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스포츠 즉 운동 경기가 우상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건전한 운동은 개인적인 경기이든 단체로 하는 경기이든 얼마나 유익하고 아름다운 육체의 활동인지 모른다. 요즘처럼 올림픽 경기 상황이 생중계로 전해지고 각종 메달 수상자들의 소식이 동시간대에 전 세계에 알려지면 어린이들 중에는 운동에 매력을 갖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각종 경기가 프로페셔널화 되어서 전문 선수들에 대한 동경(憧憬)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물론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신체적인 기량개발이든 지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의 그 어떤 성장과 공헌이든 긍정적으로 보면 모두 다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문제는 지나칠 때인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가장 순수하고 건전해야 하는 올림픽의 경기조차도 종목에 따라서는 부정과 편법이 드러나거나 판정 방법이나 그 결과에 대한 후유증이 본래의 올림픽 정신에서 벗어나거나 멀어져서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언짢게 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에 히피아스라는 인물이 올림픽 경기 우승자의 이름을 기록한 것에 기초한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경기는 기원전 776년부터 매 4년마다 개최되었으며 기원후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약 1,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멈추고 휴전할 정도였다. 그리스 전역은 물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확대되면서 휴전 기간이 한 달에서 두 달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이때는 전쟁 시기라 할지라도 모두 평화와 친선을 중시하고 도시국가간에 화합이 이루어졌다. 올림픽 경기의 종목은 첫 회부터 13회까지는 달리기 경주가 전부였다. 그러나 점차 멀리뛰기와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레슬링, 권투, 전차 경기 등이 포함되면서 오늘날처럼 점점 다양해져 왔다. 고대 올림픽 경기에서는 승리하는 사람에게 올리브 관(冠)과 종려나무 가지 및 우승자의 머리띠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명예를 위해 경쟁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성대한 개선식이 열리고 각종 특권이 주어졌는데 평생 세금을 면제받거나, 사제직이나 장군 또는 지휘관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올림픽 경기가 전 지중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점차 우승자에게 상금이나 연금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올림픽 경기 외에도 각 도시국가별로 수많은 체육제전이 생겨 여러 경기를 돌아다니며 참가하고 상금을 타는 전문 직업선수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 목적으로 오늘날까지 선수활동을 해온 것은 아니었지만 금번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상 최초로 2대 0으로 일본을 꺾고 올림픽 동메달 수상 팀이 된 대한민국 축구선수 18명 전원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는데 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본 경기 경험이 전혀 없이 대기 중이던 수비수 김기희는 경기 종료 직전에 교체 투입되어 나머지 4분을 뛰고 그런 혜택을 받는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금번의 경기 결과는 8. 15 광복절 67주년을 나흘 앞둔 때에 주어진 결과여서 국민들을 더욱 흥분시키고 있다. 이제 축구 경기는 끝났다. 온 국민들과 특히 젊은 후세들이 정치, 경제, 외교, 국방, 과학, 기술, 의학연구 등의 각 분야에서 심기일전하여 명실공이 세계 최강국가로 발전해 가는 번영의 기반을 공고하게 해 나가는데 까지 분발해야만 할 것이다. 여전히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일본을 포함한 기독교세계 선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일본의 누리꾼들은“군 면제를 받은 한국선수를 대신해 일본선수를 군대에 보내 버려라.”,“우리도 메달을 못 따면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등의 재미있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어떤 면으로 하나 운동경기는 언제 누구에게나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고대의 운동경기를 통해서 신앙적인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한 나중 편지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의 생애를 자평하면서“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고 했다. 그렇다. 운동경기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을 평생토록 선한 경주자로 살아가는 성실하고 진지한 삶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바울은 운동경기를 통해서 인생의 선한 경쟁, 목표가 분명한 신앙인의 삶, 믿음을 지켜가는 진지한 인생관, 장차 상급으로 받아 누리게 될 의의 면류관, 각 인생의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미국과 함께 올림픽 메달 수상 최강국인 중국 선수들 중에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비참한 생활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지난해 중국 체조 국가대표 출신이 거지로 전락한 사연이 보도돼 충격을 준적도 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대표를 그만두고 은퇴한 이는 24만 명에 이르며 그들 중에서 상당수가 질병과 가난과 실직에 시달리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뉴욕타임스지는 중국의 이같이 엄격한 국가 통제의 스포츠 관리 시스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고 있다고 세계 언론에 보도하였다. 그렇다. 스포츠인 운동 그 자체가 우상이 되면 개인적인 피해와 후유증이 어떠한지를 교훈하는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중국은 올림픽 경기를 통해서 대통합과 사회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스포츠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쯤 되면 사회적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사도 바울은“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4-27)는 말씀을 통해서 푯대가 분명한 삶, 절제하는 생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의 가치, 복음 전파의 숭고함 등 분명한 삶의 교훈을 운동경기로부터 가르쳐 주고 있다. 금번 올림픽 100미터와 200미터 경기에서 최고 기록을 낸 자마이카의 우싸인 볼트 선수는 2010년 대구에서 있었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때에 출발을 앞서하는 실수로 말미암아 100미터 달리기를 뛰어보지도 못하고 실격된 바 있다. 그는 그 때의 아쉬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다운 고백을 했다.“속은 상하지만 그런 실수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는다.”모든 분야가 다 그러하지만 화려한 등장과 함께 감동적인 퇴장을 준비하는 겸허함과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을 안고도 무리한 경기 준비를 계속해온 역도의 장미란 선수가 최선을 다하던 런던의 경기 무대에서 보여준 참가 매너와 기독교인다운 담담한 태도는 메달을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어떻게 누구나 다 금은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중국의 110미터 남자 허들 유망주였던 류샹 선수의 투혼을 주목해 보자.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는 첫 번째 허들을 넘다가 부상을 당해서 오른 쪽 아킬레스건을 다친 심한 통증을 참고 왼발만으로 껑충 껑충 질주해서 완주하였다. 헝가리의 발라스 바지 선수는 결승점에서 그를 지켜보며 기다렸다가 부축하여 휠체어에까지 안내하는 신사도를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역시 올림픽 경기는 여전히 계속되어야만 하는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