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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룻기(룻1:15-18) 2025. 5. 11 어버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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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07 20:17 조회 24 댓글 0
 

                   다시 읽는 룻기(룻1:15-18)      2025. 5. 11 어버이주일

 

 

 

1930년대 초에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흥렬(1909-1980)이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천재적인 음악성과 탁월한 작곡 실력이 돋보이고 있었다. 가난한 여건에 유학 생활이란 녹록하지 않았다. 결국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피아노가 없이는 더 이상 작곡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꿈을 접고 귀국해야 할 것 같습니다.”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받아 든 어머니는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주변의 산이란 산을 일일이 뒤져 가면서 솔방울이란 솔방울은 있는대로 다 주워 모았다. 그 당시에는 솔방울이 불쏘시개감으로 솔치 않게 돈벌이가 되던 때였다. 그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에 13원이던 때에 400원을 모아서 아들에게 보냈다. 아들 이흥렬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수고,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작곡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해서 1938년에 탄생한 노래가 양주동(1903-1977) 작사 이흥렬 작곡의 <어머니의 마음>이란 노래이다. 이흥렬 29살 때의 작품이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란 아들딸을 낳아 놓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이름이다. 더군다나 일정한 동안 아들딸을 위해서 보호자와 울타리 역할을 다하였을 때 얻어지는 참으로 숭고하고 숭고한 이름이 어머니, 아버지란 이름이 아닌가.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엔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인생을 자식위하여 

삶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 없어라”

 

아들딸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가사는 없을 것이다. 도쿄 음대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한 이흥렬은 ‘섬집 아기, 바위 고개, 봄이 오면’등 수 많은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를 작곡한 주인공이다. 평생 숙대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숙명여대 음대 학장까지 지냈다. 양주동은 평생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을 가르친 시인이다. 

 

어버이 주일에 다시 펼쳐서 읽는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성경은 효도를 가르치는 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을 폄훼하고 기독교를 비난하려는 이들이 “기독교는 제사도 지내지 않고 부모 공경을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철저히 부모 공경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성경이야말로 효도의 지침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것이다. 십계명의 말씀 중에서 사람과 사람에 대한 여섯 가지 계명 중의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라는 말씀이다. 성경의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효도한 인물 중에서 손 꼽는 인물이 아마도 모압 여인 룻이 아닐까. 왜 룻이 효부인가.

 

 

나오미와 룻의 동행(同行).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은 룻기의 내용을 잘 안다. 룻은 모압 여인이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사시시대 말기에 가나안에 가믐이 극심하였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서 모압 땅에 가서 살았다.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살던 이들이었다. 모압 땅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죽고 말았다. 남감한 상황에서 어렵게 지내던 나오미의 두 아들은 장성했고 모압 여들과 결혼하여 살았다. 그런데 어찌된 불행인지 두 아들도 차례대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행한 일이 계속된 것이다.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슬픔 가운데 빠져서 하루 하루 지내던 나오미는 말도 설고 모든 것이 설어서 정이 붙지 않는 마압을 떠나서 남편의 고향인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는 탄식하듯 두 며느리에게 말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그 날도 시어머내의 그런 말을 들은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끌어 않고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네 친정으로 되돌아 가라”고 성화하고는 하였다. 룻기를 읽다가 보면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1:13)라고 탄식하며 울고 또 울며 지냈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는 탄식도 늘어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며느리 중의 하나인 오르바가 기다렸다는 듯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정으로 되돌아 가 버렸다. 그러나 룻은 달랐다. 룻은 여전히 남아서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로하고 또 위로하려 하였다. 그런 며느리 룻의 모습을 성경은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룻1:14)라고 기록해 주고 있다. 동행이란 무엇인가. 붙좇는 것이다. 어떤 형편, 어떤 처지, 어떤 경우, 그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함께 하는 것이 붙좇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가. 함께 하는 것 아닌가. 기쁠때나 슬플 때나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그 어떤 상황을 만날지라도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동행하는 것이 아닌가.

 

시어머니 나오니는 불행하고 불행한 형편이 되었지만 그의 곁에는 늘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는 며느리 룻이 있었다. 이것이 동행하는 것이다. 친구도 그렇고 가족도 마찬가지다. 좋을 때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내가 잘 나갈 때 넘석 넘석하고 기웃 기웃하는 친척도 친척이지만 내가 어렵고 내가 불행하고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괴롭고 내 형편이 형편이 아닐 때 돌아 보아주는 일가친척이 참 가족이 아닌가 말이다. 

 

두 동서 중에 오르바는 친정으로 되돌아 가 버렸는데 남아 있던 며느리 룻은 달랐다.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말했다.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으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그 때 며느리 룻은 숨돌릴 겨를도 없이 대답하였다. “어머니 저에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다시는 말씀하지 마세요”그리고 이어서 한 말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

 

생각하여 보라. 동행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시어머니 나오미로서는 남편이 일찍이 죽고 두 아들이 연이어 죽는 설명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당하고 또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렇게 박복해 보이고 그렇게 불행해 보이는 시어머니 나오미이지만 그녀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좇는 며느리 룻을 남겨 두셨다. 그 모압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위로 하였다. 밤이나 낮이나 시어미니 곁을 지켰다. 이보다 더한 불행 중 다행이 그 어디에 있으랴. 머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한 말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자.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그렇다. 살아가는 것은 동행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여러분 각 사람의 삶을 뒤돌아 보라. 이 자리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들께서 인생을 뒤돌아 보라. 나는 부모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 왔는가. 나는 아들딸 며느리 사위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반대로 이 곳에 함께 둘러 앉은 젊은이들은 생각하여 보라.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 왔는가. 어떻게 어머니 아버지를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은 나에게 살아계신 어머니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신가.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라는 조선시대 정철의 시조가 생각난다.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지킨다. 점차 전세계적으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였다. 그뒤 1972년에 명칭을 어버이날로 바꾸어서 이어 오고 있다. 장미, 국화, 튤립과 함께 카네이션은 4대 절화 중의 하나로 손 꼽힌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자비로움이다. 카네이션의 색깔에 따라서 흰색은 나의 사랑, 빨강색은 열렬한 사랑, 분홍색은 부부의 애정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색깔의 뜻을 분별하지 않고 카네이션은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굳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이지만 카네이션은 에스파냐, 모나코, 온두라스의 국화(國花)라고 한다.

 

성경은“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8-9),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라고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를 외면하지 말고 부모와 삶을 공유하며 동행하는 은혜가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나오미를 대하는 룻의 믿음.

어머니 아버지에게 공경하고 효도하는 최고의 길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다. 룻이 훌륭한 것은 불행하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 곁을 지켜드린 것만이 아니다. 며느리 룻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 모압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불행에 빠진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신앙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룻의 심성을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룻의 변화를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룻의 신앙적인 결단을 살펴 보셨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고백을 하나님이 들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룻의 시댁에 기업무를 자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셨다. 룻은 아주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룻에게 재혼의 길을 열어 주셨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어 찾아간 시댁 마을 베들레헴의 마을 한 귀퉁이에 가낭하게 둥지를 틀고 움막에서 지내던 시어머니 나오미와 모압의 이방 며느리 룻에게 하나님은 베들레렘의 대 지주 노총각 보아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셨다. 룻은 얼굴을 가리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던 초라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아스로 하여금 룻을 연애하게 하셨다. 룻을 아내로 맞이 하게 하셨다. 룻은 남편 보아스의 품에 안겨서 아들 오벳을 낳았다. 온 마을 베들레헴의 여인들은 한 입으로 노래하였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룻4:14-15)

 

오벳의 탄생을 기뻐한 것은 보아스나 룻 뿐만이 아니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통해서 태어난 아기 오벳을 품에 안았다. 오벳은 커서 아새를 낳았고 이새는 커서 다윗을 낳았다. 하나님은 보아스로 하여금 다윗의 증조할아버지가 되게 하셨고 룻으로 하여금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영광스러운 가문을 이루게 되었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 무엇이 바른 길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가. 대를 이어 자자 손손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총을 자자 손손 누리는 복음의 명문가문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오미를 향한 룻의 결단(決斷).

룻의 아름다움은 불쌍하고 불행해진 유다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았다는데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룻은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생사를 같이하려는 결단의 여인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대로 백명 천명의 동행이 귀한 것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 뜻을 같이하고 운명을 같이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을 같이 할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귀한 것이다. 

나오미는 남편 잃고 두 아들을 잃은 불행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모압 며느리 룻을 나오미의 곁에 평생토록 남겨 주셨다.  그 한 사람이 귀한 것이다. 룻은 그 한 사람의 선택 받은 미지의 삶을 살아갔고 하나님은 룻의 앞날을 축복으로 인도하셨다. 룻이 받아 누린 복은 곧 시어머니 나오미가 누리는 모년으 복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은“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라고 노래하며 나오미의 나중 생을 축복하였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보아스와 룻의 아들 오벳이다. 하나님은 그 어느 한 사람의 생애가 죽음 앞에 서기 전에 후손을 주신다. 그 후손을 통해서 효도 받게도 하시고 공경 받게도 하시되 하나님께서 가정과 가문과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거룩한 언약 자손의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 이것이 어머니 아버지를 통한 아들 딸의 영광이며 가족과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그래서 룻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인 룻기 4장 22절은 이렇게 끝난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라”

 

마태복음 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벅차고 감격스러운 이름인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만나면 그렇게 소리쳐서 예수를 불렀다. 맞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자.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며 예배하며 살아가자.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정을 절대로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누가 진정한 효자 효녀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어머니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가. 어머니가 기뻐하시고 아버지가 흐믓해 하시는 그 길을 가자. 나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따라서 사명자의 삶을 살자. 예수께서는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 보아야 하는 십자가에 높이 매어 덜려 죽음을 맞았다.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신을 품에 안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임 당한 지 사흘만에 예수를 무덤에서 살려 내셨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 부활은 기쁨이며 소망이며 능력이며 권세이며 영원한 은총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며 이 땅에 살아 계실 때에 날 낳아주시고 날 길러 주신 어머니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축복의 명문가문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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