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하여 먹고 입고 살아간다.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을 비롯한 각양 예술의 발전과 심오한 문화나 문명의 발달은 그 이후의 과제이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적지 않은 부족들이나 아시아권이나 남미 등지의 제 삼 세계 국가들의 종족들 가운데는 비참하리만큼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 자기들의 문자조차 없이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 만의 언어로 최소한의 의사 교환을 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숫자의 개념도 열 손가락과 겉으로 들어난 몸의 외관을 가리켜 정리하는 최소한의 수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지역적인 가뭄이나 극심한 한발과 자연 재해 등으로 마실 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못하여 굶주리면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구는 통계 숫자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많다. 유엔이 앞장서거나 수많은 NGO단체들과 장단기 선교의 목적을 가진 사랑의 손길들이 세계 처처의 오지를 찾아 가지만 여전히 그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불쌍한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다. 모태에서는 물론이고 태어난 후에도 유아에게 반드시 필요한 예방 주사를 맞기는커녕 엄마 젖조차 배부르게 먹어 보지 못하고 굶어 죽어가는 아기들의 모습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나마 사계절이 춥지 않은 여건에서는 얼어 죽을 경우는 별로 없다지만 중국의 북쪽 내지나 러시아나 몽골과 같은 곳에서 혹독한 추위 가운데 겨울을 나는 일은 저들만의 독특한 생존법에 의해서 맹추위와 싸우며 사투를 벌이는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인간이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는 명제는 언제나 철학적이다. 순서로 하면 어느 것이 먼저냐고 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체면을 중시해 온 문화권에서는 먹는 것보다 입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 체면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것도 사계절이 확연하고 계절마다 산과 들과 바다에 제철마다 나는 먹을거리들이 넘쳐 나는 축복의 땅이 한반도(韓半島)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극심하게 가난하거나 흉년이 계속되던 때에는 먹는 문제가 오늘 날 중산층 이상에서 추구하는 웰빙(well-being)의 차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생존 그 자체의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단 옷을 입던 왕족들은 좀 달랐겠으나 평민들이 입는 의상은 열악하였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끝에 위치한 곳에 반도 국가를 형성하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 발전을 이루어 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삼국시대의 역사적인 흔적들과 각 왕조의 황실 문화와 왕족들의 삶의 흔적들이 처처에 남아 있다. 요즘이야 대통령을 지내도 화장(火葬)을 하고 말지만 예전에는 왕의 묘실조차도 그 규모가 어마 어마하고 대단히 화려하였다. 오늘 날도 수도권 주변에 산재한 조선시대 왕족들의 거대한 묘실을 보라. 고려 왕조(877-1392)에 이어 한양에 자리 잡은 조선 왕조(1392-1910)의 흔적들은 600년 고도인 수도 서울의 곳곳에 적지 않은 문화유산으로 보존 관리되어 오고 있다. 올 2012년은 대한민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일천 만 명이 넘는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를 찾는 신기원을 이루는 해라고 한다. 날마다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며 외국인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1,500여대의 관광버스는 교통체증을 더하게 하는 행복한 고민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국위가 선양되는 단적인 증거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흰 옷을 즐겨 입는 민족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봄과 여름과 가을에는 하얀 모시로 차려 입고 여성들도 고운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입었다. 게다가 베옷은 일상의 평상복이었다. 그 후에 목화 재배가 본격화 되면서 무명옷이 보편화 되었다. 고려 시대 말기에 문익점(文益漸,1329-1398)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국내에 보급된 목화의 재배와 목화솜의 생산과 면직물의 직조 기술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의생활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의 도움을 받아 고향 마을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마을에 중국에서 숨겨서 가져온 목화 씨앗을 심었다. 그러나 단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고 거기서 그 해 말에 100여개의 목화 씨앗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과 주변에 나누어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3년 만에 적지 않은 번식이 가능해 졌다. 이는 문익점이 고려 공민왕 12년(1363) 때에 원나라로 가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뽑혀 갔다가 이듬해에 귀국한 이후로 벌어진 일들이다. <고려사 열전>은 문익점의 장인인 정천익이 원나라에서 온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 씨를 뽑는 기구인 씨아와 실을 뽑아내는 기계인 물레를 고안해 내면서 본격적으로 재배와 번식과 직조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모시나 삼베옷은 통풍이 잘되어 시원하지만 한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는 일은 온 나라의 백성들이‘헐벗는 고통’그 자체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베옷 안쪽에 부드러운 풀잎이나 짐승의 털을 넣어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시나 베옷으로 보온을 하며 추운 겨울을 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문익점으로부터 시작된 목화솜의 생산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가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麻)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크게 요구되던 베의 생산과정과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하는 목화솜은 생산성이 높고 섬세한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목화 재배와 목화솜의 생산을 적극 장려했던 세종대왕(1397-1450)은 문익점에게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이지만 부민후(富民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문익점은 백성들의 삶의 질을 풍요롭게 만든 역사적인 인물로서 농민들의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나라 발전에도 크게 공헌했다는 취지에서였다. 세종대왕은“문익점은 민생 향상과 국부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킨 인물이다”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경국대전>이란 사료에 의하면 세종 때인 15세기 중반부터 면포는 국가 경제와 세금 체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시기부터 면포는 마포를 대체하여 국가적으로 화폐와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가령 길이 약 16m에 폭 약 33cm를 한 필로 하고 실 여든 가닥을 1승(升)으로 하여 5승 포를 정식 규격 품질의 면포인 정포(正布)로 정하였다. 조선시대 면포의 가치는 비쌀 때에는 한 필에 쌀 두 말이고 후기에는 한 필에 쌀 한 말 정도였다. 고급인 5승포는 일종의 고가 화폐였고 그보다 구조가 성긴 3승포는 저가 화폐 구실을 했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로 중동 아시아와 유럽 등지를 누비며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사도 바울이 노년기에 붙들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오늘 날의 감옥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의 감옥은 춥고 음산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곳이었다. 사도 바울의 맨 마지막 편지로 전해져오는 디모데 후서 4장 13절에 보면“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부탁하였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 두 가지였다. 추운 감옥에서 겨울을 나기 위한 겉옷 한 벌과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인 가죽 종이에 쓴 성경이었다. 그 겨울을 끝으로 사도 바울은 얼마 후에 순교하였다. 사도 바울이 궁극적으로 입기 원했던 옷은 감옥의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겉옷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덧입혀 주시는 사죄(赦罪)의 옷이요 구원(救援)의 옷이요 영생(永生)의 옷이었다. 영원한 신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고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고 싶어 했던 그 복음의 열정의 옷 말이다. 요즘도“네가 올 때에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성경책을 가지고 오라”는 간절하고 안타까운 목소리가 세계 열방의 곳곳마다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