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것도 좋지만 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일정한 노동에 의하여 그 삶의 가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쉼이 없는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육체의 노동이든 정신적인 노동이든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자원하여 하는 노동이 아닌 강제에 의한 노동의 경우라면 그 심각성은 더하다. 물론 이 세상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 중에는“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고, 쉬고 싶은 때에 충분히 쉬고, 놀고 싶은 때에 원하는 만큼 다 놀고 성공적인 생을 산 사람은 거의 없다.”이는 학문, 학위, 기술, 재주, 연구, 산업, 예술, 작품 등의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이다. 최근에 US 메이저 여자 골프 3연승의 신기록을 세운 박인비 선수의 경우를 보라. 그녀가 어찌 적당히 노력하는 정도로 그런 정상에 설수 있었겠는가. 이는 스포츠의 각 분야마다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저들이 정상에 서기까지 자기를 극복해 가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과 분야가 다 마찬가지다. 언제 쉬는지 언제 자는지 모르게 정상을 향하여 도전한, 각고의 노력을 다한 열매가 아닌가. 그러므로‘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진리다. 물론 그 배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공산주의 국가나 독재 국가 혹은 고대 국가들 중에서는 백성의 일정한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쉼이 없는 노동력은 역사의 발전을 이루기는 하지만 인간성을 점점 피폐(疲弊)하게 한다. 강제 노동과 인력의 동원이 없이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의 건설이 가능하였겠는가. 이것은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아닐 수 없다.
이씨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는 AD1394년 11월,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여 궁궐과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다음해인 1395년 9월까지 대체적인 건설을 끝냈다. 수도를 방어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17km에 이르는 성곽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태조 5년인 1396년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 만에 마쳤다. 이때 전국의 각 도로부터 동원된 인부는 11만 8,000여 명이었다. 49일 만에 그 정도 규모의 성곽 건설을 마치기까지 동원된 백성들이 얼마나 쉼이 없는 중노동에 허덕였겠는가를 상상하여 보라. 왕실은 짧은 기간에 세밀한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성벽 바깥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했다. 지금도 남산 동쪽의 성벽에는 그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성곽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요즘도 관찰해 보면 그 기초석이 장대하다. 그리고 부실공사를 보강하기 위하여 1396년 8월부터 경상도와 전라도와 강원도 등지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했다. 2차 공사는 동대문 부근 등 봄철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곳을 완성하고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을 개축하였으며 낮은 성곽을 보수하고 성문의 누각을 짓는 일에 주력하여 성곽의 여덟 개 대문(大門)과 소문(小門)들이 완공되었다. 이처럼 역사가 발전해 가는 배후에는 거의 쉼이 없이 남모르게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이들의 수고와 애환을 뒤섞여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성경에도 나온다. 느헤미야 시대의 예루살렘 성곽 건설에 관한 역사이다.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던 예루살렘 성곽 중건을 이룩한 인물은 느헤미야였다. 그는 52일 만에 성곽 중건 공사를 마쳤다. 마친 것은 좋지만 그 짧은 기간에 공사에 투입되어야 했던 백성들의 수고를 상상하여 보라. 느헤미야 4장 17절 이하에 보면 성곽 공사에 투입된 기술진들과 짐 나르는 자들이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다고 했다. 저들은 공사가 끝나기까지 옷을 벗지 않았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다. 노동은 고달프고, 수입은 적고, 가족은 많고, 식량 조달은 어려웠다. 결국은 백성들의 부르짖음과 원망이 극에 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난세(亂世)를 극복하며 예루살렘 성민들이 결집을 이루어 내고 성곽 중건 공사를 52일 만에 끝마친 느헤미야의 지도력은 남다르게 탁월하지 아니한가. 무한도전의 노동력을 요구했던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곽 중건 공사는 업적을 성취함으로 그 보람이 보상되었다. 스룹바벨 성전의 재건과 예루살렘 성곽의 중건은 포로의 땅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므로 쉼이란 단지 얼마동안 쉴 수 있었느냐는 시간적인 개념보다는 일의 성취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살아갈 때에 주어지는 심리적인 피로감이나 중압감은 그 무엇과 비교 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진정한 쉼의 가치는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 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엿새 만에 천지 창조를 마치셨다. 첫날의 빛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하여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환경에 대하여 매우 만족해 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였다. 그리고 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安息)하셨음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소개된 안식이란 쉼을 의미한다. 하나님도 쉬셨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하시기 때문에 쉬시는 차원의 안식이 아니다.‘샤바트’라는 히브리어의 원 의미는“모든 일을 계획과 뜻대로 잘 마친 후에 기쁨과 평화 가운데 휴식을 취하는 상태”를 뜻한다. 이와 같은 안식의 개념은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오늘 날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에 근거한 재창조의 날로서 주일(主日)로 발전되고 승화되어 왔다.(마28:1, 막16:2, 눅24:1, 요20:1, 행20:7)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는 것도 복이지만 쉴 때 쉬는 것은 더 큰 복이다. 그 쉼이란 예배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주 안에서의 안식이어여만 영혼육의 쉼과 재충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피서의 계절이 다가 오고 있다. 휴가 계획을 잘못 세우면 오히려 더 고단하고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분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이 쉼의 방법이라고 초청하셨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이 같은 초청을 하신 것일까. 도대체 예수께로 가면 어떤 유익과 변화와 위로와 안식이 있기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을까. 그 다음 말씀에 보면 대답이 나온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성품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닮아 가며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쉼을 얻는 길이란 말이다. 쉼과 안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로병사가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중국의 진시황제(秦始皇帝, B.C 259-210?)는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여 오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49살에 죽고 말았다. 그의 말년은 측근들의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이 심각해져 갔다.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세 번이나 있었다. 거대한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으나 그는 스스로 불안과 초조 가운데 지내다가 순행 도중에 죽었다. 그를 장례한 능은 약 51.8㎢ 규모인데 197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죽은 황제를 보위하기 위한 군대라고 추정되는 실물크기의 토우(土偶)가 6,000점 이상 발견되었다. 인생은 누구나 예수께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진정한 쉼이란 없는 법이다.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고 영생을 깨달아 믿고 선물로 누리며 진정한 쉼과 안식을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다. 그는 힘주어 말씀하셨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영생이니....”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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