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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눅19:28-40) 202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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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4-13 18:22 조회 20 댓글 0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눅19:28-40)       2025. 4. 1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냄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신 제 삼년 째 되던 해의 일이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것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일이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시던 그 날 천사들이 그 지역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말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그 때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왕으로 오셨다. 세상 왕들은 백마를 타거나 여러 마리의 말들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는 했다. 아니면 코끼리를 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나귀 그것도 사람을 한 번도 태워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셨다. 겸손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대하게 된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예수께서는 감람원이라고 불리는 겟세마네 동산 자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 가까이 가셨다. 거기서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셨다. 그 마을 안에서 아직 아무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만나가든 풀러 끌고 오라고 하셨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보냄을 받은 두 제자가 마을에 들어 가 보니 매여 있는 새끼 나귀를 만났다. 그 새끼 나귀를 풀고 있을 때에 주인이 “어찌하여 남의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신다 라고 대답하며 그 새끼 나귀를 끌고 예수 앞에 왔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새끼 나귀의 잔등 위에 얹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께서 타시게 했다.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의 앞에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도착하였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 날, 그 곳에서 있었던 그 장면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은혜로운 종려 주일이 되기를 바란다. 

 

 

기쁨을 주시는 왕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를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가 한결같이 큰 소리를 외치며 기뻐하였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누구신지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쁜 일을 얼머나 경험하며 살아가나. 기쁜 날이 얼마나 되나. 그런데 주님은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사실 예수를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 마음 속 깊은 곳에 기쁨이 생긴다. 그 기쁨은 잠시 잠깐 느낌으로 받는 그런 기쁨의 차원이 아니다. 근원적인 기쁨, 만족한 기쁨,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영원한 기쁨이 선물로 주어진다. 

 

은혜를 받으면 기뻐진다. 말씀이 깨달아지면 기뻐진다. 복음을 깨닫고 나면 기뻐진다. 진리를 알게 되면 기뻐진다. 하나님은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셨다. 그것이 성탄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 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라고 찬양하지 않나.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라고 찬양한다. ‘노엘’이란 프랑스어 ‘Noël’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탄절을 의미하기고 하고 ‘기쁘게 외친다’는 뜻도 담겨 있다. 라틴어의 뿌리는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쁨의 탄생이며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축복과 기쁨이 주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이러한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설명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왕이시다. 기쁨을 공급해 주시는 왕이시다. 세상의 통치자,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을 우울하게 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주신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는다. 성령의 열매인 희락(喜樂)이 기쁨이다. 물론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성도라고 해서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에게도 슬픈 일, 마음 아픈 일, 속상한 일, 괴로운 일, 답답한 일, 충격적인 일, 억울 한 일이 찾아온다. 그러나 주를 믿는 성도들은 그런 환난과 곤경에 갇혀만 있지는 않는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곤경을 벗어나고 슬픔을 극복한다. 찬송가 446장, <주 음성 외에는> 3절을 보라.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기쁘나 슬플 때 늘 계시옵소서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아오니 복 주옵소서”

 

늘 쉬운 비유로 설명하고는 하지 않나. 영어로 기쁨을 ‘JOY’라고 한다.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더불어 이러한 기쁨 만족스러운 기쁨 영원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주변의 이웃을 섬기며 살아갈 때에 남다른 기쁨과 보람과 만족과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것이 섬기는 자의 기쁨이며 돌보는 자의 기쁨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남을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는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몸이 찢기시고 물과 피를 따 쏟아 내시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이란 부활의 기쁨이며 죄와 어둠과 사망을 이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인 것이다. 

 

 

찬송을 받으실 왕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과 무리는 기뻐하며 큰 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다른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길에 깔았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 보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찬양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왕이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문명에 영원히 추앙을 받을만한 왕이 있는가. 물론 뛰어난 업적을 드러낸 왕들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로 하면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을 대왕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정도의 업적, 그런 정도의 치적, 그런 정도의 공로를 가지고 추앙 받는 왕이 아니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한 계시록 5장 11절 이하에 보면 천천 만만의 천사가 큰 음성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5:12)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찬송의 내용은 요한 계시록에 계속하여 반복된다. 왜일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찬송을 받으실 전능하신 왕이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보면,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 받으실 왕으로 찬송할 이유인 것이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라도 매 순간마다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평화를 이루시는 왕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곁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의 찬송의 가사가 무엇인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하였다. 그 무리들 중에는 어떤 바래새인들도 섞여 있었다. 그 바리새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제안하였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만인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이게 무슨 뜻의 말씀일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시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심으로 세상 사람들은 그가 누구신지를 주목하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 세상 통치자는 로마의 황제였다. 가이사 즉 시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서서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영원한 평화, 영원한 영광을 성취하시는 역사적인 대업을 이룩하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낸바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으셨고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고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을 선물해 주셨다. 

 

새끼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진정한 평화를 선물해 주셨다. 이 평화는 완전한 평화이며 부족함이 없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유한한 평화가 아니다. 부분적인 평화가 아니다. 이 평화는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이다. <주는 평화>라는 찬양을 부르자.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죄와 악과 불순종의 담장을 모두 다 헐어 버리시고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늘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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