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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선생은 하나요...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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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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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3-05-18 18:39 조회 15,590 댓글 0
 
우리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하나로 여겨 왔다. 이 세 가지 지위는 나라와 사회와 가정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일찍부터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불러 왔다. 인도의 사상가이며 시인이고 극작가였던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는 그의 서정시집 <기탄잘리>에서 한국을 대단하게 예찬한 바 있다. ‘동방의 등불’이라고 제목 붙여진 시의 전문은 이렇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마음엔 두려움이 없고/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지식은 자유스럽고/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지성의 맑은 흐름이/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타골은 1929년 당시에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인도인들을 위하여 이러한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치하에 놓인 한국과 인도의 처지가 비슷하여 시의 내용에 ‘코리아’를 첨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어찌되었든 이 시는 한국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강인하고도 유연한 민족성을 ‘동방의 등불’로 표현하여 당시 일제의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 민족에게 큰 격려와 위안을 주었다. 특히 독립 쟁취에 대한 강렬한 기원을 담고 있어서 3·1운동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한국 민족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일깨워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 편의 시가 시대적으로 그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듯이 한 인물이 자라나는 배후에는 존경 받는 참 스승이 있다. 성경으로 하면 엘리야에게서 엘리사가 출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열 두 제자가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롯 사람 유다와 같은 안타까운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신약 성경 중의 방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13서신서의 기록자인 사도 바울과 같은 걸출한 스승 밑에서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아들이 사제지간으로 선한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가정으로 하면 부모가 스승이요, 사회와 학교로 하면 당연히 선생님이 스승이 되어야 한다. 스승이란 단지 어느 분야의 학문만을 전수해 주는 학문의 전달자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경도를 지닌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대를 이어서 번영하고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표현처럼 말이다. 이는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즉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사도 바울의 첫 편지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4:15-16)고 하였다. 그렇다. 실로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비방자요 교회에 대한 박해자요 성도들에 대한 폭행자였다. 그런 그가 다메섹 성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박해하기 위하여 가던 길가에서 부활 승천 하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완전히 변한 새사람이 되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유대교의 유명한 율법학자인 율법선생이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체험한 이후에는 그가 추구하고 성취했던 그 대단한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노라고 고백하였다. 그 이후로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스승으로 삼았다. 하나님만을 아버지 삼았다. 바울이 말하려는 강조가 그것이다.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라는 뜻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복음을 체험한 이후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 이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배우며 실천하며 살게 된 것이다.

오늘 날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가 고민하고 있는 교육의 한계는 이것이 아닌가. I. T 산업의 발전으로 세계가 손바닥 안에서 동 시간대에 움직여지는 정보의 공유화와 다양성 시대를 살게 된 것은 좋은데 비인간화의 문제는 질병의 차원을 넘어서서 중증질환이요 만성 질환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학문은 발전하는데 스승의 권위와 사제지간의 끈끈한 인간미가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수평 문화인 헬라 문명과 정 반대인 수직 문화의 모범으로 자리 잡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선생으로 인정받는 랍비는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며 성경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교육활동에 폭넓게 참여해 왔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공식적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에는 공동체 내에서 의식을 행할 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랍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 중요한 두 가지는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경건’(敬虔)과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 받는 ‘인격’(人格)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심각하게 병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부형이 선생에게 폭행을 가한다든지 학생이 선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욕설과 폭언을 일삼는 등의 소행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하극상이 아닌가. 옛날에는 임금이나 스승이나 아버지에 대하여는 저들의 그림자라도 밟을까봐 조심스럽게 대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하기야 인류 역사에 죄와 악의 무질서가 전혀 없는 완전한 가족들의 삶이나 사회나 국가가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에덴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 부부 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타락하고 병들고 금이 가지 않았는가.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제사 후에 자기 제사가 응답되지 않은 화풀이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형제 살인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비참한 가정의 슬픔을 겪은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충격을 상상해 보라. 세월이 지나고 아담은 하와를 통해서 ‘셋’이란 아들을 다시 낳았다. 하나님이 아담의 가정에 새 아들을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이다.

그처럼 부족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번성을 보면 선생 즉 스승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생이셨고 하나님의 영이신 성신이 저들의 스승이셨다. 예수님은 당시에 랍비라고 불리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영적 변질과 타락을 경고하시면서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는 교훈의 말씀을 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타락상에 대하여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23:3)라고 지적하셨다. 스스로 지도자임을 자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랄한 지적은 얼마나 저들을 당황스럽게 하였겠는가. 교육학자였던 루소는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스승이 있다. 하나는 대자연이요 둘째는 인간이며 셋째는 사물이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교훈하시고 인간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며 사물의 현상을 통하여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시는 참 아버지이시며 참 구주이시다. 진리를 배우고 깨우치려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산다면 어린아이들도 나에게 스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의 사기 편에는 이런 교훈이 전해 온다. “이전에 일어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훗날에 있을 일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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