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신 랍비 예수
유대인들은 시민들이 서기관을 부르거나 혹은 제자들이 선생을 부를 때에 ‘랍비’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랍비’란 히브리어의 ‘rabbi'에서 유래했는데 ‘나의 주’(my Lord)라는 뜻이다.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우리 말 성경에서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선생’ 혹은 ‘랍비’라고 혼용하고 있다. 깊이 연구하면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고 복잡하니 쉽게 써 나가도록 하겠다. 동양에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스승의 권위를 귀하게 인정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생이 없이 발전한 문명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가정으로 하면 부모가 선생이요 나보다 세상을 앞서 살아가면서 인생의 경륜을 깨달아 알고 후대에 그 깨우침을 전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선생이 아니겠는가. 요즘 들어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권위가 위협과 도전 앞에 있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역시 교사인 선생은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제자인 학생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위하며 저들의 장래에 대하여 기대와 희망을 갖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사라면 어찌 자신의 자리에 대하여 책임과 사명이 없겠는가.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교사 12명이 제자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여 제자들을 위하는 사랑의 편지를 절절하게 써서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교감 선생님의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그 외의 살아남은 2명의 교사들조차도 아비귀환의 현장에서 튕겨져 나와서 목숨을 구한 경우라고 하니 실은 모든 교사가 모두 다 희생당하였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세간에서는 교사는 있으되 참된 선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함부로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지 않나. 남의 신을 신고 걸어 보지 않고는 그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과거나 오늘날이나 교사인 선생님들의 애환을 저들의 입장에서 들어 보지 않고야 어찌 몇 마디의 말로 쉽게 저들의 고충을 다 대변할 수 있으랴. 성경 잠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잠5:13) 이는 선생의 훈계를 싫어하며 꾸지람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상을 대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의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9:11)고 예수를 비난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예수는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는 선생으로 오셔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곁에 다가 가셔서 저들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앞에 서셨고 저들을 참 사람다운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말을 들은 예수는 자신은 병자를 고치는 의원이심을 천명하셨다.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은 죄인을 불러서 하나님 안에서 의인 삼으시려고 오신 선생이신 랍비이시다. 유대 사회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선생 행세를 하였다. 그런 저들을 향하여 예수는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3-7)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는 말씀을 교훈해 주셨다.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 이시고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교훈도 이 때 해 주신 말씀이다.(마23:9-10) 그렇다. 이 땅에 참으로 큰 자는 섬기는 자이다. 예수는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이는 선생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랍비로서의 시대적인 부르심을 선언하신 내용이다. 그 예수께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고 하신 교훈은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예수 자신을 향한 선언이기도 하였다. 불교와 유교로 이어지던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도 어언 129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간과 세월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좋은 표현 중의 하나인 ‘세월’이란 단어를 배에 붙이고 국내 최대의 여객선 사업을 장악해 온 청해진 해운의 배후에는 기독교의 용어만 도용했을 뿐인 악덕한 기업주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신음 하는 때에 자수하지 못하고 어디론가 은신해 버린 그의 처세를 보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기독교의 복음 정신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이비 신앙의 두목인 것을 만 천하에 다시 드러낸 결과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선가 붙잡히겠지만 숨는 것으로 사태가 진정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셈어에서 ‘랍’(rab)이란 ‘많다’는 뜻도 있지만 ‘크다’, ‘위대하다’(great)는 의미가 강하다. 구약에서는 ‘랍비’가 ‘우두머리’ 혹은 ‘선장’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나라나 기업이나 그 어느 단체에서나 우두머리가 중요하고 선장이 잘해야 하지 않나. 요나서 1장 6절에 등장하는 선장도 랍비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요나가 풍랑 중에 배 밑층에서 잠들어 있던 때에 선장은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요1:6)고 요청하였다.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간 회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그를 육지에 토하여 내게 하셨다.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회개기도 중에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요나는 “베풀어 주신 은혜를 버린” 잘못을 회개하였다. 요나가 드린 기도의 마지막은 이렇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그렇다. 혹자가 말한 대로 6. 25 이후 가장 큰 국가적인 슬픔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이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는 많아지고 기독교인의 숫자는 늘어났으나 잘 살기 운동에만 혈안이 되어가던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재를 무릅쓰고 옷을 찢는 심정으로 엎드려서 큰물과 큰 파도가 엄습하는 스올의 뱃속 같은 이 시대에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회개 운동이 이 땅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나이다.”(욘2:5-6)하며 참회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온 나라가 기울어져 있고 온 교회가 기울어져 가는 그런 위기의식을 갖고 ‘배가 부르다 따뜻하다’ 할 때에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회개의 기도를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구한말 풍전등화와 같던 이 민족을 일제의 압제와 6.25의 참화로부터 구원해 주신 “베풀어 주신 은혜를 버린” 죄를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른아이 다 같이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하고 통회하여야 할 것이다. 세상 선장은 배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우리의 선장이신 주 여호와 하나님은 선생이신 랍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들을 영원한 소원의 항구로 다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이 시대는 참으로 의로운 선장이며 선생이신 랍비를 간절히 찾고 있다. 랍비이신 예수께서 마지막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이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