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자를 위하여
경상북도에 있는 어느 교도소의 수형자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왔다. 하루 일정이라 버스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아쉬웠지만 오가는 중간에 가 볼 만한 명소를 아무데도 못 둘렀다. 일행들과 돌아오는 길에 잠시 버스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위치한 온달 관광지의 외관만 보고 지나쳐서 상경하였다.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에 대한 일화를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온달이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는 주후 590년 고구려의 영양왕이 즉위한 뒤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서울시 광진구는 아단성은 아차산성이라고 주장하며 아차산 생태 공원 안에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동상까지 세워 놓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차산 자락에는 오늘 날 워커힐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곳의 한정식 레스토랑의 이름이 ‘온달’인 것은 이 같은 역사적인 사연을 억지로 끌어 온 것뿐이다. 삼국사기 온달열전에 따르면 온달이 전사한 곳은 아단성(阿旦城)이다. 그 곳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남한강 자락 일대이다.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고토를 수복하고자 출정한 것은 영양왕 즉위 직후인 590년 10월이었다. 온달이 수복하려던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은 현재 강원도 지방 대부분이다. 온달열전은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면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어디일까. 역사연구가이며 소설가인 황원갑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이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며 삼국사기 지리 편에 따르면 아단(阿旦)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그 곳 뿐이다.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고 그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저녁나절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설명을 따라 저 만치 산언덕에 온달산성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적 264호로 지정된 온달성 아래에는 천연기념물 261호인 온달동굴이 있고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다. 그 주변에는 '활고개', '진거리', '쉬는돌', '비마루', '대진목', '군관나루'등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졸지에 총수를 잃은 고구려 군이 온달의 유해를 군영으로 옮겼다가 도성으로 운구하려고 했으나 영구가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이에 평양 장안성에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됐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고 말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으며 그런 사연으로 내외를 합장하였다고 전해진다. 관이 움직이지 않았을 리는 없고 온달의 전사를 원통하게 여긴 군사들의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온달은 어려서 얼굴이 여위고 허름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심성은 착했다. 온달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온달이 항상 밥을 빌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봉양했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를 사람들은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당시에 고구려 평원왕의 어린 딸인 공주가 울기를 잘하므로 왕은 늘 “바보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말했다. 공주의 나이가 16살이 되어 왕이 혼처를 상부 고 씨에게 정해주었는데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은 대로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말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 결혼할 것을 고집하다가 왕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공주는 온달의 집을 찾아가 그와 혼인하였고 궁궐에서 가지고 간 패물을 팔아 논밭과 집을 마련하고 남녀노비 등을 샀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3월 3일이면 낙랑언덕에서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온달은 일찍이 공주의 말에 따라 병들고 파리한 국마(國馬)를 사서 부지런히 먹여 건장하게 훈련시켰다. 이때 그 말을 타고 참가해 남보다 앞서고 들짐승도 많이 잡아 언제나 왕의 눈에 띄었다. 그 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왕이 군사를 일으키자 온달이 선봉장으로 나가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일 후에 왕이 크게 기뻐하며 예를 갖추어 온달을 사위로 맞이하고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고 온달의 영화와 권세는 날로 커져갔다. A. D. 590년 고구려에 영양왕이 즉위한 뒤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지원한 온달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온달설화>는 ‘우부현녀’(愚夫賢女)를 주제로 한 대표적인 해석이다. 즉 현명한 아내가 어리석은 남편을 잘 섬겨서 성공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는 가부장제하에서 억눌려 살아가던 여인들에게 대상기능(代償機能)을 담당했으리라고 보는 심리학적인 해석으로까지 발전해 왔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재능과 역량을 갖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그것을 갈고 닦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실력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어떤 분야의 그 무슨 일이든 뜻을 이루려면 주경야독하는 열심과 성실이 없이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온달은 어려서는 가난과 뒤쳐지는 외모와 남들이 놀리는 조롱에 갇혀서 자랐으나 그의 나중은 달랐다. 영국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영국 베드퍼드셔 주 엘스토우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자신도 대장장이로 일하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청교도 혁명에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의회군으로 참여했고, 내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왔다. 이때 그는 동료가 전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에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던 그는 청교도인 메리와 결혼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635년 베드포드 침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개신교 신자가 된 그는 '번연 주교'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평신도로서 설교활동을 성실히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의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 국교회 즉, 영국 성공회를 제외한 기독교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인 존 번연은 허가 없이 복음을 전한 혐의로 12년 동안 투옥되었다. 거기서 자서전 <은총이 넘침>을 쓰고, 일생의 역작이며 그의 명성의 전부인 <천로역정> 1부를 썼다. 2부는 6년 뒤인 1684년에 완성시켰는데, 이 작품은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로 표현한 종교 문학으로 영국 소설의 발전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밖에 우화로 씌어진 <성경>도 있다. 그는 나중에 침례교 목회자가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무엇엔가 갇혀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이는 성공과 출세와 육체의 욕망과 사치와 향락에 갇혀 산다. 술, 담배, 놀음, 음란, 마약에 갇혀 살기도 한다. 병적으로 돈과 재물을 모으는 집착에 갇혀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어떤 부인들은 화려한 보석과 패물로 치장하고 값 비싼 옷을 차려 입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으며 그런 생활에 갇혀 사는 이들도 있다. 사도행전의 사울은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로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는 이들을 색출하여 박멸하는 일에 사명을 갖고 갇혀 지내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예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불러 내셨다. 그는 변화를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죄 사함과 부활의 능력을 만방에 전파하는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과거의 사울은 율법에 갇혀 지내었으나 예수를 만난 후에 바울은 복음과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에 갇혀서 살아가는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거인이 되었다. 그렇다. 사람은 무엇에 갇혀 사느냐가 그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