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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가는 길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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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5-10-31 08:40 조회 14,698 댓글 0
 

걸어서 가는 길

 

 

우리 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천리 아냐 만리 길이라도 걸어서 가는 것이다. 요즘이야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걷는 것은 일상이었다. 삼 십리 길을 걸어서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 마을 아낙들의 걷는 걸음으로부터 동네 아이들은 모두가 재를 두 세 개 씩 넘어서 학교에 걸어 다니고는 하였다. 비포장 신작로를 하루에 몇 번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나았다. 읍내 장터에 가는 시골 마을의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맨 몸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자라목처럼 목이 내려앉을 정도의 엄청난 무게의 곡물들과 돈이 될 만한 농산물과 채소와 산나물 등을 머리 위에 이고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때에 나당연합군의 전쟁과 고려 시대 때의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때의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암울해져 가던 개국 직전의 외세 침략과 일제 식민지와 6. 25 사변을 겪으면서 수많은 선조들이 한 반도의 국경을 넘나들며 걷고 또 걸었다. 아니 때로는 피신하여야 했고 때로는 피난하여야 했다. 그들 중에는 6. 25때 걸어서 천리 길 혹은 이천리길 아니면 신의주에서 땅 끝 해남 땅까지 삼천리 길이라도 걷고 또 걸어서 갔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 엉켜 200만 명이 넘는 이들의 피가 도시와 마을과 산허리와 강을 적신 피비린내 나는 조국의 강토를 걸어서 갔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아들들과 남편들과 어린 아들딸들의 아빠들과 삼촌들은 중동의 사막으로도 갔고 독일의 탄광으로도 갔고 월남의 전쟁터로도 갔다.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은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나라, 독일에 간호사란 이름으로 가기도 하였다. 인생은 그렇게 가고 또 가는 것이다. 며칠 전에 천안에 조문을 다녀 올 일이 있었다. 마음이 급하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녀왔다. 천안 고속버스 터미널은 고속도로에서 시내로 진입한 몇 분 후면 도착하는 곳이다. 그 곳에 도착하기 전에 시선을 끄는 곳이 아라리오 갤러리이다. 백화점에 연 이어 있는 천안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그 갤러리의 안과 밖 그리고 그 곁의 백화점 빌딩 주변으로 세계적인 작가들의 크고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갤러리 옥상에 비스듬히 설치된 긴 계단 위를 하늘을 향하여 앞서서 걸어 올라가고 있는 남자와 저 만치 아래쪽에서 하늘을 향하여 걷고 있는 또 다른 한 여성의 조형이다. 2002년에 개관한 천안아라리오갤러리는 서울과 중국 상해를 포함하여 세 곳의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천안아라리오 갤러리의 개관과 운영은 지방 도시의 문화의 격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해 오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의 하나는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원숭이나 유인원(類人猿, Ape)으로 분류하는 침팬지나 오랑우탕이나 고릴라와 같은 동물의 걷는 행위와 인간의 직립보행은 그 수준이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서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수 만 번을 넘어지고 주저앉아야만 한다. 인간은 걷기 전에 무릎과 팔꿈치를 이용하여 기는 동작을 반복하다가 일어서게 되지 않나. 최근에 만난 주변 사람들 중에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산티아고 길을 걸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프랑스 쪽에서 다른 한 사람은 스페인 쪽에서 걸었다고 말했다.

 

산티아고 길이란 대서양에 인접한 스페인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종착지로 하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말한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란 스페인어로 성 야고보 순례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이탈리아, 포르투갈, 독일, 영국, 스웨덴, 폴란드 등 유럽 전역에 뻗어 있다. 그중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걷는 길은 프랑스 남부 국경 마을인 생 장 피드 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바스크, 나바라, 라리오하, 카스티야, 레온을 지나 야고보 사도의 무덤에 도착하는 800km의 길이다.

매년 20여만 명의 순례자가 이 길을 걷다가 가는데 그 중에 한국인이 12,000여 명으로 아시아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찾아가서 걷는다고 한다. 저들 모두가 다 기독교인들은 물론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고독과 침묵그리고 낯 설은 이들과의 만남과 우정을 경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순례를 경험하게 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초대 교회 당시 로마제국 사람들에게 땅 끝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예수의 이종사촌이며 사도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성질이 불같고 급하여 천둥의 아들을 의미하는 보아너게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야고보 사도는 그 곳,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가 서 교회를 섬기던 중에 순교하였다. 그는 스데반 집사에 이어 사도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순교 당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며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12:2)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족들인 유대인들은 야고보 사도의 죽임 당함을 기뻐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헤롯은 베드로마저 잡아다가 죽이려고 하였다. 실제 베드로는 체포 되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 베드로를 감옥에서 풀어내어 피신하게 도운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주의 사자즉 천사였다. 하나님께서 동원하신 천사의 도움으로 옥에서 풀려난 베드로는 그가 풀려나기를 기도하던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방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간증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그 얼마 후에 헤롯은 죽었다. 성경은 그 당시의 역사를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12:23)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더하여 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의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수습해 사도가 활동했던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들판에 안장했다. 그 후 6세기경에 사라센의 침략으로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사라졌다. 그런데 A. D 813년에 그 지방의 양치기들이 별의 인도를 받아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찾았다 전해진다. 그래서 그 곳 지명을별의 들판의 성 야고보라는 뜻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 사도의 무덤에선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서 순례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니 그 어떤 기적인들 부인할 이유는 없다. 그 후에 레오 3세 교황(재위 A. D 795-816)은 그곳에 대성당을 짓게 하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은 예루살렘과 로마의 기독교 유적과 함께 기독교인들에게는 찾아 가 보고 싶은 순례지 들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그렇다. 살아간다는 것은 걸어서 가는 것이다. 에덴동산을 거닐던 아담과 하와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이나 방주를 건설하던 노아 등 모두가 그들 당시에 걷고 또 걸어서 이 땅에 허락받은 인생길을 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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