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결심하고 가까운 곳의 동네 이발소를 찾아 단골을 바꾸었다. 남들은 아무 미용실에나 들어가서 대강 커트도 잘하던 만, 난 늘 그렇지를 못하다. 1962년생 아무개라고 쓴 이발소 개업증이 전면 거울에 비치었다. 1995년도에 전국 이발대회에 나가서 받은 금상 트로피를 들고 있는 대문짝만한 액자도 걸려 있었다. 지금 52살인데 18년 전에 받은 상(賞)이니 삼십대 중반에 이미 이발 솜씨를 인정받았나 보다. 아침인데도 내 앞에 두 사람이 있었고 내 뒤로도 세 사람이나 뒤 따라 들어와서 기다리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꾀나 잘되는 골목 이발소였다. 내 앞 손님은 육십대 중반의 나이인데 양복을 잘 차려 입고 와서 넥타이를 풀어 놓고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이발을 청했다. 그도 첫 방문인지 이발사에게 말을 건넸다. “본인 머리는 누가 깎나요.”, “아, 네, 저는 직접 깎습니다.” “아 그래요. 중도 제 머리는 혼자 못 깎는다는데 어떻게 직접 이발을 하십니까.” 이런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앞 손님이 이발을 마치도록 나는 소파에 흐트러져 있는 조간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 TV에는 ‘아침 마당’의 ‘목요특강’에 소설가 박범신 선생이 초대 손님으로 나와서 생방송으로 특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요즘 충남 논산에서 지낸다고 하였다. 글 솜씨에 비해서 말솜씨는 청중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화술은 못되었다. 그러나 한참을 듣다 보니 느린 저음의 구수한 화술 속에 깊은 명상이 배어 있는 들을 거리가 있는 화제들을 풀어 가고 있었다. 그 날 아침의 주제는 ‘아버지’였다. 박범신은 ‘아버지는 히말라야의 노새다’라는 주제로 ‘이 시대 아버지들의 자화상’에 대해 강의했다. 작가 생활 40년째인 그는 최근에 40번째 신작 소설 <소금>을 출간하였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가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서 끝이 없이 노새처럼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낙오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을 위한 발버둥질을 계속 하는 고달픈 인생인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 구조는 빨대 네트워크다. 기득권의 과실(果實)을 따려는 욕망과 내 마음의 안락이 충돌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동안 아버지들이 짊어진 짐을 가족들이 나눠야 하고 새로운 시작을 도와줘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새 소설, <소금>의 내용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답한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 선명우는 대기업 임원으로 세 딸과 아내를 가족으로 둔 가장이다. 하지만 갈수록 씀씀이가 커지는 식구들을 뒷바라지하기가 힘에 부치는 가운데 췌장암 선고를 받는다. 가출한 그는 혈연과 무관한 사람과 가족을 이루며 새로운 행복을 찾는다. 나도 세 아이를 길렀지만 요즘은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칠 수 없는 시대다. 아이들을 강력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맡기고 부모들도 거기에 쓸려 가는 아비가 어쩔 수 없는 시대다.”는 설명으로 소설의 내용을 풀어 나갔다. 그렇다. 요즘은 고단한 삶의 현실이 소설과 같고, 소설의 내용이 현실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소설을 쓴 캐나다 작가 얀 마텔(Yann Martel)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읽으시라.”고 권하는 공개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편지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그의 책,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101 Letters to a Prime Minister)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얀 마텔이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에게 항상 독서를 할 것을 권하며 4년간 쓴 편지를 묶은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얀 마텔은 “조금은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광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통령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기 힘들 것이다.”라고 소설 읽기를 강조하였다. “픽션을 읽으십시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하고 권한 내용이 모든 언론에 공개되었다.
기독교신자들이 손에 들고 애독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책인 성경에도 소설과 같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그것을 기사와 이적 혹은 표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인생살이가 다 소설과 같은 것이 아닌가.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가 홍수 시대에 살아남은 것도 소설 같은 일이며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바치려 하던 아브라함의 순종 행위도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죽은 줄 알고 가슴에 담고 지내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것을 만나서 인생의 말년 17년을 고센 땅에서 봉양 받던 아버지 야곱의 한 생도 소설의 주인공과 같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로 공포에 휩싸여 애굽의 노예시장으로 팔리어 갔던 요셉이 애굽의 임금 바로 왕 곁에서 젊은 나이 삼십 살에 출세하고 성공한 실권자로 살아간 팔십년의 총리 인생도 소설과 같은 내용이 아닌가. 신약 성경의 내용으로 하면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이 소설과 같은 내용이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 다 소설의 내용과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소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며 사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기록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다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의 기록이란 말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도 과거와 현재와 장래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이며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역사인 사실의 선언이다.
어느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고생하며 불화하던 아내와 헤어진 후에 영등포 역전에서 누워 자면서 술에 취해서 지내며 노숙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푼돈만 생기면 거의 날마다 로또를 사던 중에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 그는 청년 때부터 소원하던 지중해와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 왔고 지금도 목돈이 남았단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도를 갖고 소설과 같다고 할 수만은 없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나오는 유산을 받아가지고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주색잡기를 즐기고 빈털터리가 되었던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보라. 소설과 같지 않은가. 그 아들이 타국의 돼지우리에 누워서 신세타령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고국에 계신 아버지 집으로 돌아 왔다. 마을 어귀에 나타난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오히려 먼저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가서 아들의 목을 얼싸 안고 환영하였다. 종들을 시켜서 송아지를 잡게 하고 목욕을 하게하고 새 옷과 새신을 준비하고 가락지도 끼워 주었다. 새 옷과 새신과 가락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전히 아들로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환영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소설과 같은 생의 반전(反轉)과 혜택을 깨달아 알고 누리는 것이 은혜요 그것을 햇볕과 공기처럼 받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축복이 아닌가. 질병과 실직과 실패와 우울과 낙담의 감옥에 갇혀서 인생의 밤을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 세상에 주변을 바라다보며 다시 찾아 온 봄볕을 받아 피어난 수선화와 목련과 개나리와 진달래와 철쭉과 식탁에 오르는 쑥과 냉이와 질경이의 강한 생명력을 공급 받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싹이 나게 하시고 꽃이 피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축 늘어진 양 어깨에 새 힘을 다시 얻는 소생(蘇生)의 계절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 간절하다. 며칠 전 한 움큼의 쑥과 냉이를 캐어 들고도 로또 1등에 당첨된 것 이상으로 기뻐하던 아내의 모습 속에서 소박한 행복의 자화상을 보았다. 며칠 전에 처음 만난 그 이발사의 능란한 이발 솜씨와 그 얼굴표정에서도 그런 행복이 읽혀져서 좋았다. 성경은 말한다. “그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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