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춘천 마라톤대회가 잘 알려져 있고 미국의 보스턴 마라톤대회가 세계적이듯이 뉴욕 마라톤대회 또한 크게 관심을 끄는 대회이다. 지난 11월 3일에 열린 이 대회의 최고령 참가자는 조이 존슨이라는 86세 된 할머니였다. 7시간 57분 41초의 기록으로 경기를 마친 그녀는 그날 밤 호텔 방에서 쉬다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 체육 교사와 코치 생활을 오래도록 하였고 은퇴한 후에도 달리기를 즐겨하던 그녀의 생은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막을 내렸다. 1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슬하에 세 명의 자녀와 여섯 명의 손자들을 두고 있다. 평소에‘달리다가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유언대로 그림처럼 생을 마감한 것이다. 금번까지 25번째 마라톤 완주 기록자였던 그녀는 32킬로미터 지점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으나 끝까지 42,195미터를 완주하였고 경기가 끝난 후에야 약간의 치료를 받는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그 날 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그 동안 같은 연령대 마라톤에서 여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60대 이후에도 아침마다 두 시간 이상씩 가까운 곳의 고등학교 운동장 트랙을 달릴 정도의 체력 관리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유명 코치에게 조금이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한 겨울에도 미네소타 호수 근처에서 열리는 달리기 캠프에 참가할 정도의 열정을 품고 살아 왔다고 한다.
사람이 명문가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도 축복일 수 있지만 청년기와 장년기의 그 모든 삶이 지속적으로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추사 김정희(1786-1856)의‘세한도’(歲寒圖)처럼 단순하게 검고 짙으며 통영이 낳은 미술가인 전혁림의 그림처럼 붉고 푸르며 강렬하거나 듣지 못하던 화백 김기창의 참새 그림‘군작’(群爵)처럼 무서운 힘이 느껴지고 이중섭의‘황소’처럼 선이 굵고 선명하며 박수근의‘빨래터’처럼 은은하고 세월이 지나면 점점 세계적일 것 같은 천경자의 그림‘길례언니’처럼 색조의 환희가 있는 그런 생을 가꾸어 가는 것은 모두가 다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은사를 계발하는 자기의 몫이며 열망이 아닐까. 최근에 우연히 월간지에 실린‘한국 화단과 미술품 재태크’라는 주제의 특집 기사를 보았다. 그 중에 그림과 해설을 겸하여 소개한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의‘가셰 의사의 초상’이란 작품 해설을 보았다. 빈센트 반 고호는 네덜란드의 평범한 목사의 아들로 자라났다. 그는 측두엽 기능장애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자기 자신도 어찌 하지 못하는 우울한 순간이나 우여곡절을 수 없이 겪으면서 살아갔지만 그는 천재적인 화풍으로 작품마다에 그의 종교성과 사상을 그려나갔다. 1990년 5월에 경매된 그의 그 작품 가격은 당시로 8250만 달러이니 우리 돈으로 933억 원에 이른다. 그 작품을 사들인 주인공은 일본 다이쇼와제지의 명예 회장인 사이토 료에이이다. 그 후에 그 작품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다시 팔렸다. 그의 그런 작품 하나가 역사 속에 평가 받는 기준은 사실 값을 먹일 수 없을 정도이다. 47살에 정신질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그의 생애 나중 십여 년 동안에 그린 작품 900여점과 습작 1100여점의 진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점점 더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오늘 날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미술가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값비싸게 경매되는 작품들 중에 그의 여러 작품들이 거의 항상 상위를 차지할 정도이다. 우리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어찌 값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미켈란젤로의‘천지 창조’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이나 로댕의 조각‘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작품의 가치를 어찌 경망하게 돈 몇 푼으로 언급하겠는가 말이다. 이는 윤동주의 시‘서시’나 혹은 심훈의‘상록수’나 펄벅의‘대지’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나라의 국보 제 1호인 남대문 즉 숭례문이 몇 해 전에 정신 나간 노인이 지른 불에 타 버리고 복원 공사에 오랜 세월과 국고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복원된 지 채 일 년도 안 된 숭례문의 단청색이 떨어져 나갈 뿐만 아니라 구석구석 균열 현상과 부실 공사 흔적이 속속히 드러나면서 공사 참여자들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도 좋고 장수하는 것도 축복이긴 하지만 역사 속에 가치 있는 흔적을 남기거나 선대의 찬연한 문화를 보존하거나 발전시키다가 떠나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세는 가나안 입성의 축복은 받지 못하였으나 애굽의 고난 받던 동족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바로왕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광야 40년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언약의 기록자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민족 지도자의 길을 넉넉히 살다가 주님 앞으로 가지 않았는가. 신명기 34장 7절에 보면,“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다. 모세는 태어날 때에 이미 애굽의 임금 바로가 내린 히브리의 남자 아이 살해명령으로 죽을 뻔 한 운명이었으나 하나님이 건져 주셨다. 나이 사십에 애굽 사람을 살해하고 땅에 묻어 은폐한 사건으로 생의 위기를 겪게 된 그는 바로 임금에게 구명 요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책 가운데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숨어 산 세월이 사십년이었다. 그런 모세를 나이 팔십에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모세는 위기 극복의 산 증인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별의별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이 질병이든 사고나 사건이든 혹은 경제적인 실패나 실직에 의한 궁핍의 위기이든 사별의 고난이든 말이다. 모세는 어쩌면 출애굽 이후에 더 큰 생의 위기에 직면하여야만 했다. 때로는 목마름에 지친 광야의 동족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쳐 죽이려고 달려 들 때도 있었다. 생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고 언제라도 있을 수 있다.
최근 조선일보의‘한국인의 마지막 10년’이란 특집 기사에 보면 십년 전보다 3-4년 더 장수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생애의 말기를 5-6년간 각종 병 치례로 어려움을 겪다가 생을 마감하는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영국 EIU연구소에서 실시한‘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의 조사 대상국 40개 나라 중에서 32위였다고 한다. 이는 10점 만점에 3.7점으로 최상위 10개국 평균 점수인 6.9점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겨우 미친다는 분석이다. 무슨 말인가. 장수가 복인 것 같지만 어떤 장수 시대를 살아가느냐가 관건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대표하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인물로 화폐에도 그 초상이 실린 주인공이며 광화문의 이순신과 함께 동상의 주인공이기도 한 세종대왕(1397-1450)도 53살 밖에는 살지 못했고 그 동상 앞에 서 있는 이순신(1549-1598)장군도 59살에 임종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없는 한글 창제, 이순신이 없는 조선시대의 왜적으로부터의 외침극복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세례 요한도 33살에, 알렉산더라고 일컫는 알렉산드로스 3세(Alexandros III, A. D 323-356)도 33살을 넘겨 살지 못했다.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하고 마케도니아의 군사력으로 인도까지 점령의 영역을 넓혀가던 신화적인 역사의 주인공인 그도 찾아 드는 죽음을 그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중국의 진시황(BC 259-210)도 몽골의 징키스칸(AD1162-1227)도 그리 장수한 인물들은 아니다. 성공, 출세, 권력, 지식, 재물, 명예 다 좋고 필요한 것이로되 역사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그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느냐는 것은 어쩌면 자기 응답이며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33살에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으나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는 임종 기도를 드렸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명자의 인생 마무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