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최고의 선물은 ‘자유’이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자유였다. 에덴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자유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란 제한과 금지(禁止)가 포함된 자유이다.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자유는 방종과 타락에 이르고 만다. 제한이 있는 자유여야 진정한 자유의 가치가 있다. 이는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의 사용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에게 분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금지 사항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축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선언이다. 그런데 아담을 돕는 배필로 창조해 주신 아내인 하와는 뱀의 간교함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다. 여자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뱀에게 대답하였다. 여기 뱀과 이야기 하고 있는 하와의 대답을 보면 하나님이 원래 말씀하신 ‘허락과 금지’의 조항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되는 ‘금지’ 이외에는 모든 것에 대하여 ‘허락’하셨다. 이 허락이 곧 자유이다. 그러나 그 허락은 ‘금지’의 단서가 따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이 금지 조항이다. 그런데 하와는 이 금지 조항에 대하여 벗어난 생각과 기억과 말을 하고 말았다. 이것이 죄에 빠지는 타락의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와전(訛傳)되게 말한 것이다. 이 와전된 말로부터 진리가 왜곡되고 범죄가 시작되며 되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늪을 향해 빠져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한 마디로 ‘에덴의 타락’이다. 인간이 창조되던 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이 엄청난 자유와 무한대한 축복의 시작을 인간은 스스로 곡해하며 불순종하므로 빼앗기고 불행해지고 말았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유를 잘 누리며 살아가면 자유와 축복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어진 자유를 축복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죄의 종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에 관한 유명한 강론을 하신 바가 있다. 요한복음 8장 3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하시면서 권면하신 말씀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선언이셨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인간은 죄를 범하는 순간에 죄의 종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예수님은 죄의 위험을 이렇게 경고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그리고 이어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8:36)는 말씀도 해 주셨다. 그러나 동족 유대인들은 이같은 진리의 강론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지적하셨다. 진리란 알아듣지 못하면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진리를 벗어나서 스스로 죄의 종이 되어 사는 인생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만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인간의 타락 현상을 신랄하게 지적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4-47) 이쯤에서 무슨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나 노아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의 외모의 아름다움에만 유혹을 받고 죄악이 가득하게 살던 때나 오늘 날이나 죄와 악이 관영하는 현상은 별 차이가 없다. 이는 인류 최초의 가정에 들어온 불순종과 형제 살해와 시체 유기 등의 극악 범죄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죄와 악의 뿌리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죄를 범한 인간은 죄의 종이 되고 만다.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를 지냈어도 별수 없고 세계적인 대 부호요 국가를 대표하는 대기업의 총수라도 별 차이가 없다. 죄 앞에서는 아무리 권력이 높고 재물이 많고 학벌이 대단하고 가문이 좋아도 소용없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하였다. 여러 해 전에 청송 감호소에 교우들과 함께 위로 방문을 한 적이 있다. 장기수 혹은 사형수들이 모여 있는 그 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저들 죄수들이 성가대도 하고 피아노도 연주하고 키타도 치고 찬양도 잘하고 설교도 경청하였다. 어떻게 하다가 저런 불행한 운명이 되었을까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뭉클하였다. 인물들도 좋았다. 평생을 교도소 선교에만 헌신하시는 담당 목사님께 “아니, 이곳의 이 분들이 어쩌면 저렇게 인물들이 좋습니까”하고 말을 건넸더니 “인물 값하다가 범죄해서 저런 신세가 되었지요.”하고 대답하는 말을 들은 기억이 새롭다. 그들이라고 원래 범인이요 처음부터 감옥에서 살아야 했을 주인공들은 아니지 않는가. 어찌하다가 젊은 날 범죄에 빠져서 불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성경에도 그런 인물들의 일화는 넘쳐난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스스로 불안해하며 쫓기는 자가 되었다.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살기를 갖고 살던 형 ‘에서’의 20여년 세월은 스스로 증오와 미움의 종으로 살아 온 불행한 세월이 아니었던가. 야곱이 얍복강 기도 후에 형 ‘에서’와 동생 야곱에게는 대 화해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화해하고 보니 죄와 악과 증오의 종에서 화목과 은총의 종이 된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두 종류의 종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복음과 진리의 종이냐 혹은 죄와 악과 마귀의 종이냐는 것이다. 아간은 아이 성 전투에서 탐심에 붙들려 전쟁 규약을 어기고 전리품을 훔쳐 감춘 것이 밝혀지자 아골 골짜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몰살당하는 불행한 종국을 맞고 말았다. 다윗은 임금이었지만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의도적인 살인을 주도하고 나자 그의 마음속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죄이든지 일단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나면 인간은 추악한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고 경고하였다. J. F. 케네디는 “진리는 거짓보다 강하고 자유는 강제보다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계속되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만행을 보라. 진리 안에서 깨닫게 되는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이들의 불행의 전형이 아닌가. 진리를 알아야 진리 안에서 자유의 가치를 깨닫는 자유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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