제 강점기의 역사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주변 열강의 끊임없는 침략 가운데 하나님의 선민으로 연단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였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7-9)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능히 그런 세상을 건설 하실 수 있으시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