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낮 시간에 두 시간 반 정도 산행을 했다. 사순절 기간 내내 성전 터의 넓은 울타리를 날마다 일곱 바퀴씩 도는 일에 정진하다 보니 산행할 여력이 없이 지냈다. 모처럼의 산행이었다. 가끔씩 산행 중에 만나는 분들에게 물어 보면 대 여섯 시간 혹은 일곱 시간씩 산행하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긴 시간을 내서 산행해 본적이 거의 없다. 모처럼 나선 날은 갑자기 바람이 몹시 불고 하늘이 잔뜩 흐려 왔다. 삼십 분쯤 산허리를 오르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목적했던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중턱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 설은 코스로 접어들었다. 향로봉이 쳐다보이는 곳에서 족두리 봉을 끼고 하산하는 코스를 찾았다. 조금 씩 날리던 눈이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부는 바람을 타고 내리는 함박눈은 절경이었다. 드문드문 연분홍색의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사월의 산허리에 내리는 함박눈의 풍광은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스마트 폰을 꺼내어 사진도 몇 장 찍고 동영상도 담았다. 렌즈 앞에 반짝 거리는 눈송이들이 보석처럼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강화도 섬의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고 5대째 살던 시골집에서 태어난 나는 뒷산에 오르는 일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어려서야 소 먹이러 가고, 싱아 뜯어 먹으러 가고, 송기 벗겨 먹으러 다녔다. 소나무의 새 가지가 자라나는 봄철에 군것질 거리가 귀하여 소나무의 어린 가지를 꺾어서 그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진액이 배어 있는 연한 속살이 나오는데 그걸 벗겨서 씹어 먹는다. 그것을 우리는 ‘송기’라고 불렀다. 향긋한 솔향기가 배어 있는 그 씹는 맛은 처음 맛을 보던 때의 ‘자일리톨 껌 저리가라’이다. 또 어떤 날은 새 알 꺼내 먹으러 가고, 뜸부기 잡으러 가고, 겨울에는 산토끼를 잡는다고 눈이 덮인 산허리를 노루처럼 뛰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높은 참나무의 새둥지에 기어 올라가서 새알을 여러 개 꺼내가다 큰 대파 속에 깨트려 넣고 불길이 잦아 든 장작 불 위에 은은하게 익혀 먹은 죄는 여러 차례 생각 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진솔하게 회개 기도를 드린바 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어미 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알도 부화되면 생명을 가진 새끼인데 새의 새끼로 부화될 알을 유괴하여 먹어 치운 죄를 회개(悔改)하였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명산이 많아서 가보고픈 곳이 많다. 요즘도 여전히 이용하는 이발소의 새로 바뀐 이발사는 충남 청양의 두메산골에서 젊은 시절에 상경하여 평생을 이발사로 노년기를 맞은 이이다. 그는 쉬는 날이면 전국의 아름다운 명산을 골고루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하였다. 친목 산악회원으로 몇 년을 지내다 보니 팔도의 아름다운 산을 계절마다 거의 모두 다 가 보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명산도 찾아 가고 등산해 보고 싶은 마음이 클 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찾았던 그 산들을 방문하고픈 마음이 더욱 더 크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모리아 산에서부터, 양을 치던 모세가 나이 팔십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하던 호렙 산에도 가보고 싶다. 그 모세가 사십 일간 금식하며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받았던 시내산 정상에도 올라가 보고 싶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고백하며 연세 팔십 오세의 갈렙이 정복하길 열망하였던 헤브론 산악 지역에도 가보고 싶다. 다윗이 사울 임금의 칼과 창을 피하여 숨어 지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기도하던 십 광야 남쪽의 하길라 산에도 가보고 싶다. 다윗의 눈물이 배어 있고 기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마온 광야와 엔게디의 요새에도 가보고 싶다. 그 뿐이랴.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불의 응답을 체험하였던 갈멜산 정상에도 올라가 보고 싶다. 세례 요한이 광야 생활을 하던 그 들판에도 가서 기도해 보고 싶다. 예수님이 팔복 설교를 하시던 산언덕에도 올라가 보고 싶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올라가셔서 변형을 체험하신 변화산 정상에도 방문해 보고 싶다. 그 외에도 반드시 가 보고 싶은 곳은 겟세마네라고 이름 하는 감람산이다. 평생 그 여러 산을 일일이 다 찾아 갈 기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요한 계시록 21장에서 사도 요한이 보았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꼭 가고 싶다. 아니, 장차 그 곳에 가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 V 프로그램 중에 보면 어떤 이들은 산 속에서 혼자서 움막이나 동굴에 기식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옷도 입지 않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서 움막에 혼자 사는 노인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처량해 보이는데 그 사람 자신에게는 에덴이 따로 없다. 또 심마니들은 몇몇이 조를 이루어 사철 산에 오르며 산삼과 약초와 영지 등을 채취하여 소득을 분배하여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저들은 깊은 산에 까지 갔다가 되돌아 올 수 없으면 산 중에서 배낭에 넣어 간 비닐로 대강 이슬과 찬바람을 막는 간이 텐트를 치고는 새우잠을 청하고 또 새날의 아침을 맞이하고는 한다. 우리나라의 삼분의 이 이상은 산이다. 삼면이 바다로 감싸져 있고 처처에 높고 낮은 산들이 흔하다. 그래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더욱 아름답다. 공자는 논어에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라고 하였다. 공자의 “어진 자는 의리(義理)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으므로 산을 좋아하고, 지혜(智慧)로운 자는 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으므로 물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표현이 ‘요산요수’(樂山樂水)이다. 나라마다 산이 좋은 이들은 산을 찾아 가고 물을 좋아 하는 이들은 강과 바다를 찾아 나섰다. 오대양을 누비며 신대륙을 탐험하던 이들의 피 끓는 심장에는 물을 좋아하고 먼 바다를 향하며 저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던 탐험가의 피가 샘솟은 것이 아니겠는가.
몇 해 전에 네팔 선교지 방문차 갈 때에 산악인 엄홍길 대장도 같은 비행기 안에 동승한 것을 보았다. 그는 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네팔의 산악 지대에 살아가는 열악한 환경의 이웃들과 어린이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실 때에 모리아 산꼭대기에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계명과 율례의 말씀을 주실 때에도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로 불러 올리셔서 사십 주야를 금식하게 하셨다. 다윗이 기도하고 준비하였고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칠년 동안 걸려서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의 터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던 그 모리아 산언덕인 것을 보면 하나님은 산을 소중히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불교의 승려 성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남겼다는데 그도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의 산 사랑과 물 사랑을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산은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의 처소요 물은 인간을 죄와 악으로부터 구별하며 성결하게 하는 세례의 상징이요 성령을 표징하는 것이니 말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광야 사십일 기도가 끝나고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 후에 시작하신 사역이 무리 앞에서 산에 올라가 앉아서 말씀을 강론하신 말씀 선포 사역이셨다. 우리는 그것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유명한 팔복설교 말씀도 그 때 그 산에서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5:1)로 시작되는 말씀 선포의 그 산 말이다. 산허리에 내리던 함박눈이 서둘러 하산한 산 아래의 속세(俗世)에서는 어느 새 비로 변하여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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