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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롬8:23-27) 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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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03-16 14:32 조회 5 댓글 0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롬8:23-27)          2025. 3. 16

 

 

기도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다운 기도는 내 안에 임재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르고 성령을 의지하는 자라야만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의 결과는 죄와 사망뿐이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얻게 된다.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만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내 안에 모시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라야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양자의 영’(롬8:15)을 받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은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성도는 천대 받는 양자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 받는 양자요 인정 받는 양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는 양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지금 받는 고난이 있다면 그 고난은 장차 성도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라는 속담도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속담도 있다. 성경적으로 하면 고난의 십자가가 없는 영광의 날이란 없는 법이다. “NO CROSS NO CROWN”, “KNOW CROSS KNOW CROWN”인 것이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라는 찬송가이다. 이런 찬송을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따라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튜브에 들어가서 보면 북한 지하교회의 예배 장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소문으로 듣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와 목소리를 낮추어서 간절함을 담아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초대교회의 역사에 지하 카타콤베의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주님이 오늘 날 우리 각 사람, 각 가정, 교회와 나라와 성도들의 부르짖음에 분명하게 응답해 주실 것이다. 북한 지하 교회 성도들에게도 자유로운 예배의 날을 분명히 허락하실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인 로마서 8장 23절의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는 해석은 “성령을 하나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라고 번역해야 훨씬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된다. 그렇다. 성도인 우리는 성령을 하나님의 첫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셨다. 승천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라고 분부하셨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바람과 같은 성령,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초대 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구원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 소망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당장  내 눈에 앞에 이루어진 그 무슨 일이라면 그 이루어진 것으로 만족하면 되지 더 소망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성도의 소망이란 장차 이루실 완전한 구원을 향한 소망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믿음이란 구원에 대한 소망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하였다. 25절 말씀이 그런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그렇지 않나. 그 어떤 일이든 성취되기 까지에는 참고 인내히며 기다리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믿음과 소망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인이든, 가족이든, 나라의 일이든 그 어떤 환난을 겪을때에 참고 견디며 인내하게 되지 않나. 그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각 사람의 몸와 마음이 연단을 받게 된다. 그 연단의 날들을 통해서 우리는 정금처럼 빛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소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 시골 장터에는 낫이나 칼이나 호미를 벼르는 대장간이 있었다. 재래식 풍로의 열기로 낮이나 호미를 시뻘겋게 달군다. 그리고 연신 망치로 내려 친다. 그런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는 대장장이의 마음에 흡족한 낫과 칼과 호미와 같은 연장들이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끊임이 없는 소망을 주시길 원하신다. 그 소망 안에서 지금 겪는 환난과 역경과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길 원하신다. 그 후에 정금처럼 빛나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 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자녀인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나에게 임하는 성령의 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기도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으신 로마서 8장 말씀 가운데 특별히 26-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에게 보내 주시는 성령은 과연 어떠한 영이신가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였다. ‘성령도’가 아니라 ‘성령은’이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 성령은 우리 각 사람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영이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그 누구라도 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문화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 사회적인 지위, 신분, 역할 등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라도 다 연약한 존재이다. 권력의 옷을 입고 명예의 옷을 입고 인기의 옷을 입고 재물의 옷을 입고 떵떵거린다 해도 인간은 다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며칠 전, 새벽 기도회 시간에 히스기야 임금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25살에 왕이 되었다. 남 유다의 제 13대 왕이었다. 그런데 39살에 죽을 병에 걸렸다. 생각해 보라. 죽을 병에 걸렸는데 왕이면 뭘하고 장군이면 뭘하고 대단한 학자면 뭘하고 재벌이면 뭘하겠는가. 그런 저가 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를 병에서 고쳐 주셨다. 악성 피부 질환으로 다 죽어가던 히스기야 임금이 다시 살아 났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은 이제 더 못 살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벽을 향하여 기하는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목숨을 15년을 연장해 주셨다. 살고 죽는 것이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흥망성쇠 길흉화복이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이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면 성령이 연약한 인간을 도우신다. 성령은 연약한 인간에게 임하셔서 지혜도 주시고 분별력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활력도 주시고 감당할 만한 지정의(知情意)의 권능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신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25년 전 즈음에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 운전 중에 테이프로 처음 들었다. 따라 부르고 또 불렀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경배합니다.

성령님 채워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그렇다. 우리가 다 부족하고 다 연약하고 다 미련하고 다 허물과 죄가 많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연약함을 도와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다 연약한 존재들이다. 가정에 심방을 가면 자주 찾아 부르는 찬송이 있다. 563장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가이다. 

 

1.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3.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질문해 보자. 강건한 자녀에게 마음이 가나. 연약한 자녀에게 마음이 더 가나. 물을 필요가 없지 않나. 몇 주 전에 남태준 집사의 주일 헌금 봉투에 적힌 기도 제목을 읽었다. “제가 영적으로 아주 건강하게 해 주세요. 오직 하나님만 오직 주님만 생각나게 해 주세요.”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나.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겠나. 

 

사순절 새벽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가정에서라도 유튜브를 열어 놓고 실시간 기도의 자리에 마음을 모으자. 자기 자신과 가족과 자녀들과 교회와 나라와 이 시대에 산적한 기도 제목을 붙들고 기도하자.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 자신의 연약함이 강건해 지기를 간구하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

로마서 8장에는 3번의 탄식이 언급되어 있다. 22절에는 피조물의 탄식, 23절에는 성도의 탄식, 26절에서는 성령의 탄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탄식이란 우리 단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 보면, ‘groan’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음하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그렇다. 왜 이 세상의 피조물이 탄식하는가. 왜 이 세상의 인생들이 탄식하는가. 왜 성령님이 탄식하시며 신음하며 괴로워하며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는가. 세상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성령을 하나님의 첫 선물로 받은 성도들조차도 양자로서 누릴 죄사함의 은총과 속량을 위하여 탄식한다고 하였다. 성령조차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기도하다 보면 친히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성령은 신음하며 괴로워하며 친히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주님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처럼“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이런 찬양을 부르는 성도의 중심을 주님이 주목하시고 보살펴 주실 것이다.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요즘 개인적으로는 이 찬양을 읊조리며 기도하고는 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답답할 때가 있다. 답답할 때가 많다.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탄식’이란 표현은 불순종하여 타락하고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이 죄악 많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원 창조인 에덴의 창조의 회복을 열망하는 간구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갈망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2절에 보면 이 ‘새 하늘과 새 땅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마치도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하였다. 결혼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여성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날이 신부의 단장을 한 그 날이 아닌가.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없는 것이 있다. “눈물, 사망, 애통, 통곡, 아픔”이 없다고 했다. 어떤가.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설령 지금 그런 평화와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한들 영원히 그런 평안을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주인공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편이다. 거기에 보면 모세는 “인생은 잠깐 지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과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90:5-6)라고 하였다.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9)라는 고백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후반부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 37)“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라고 말씀하였다. 

성도의 삶이란 절대로 탄식과 신음과 괴로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사랑을 받는 아들딸들의 신음과 괴로움과 탄식을 거두시길 원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소망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와 평강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말미암아 그 나중을 점점 은혜롭고 복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하였다. 그 다음 절인 예레미야 17장 10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도 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양자인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기를 원하시다. 성령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각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며 살아가도록 돕는 영이시다. 내 생각, 내 주장, 내 취향, 내 입장, 내 고집, 내 소원에 갇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참다운 기도자의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을 찾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의 마지막 기도가 무엇인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지 않았나. 누가 쓴 잔을 원하겠나. 누가 십자가의 죽음을 좋아 하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결정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기도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 고난의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모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60년 전인 1965년에 발표된 영화이다. 마리아는 수녀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고 있는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진 노래 잘하는 소녀였다. 

 

잘츠부르크 수도원의 수련 수녀 마리아가 트랍가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이야기가 시작된다. 트랍가의 7명의 아이들은 엄마가 돌아 가셨다. 홀로 남은 남편은 해군 대령으로 예편한 엄격한 아버지였다. 이러한 교육방식에 심한 저항감을 느낀 가정 교사 마리아는 대령이 빈에서 그의 곁을 찾아 오는 백작 부인을 맞이하려고 먼 길을 떠난 사이에 아이들을 산으로, 마을로 데리고 다니며 노래를 가르치고 자유롭게 교육시킨다.

 

돌아온 대령은 화를 벌컥 냈다. 그러나 구김살 없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만족하게 된 그는 이러 저러한 우여 곡절 끝에 마리아와 결혼하게 된다. 저들이 신혼 여행을 떠난 사이에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나치 톡일에 합병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 명령을 받은 그는 아내와 일곱 자녀들을 데리고 수녀원으로 피신한다. 우여곡절 끝에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고 알프스 산맥을 넘고 넘어서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로 망명하는데 성공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 된다. 

 

원래 이 영화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폰 트랍의 자서전인 <트라프 가문의 가수들 이야기>라는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이다. 

아내와의 사별, 육아의 한계, 전쟁의 불안, 재혼, 피신, 도망, 평화의 땅 스위스에 정착하는 과정의 이야기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다. 희망적이다. 소망이 넘친다. 기분이 좋아진다. 전쟁과 억압과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알프스 산을 넘어 희망의 나라로 향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다. 불안과 고난이 아니다. 평안과 소망이다. 기쁨과 감사이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성도들의 나중을 그렇게 인도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지금보다 나중이, 오늘보다 내일이 점점 좋게 하시고 점점 복되게 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중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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