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조반을 먹으라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 선후배가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혼자다. 누구는 많은 가족과 친척 속에 휩싸여 살아도 외롭고 누구는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이유가 뭘까.
예수는 생명의 떡이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고 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더불어 먹는데 관심을 두셨다. 예수는 육신의 떡을 해결하실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구주이시다.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요6:51)고 하셨다. 예수는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 가운데 둘러앉아 잡수셨다. 제자 마태를 부르셨을 때에도 그의 주변의 많은 세리들이 찾아와 함께 모인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잡수셨다.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해하며 시비를 걸어 왔지만 예수는 어느 사람이든지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고 울기를 같이하셨다.
사람은 서로 함께 만나서 먹고 마심으로 정이 든다. 예수께서는 30세까지 고향 나사렛에서 살았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의 젖을 먹고 자라났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가 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컸다. 나중에는 일찍 돌아가신 마리아의 남편인 아버지 요셉의 빈 자리를 대신하며 어머니와 여럿인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우리가 아는 야고보서를 쓴 동생 야고보, 유다서를 쓴 동생 유다 말고도 여럿의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저들은 늘 좁은 집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고 뒹굴며 같이 사는 한 가족이었다.
12제자들을 부르신 후에도 예수는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24시간을 늘 동행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제자들뿐만 아니라 주변 무리의 먹는 문제와 영의 양식을 항상 풍성하게 해결해 주시고는 하셨다. 맞다. 예수 자신이 그를 믿는 성도들의 영과 육의 양식이시다. 주님과 동행하면 영의 양식도 풍성하고 육의 양식도 새롭게 공급받게 된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대한 대로 그 동안 예수의 제자들은 근심, 두려움, 슬픔, 놀라움, 무서움, 의심, 믿어지지 않는 불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또 만났음에도 그랬다.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밤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가서 만나셨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의심이 가득하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셔서 말씀하시고 못 자국난 손과 발을 보여 주시는데도 그랬다. 심지어는 그들 보는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잡수시기까지 했는데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며칠 후에 베드로가 앞장서고 다른 제자들이 합세해서 일곱 명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 가서 밤새 물고기를 잡으려 한 것이다. 그 밤에도 저들이 마음에는 예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밤을 새워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여전한 불안, 근심, 두려움, 무서움, 의심, 불신 이런 것들이 안개처럼 꽉 짓누르고 있었다. 예수의 부활이 받아들여지질 않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음에도 여전히 꿈인가 현실인가 하고 생각이 정리되질 않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 그러할지도 모른다. 예수 믿는 것처럼 부산스러워하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불신의 강이 흐르고 있다. 의심의 안개에 가리어져 있다. 마치도 다메섹 도성 입구에서 눈이 가리어졌던 사울의 모습과도 같다. 예수는 사울을 삼일동안 앞을 못 보게 하셨다. 삼일 동안 사울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착잡한 날들을 보낸 저에게 선지자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안수하게 하셨다. 그 순간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하셨다. 사울의 마음에 부활 예수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게 하셨다. 그 날 사울은 눈을 떠 다시 보게 된 것뿐만 아니라 부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새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짐승을 타고 살기 등등하게 다메섹 성을 향해 가던 사울의 마음을 누가 바꾸었나. 사울 자신인가. 아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내서 죽여 없애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그에게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찾아가신 것이다. 사울이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울에게 찾아가 만나주신 것이다. 이것이 핍박자 사울이 이방의 부활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는 시작이다.
밤새 갈릴리의 기온이 떨어지고 쌀쌀한 새벽을 맞기까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헛 그물질을 하던 베드로와 저들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찾아가신 분은 예수셨다. 여전히 저들은 예수를 피하고 숨고 멀리하고 떠나 보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 밝아 오지 않은 어두운 새벽 시간에 갈릴리의 해변으로 저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그게 시작이고 그것이 출발이다. 그렇지 않나. 당신은 언제 예수를 만났나. 안 믿어 보려 하고, 예수쟁이들 멀리하려 하고, 교회에 제발 다니지 않고, 기독교와 상관 없이 살아 보려 했는데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된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이 땅의 천하 만민에게 일일이 다가오셔서 예수가 누구신지 깨달아 알고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각 사람에게, 각 마을에, 각 회당에, 각 도성에 찾아다니셨다. 수가성 여인도 만나시고, 뽕나무 위에 숨어 있던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도 만나셨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 곁에도 찾아가셨다. 열병으로 고생하는 베드로의 장모에게도 찾아가셨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찾아가셨다. 12살 된 딸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도 찾아가셨다.
예수는 이 땅에서 늘 누군가를 찾아가고 또 찾아가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숨고 피하고 멀리 떠나려 하는 제자들 곁으로 찾아가고 또 찾아가셨다. 예수는 땅끝까지라도 찾아가시는 주님이시다. 비록 예수를 멀리하려 하고, 도망가려 하고, 피하려 하고, 숨으려 하고, 떠나 보려 하는 제자들이지만 주님의 관심은 저들이 새로운 은혜, 새로운 기적, 새로운 풍성함을 체험하길 원하신다.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진심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길 원하신다. 더군다나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주님의 마음을 제자들이 깨달아 알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풍성한 삶의 수확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가난, 실패, 질병, 사고는 주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아니다.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그렇지 않다. 사탄 마귀는 도둑과 같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다.”(요10:10)라고 했다.
예수 믿으면 꼭 잘되고, 꼭 순조롭고, 꼭 앞서가고, 꼭 부자가 되고, 꼭 성공하고, 꼭 번영하고, 꼭 건강하고, 꼭 형통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딸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형통하길 원하신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기대이며 마음이시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시련 중에도 믿음이 견고해지고, 슬픔 중에서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길 원하신다. 실패와 절망과 낙담 중에서도 다시 회복하게 하실 주님의 위로하시는 품 안에 안기길 원하신다.
왜 기도하나. 왜 “주여 주여” 하나. 왜 새벽에 일어나 엎드려 주를 찾나. 왜 밤중에라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나. 내 힘으로 내 건강을 지킬 수 있나. 내 경제력으로 내 몸을 지킬 수 있나. 내 실력, 내 학력, 내 경력, 내 사회 신분으로 내가 나를 지켜 갈 수 있나. 한 끼의 음식을 먹는 것이 내 힘인가. 주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밥 한 숟가락도 못 씹어 넘긴다. 주님이 지켜 주시지 않으면 내 힘으로 물 한 모금도 못 마신다.
그렇지 않나. 자기 생각, 자기 계획대로 한다면 벨사살 왕이 1,000여명의 고관대작들과 왕후가 지켜보는 연회장에서 그 날 밤에 그에게 죽음이 찾아오길 선택했겠나.
예수께서는 밤새 헛 그물질하던 제자들에게 풍성한 물고기를 잡게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 쌀쌀한 갈릴리 해변에 숯불을 피우셨다. 미리 준비한 생선도 구워 놓으셨고 떡도 구워 놓으셨다. 방금 잡은 싱싱한 생선도 더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추위에 지치고 밤새 배도 고프고 밀려오는 잠을 이기며 씨름 하던 제자들이 숯불 곁에 둘러앉았다. 예수는 친히 생선도 굽고, 떡도 구워서 저들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일일이 섬기셨다. 조반을 먹고 난 후에 제자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물으셨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였다.“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세 번을 물으시고 세 번을 대답하였다. 그리고 다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라”
그렇다. 예수는 우리 각 사람의 주인이시다. 우리 각 사람이 부활 예수를 따르는 사명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부활 예수의 분부하심에 귀를 기울이자. 오늘도, 지금도 부활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의 앞날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부활 예수를 따르는 사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자.
-위 내용은 2021. 2. 7.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