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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건(고후3:12-4:2) 202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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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3-03 22:57 조회 205 댓글 0
 

                      마음의 수건(고후3:12-4:2)               2025. 3. 2

 

 

출애굽기 32장에는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나온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정상에 오른 후에 백성들은 모세가 하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모세의 형 아론에게 다그쳤다. 아론은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르 빼어 내게로 가져 오라”라고 명하였다. 아론은 그렇게 모은 금을 녹여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송아지 우상이다. 저들은 “이것이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선언하였다. 아론은 앞장서서 다음 날로 다가온 안식일을 준비하며 황금 송아지 우상 앞에 제단을 쌓게 하였다.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려 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그 후에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라고 책망하셨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아론을 앞장 세우고 황금 송아지 우상 앞에서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고 크게 노하였다. 손에서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트렸다. 모세는 황금 송아지를 불살랐다.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버렸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했다. 그 일로 형 아론과 큰 다툼이 벌어졌다. 

 

시간이 흘러 갔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부르셨다. 모세로 하여금 친히 두 돌판을 다시 준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 두 돌판 위에 우리가 아는 십계명의 말씀을 새겨 주셨다. 모세가 그 두 증거의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 왔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친 후에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마음의 수건’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된 배경이 이것이다. 내 얼굴을 수건으로 스스로 가린다면 상대방이 내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도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바깥에 외출할  때에 자신의 얼굴을 눈만 내 놓고 가리는 종교적인 문화를 접하고 있다. 얼굴을 가리면 누가 누군지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수건으로 가리면 내 마음이 가려지고 말게 된다. 마음이 수건으로 가려 진다는 것은 마음이 완고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3장 14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완고(頑固)하여’라고 하였다. 완고하다는 말은 ‘마음의 생각이 무디고 둔하고 굳어져 버린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 자기의 신념이나 주장이나 사상에 갇혀 버린 답답한 상태를 말한다. 

 

변화 되기 이전의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자였다. 사도행전 9장의 다메섹 변화 체험 이전의 사울의 영적 상태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는 마음이 수건으로 가리워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보냄을 받았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시작으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사울은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든 상태였다. 그의 마음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잡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다메섹 성 가까이 갔을때에 하늘에서 강한 빛이 그에게 비치었다. 짐승을 타고 이동 중이던 사울은 짐승의 등에서 땅에 떨어져 엎드러졌다. 그 때에 큰 소리가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이렇게 시작된 사울의 변화 체험은 그로 하여금 마음의 수건이 말끔하게 벗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15절의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다’라는 표현은 모세의 율법에 갇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로 하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기 믿는 무속 신앙이나 탐욕이나 어리석은 세상 종교에 골몰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주님은 다메섹 성 안의 직가라는 거리에 사는 유다의 집에 앞을 못 보게 된 사울을 머물게 하였다. 사울은 삼일 동안 눈이 보이질 않았다. 주님은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셨고 사울에게 안수하게 하셨다. 사울은 못 보던 눈이 밝아졌다.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였다. 사울은 그날 그 곳에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새 힘을 얻었다. 사울은 그 곳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즉시로 각 회당을 방문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점점 성령 충만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사방에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사울은 이날 이후로 그의 마음의 수건이 완전히 벗겨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의 시작이다. 

 

그런 체험과 간증을 간직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오늘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에서 마음의 완고함을 떨치고, 마음의 수건을 벗어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따르며 섬기고 전파하며 살아가자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라.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 보니까,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돌아가면’이라는 ‘에피스트렙세’라는 말씀은 ‘회심(悔心)하면’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면 그 마음을 가리고 있는 마음의 수건이 말끔하게 벗겨지리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생활이란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우리가 누구의 집에 방문하려면 현관 문 앞에 가서 벨을 누리지 않나. 집안에서 주인이 현관문을 열고 우리를 영접하면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그 집에 들어가서 응접실에 둘러 앉는다. 이야기도 나누고 과일도 함께 먹고 커피나 음료수도 함께 마신다. 주인이 정성스럽게 차려 주는 음식도 함께 먹는다. 주인과 더불어 손님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 좋은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신앙 생활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 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이 작품에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손에 환한 등불을 들고 계신 예수님을 잘 묘사하였다. 예수님의 어깨에는 황금박을 넣어 직조한 화려한 오라가 걸쳐져 있다. 머리의 가시관은 희생을, 어깨에 두른 망토는 신성함을, 손에 든 환한 등불은 세상을 밝히는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1851-1853년경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낡은 문과 문가의 무성한 잡초는 인류의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나를 상징하는 것이다. 분위기로 봐서 어두운 밤 시간이다. 밤을 묘사한 것은 인간 세상의 무지와 죄를 상징한다. 등불을 밝혀 손에 드신 예수님의 형상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을 묘사한 것이다. 

 

윌리엄 헌트는 이 작품을 세 번 그렸다. 첫 작품(1851-1853)은 영국 키블 대학(Keble College), 두 번째 작품(1853-1854)은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세 번째 작품(1900-1904)은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인가. 우리가 어떤 낯선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고 나올 때 보면 출입문 위에다가 북어 몇 마리를 굵은 실타래로 묵어서 매어 단 집을 본다. 그것이 그 식장 주인의 영적 상태이다. 지금 나는 어떤가. 혹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겨우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돈 잘 벌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아들딸 잘 되게 해 주세요. 부자 되게 해 주세요. 무병장수하게 해 주 주세요.”그런 기도에 갇혀 사는 정도라면 아직 마음의 수건이 벗겨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살고 진리 안에서 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차원에 갇혀 지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마음의 수건에 벗겨지고 나 자신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그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내려 놓음>이란 책의 저자인 이용규 선교사는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최고의 명문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중동지역학과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몽골 국제 대학교의 부총장직을 맡았던 선교를 시작으로 2012년 이후로 지금은 인도네시아에서 초중고 대학교를 세우고 발전시키는 기독교 교육 선교의 선봉에 서 있다. 

 

물론 다 선교사로 살 수는 없다. 다 신학교에 가란 말도 아니다. 다 목사가 되란 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주께로 돌아간 자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 믿는 이들 사이에 섞여 사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고 예수께로 돌아간 자 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며 회심의 삶이 아니겠는가.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으로 계셔서 나의 생각과 결정과 판단과 범사를 주관하시도록 위탁하는 겸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시간 사용이 다르고, 물질 사용이 다르고, 돈의 사용처가 다르고, 관심사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단 말이다.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내가 이제 살아도 주 위해 살고 

내가 이제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 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올 한해 그리고 평생토록 주께로 돌아간 자 다운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나면 나 자신의 영혼에 자유함이 임하게 된다. 세상 종교는 금하는 것이 많다. 모세의 율법도 그러하다. 뭘 먹으면 안되고 뭘 하면 안되고 어딜 가면 안되고 이처럼 제약과 금지가 많다. 그러나 주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자유함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자유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가득하던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시던 자유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빛의 창조이다.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창조되었다. 빛의 창조는 우주 삼라만상의 창조의 시작이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어둠이란 상태는 죽음의 상태와 같다. 우리는 빛이 있으므로 그 빛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밤이 어두웠다. 전기가 마을에 들어오고, 집 안에 방마다 전깃불이 밝혀 지기 이전의 밤 문화는 참으로 어둡고 답답하였다. 전기의 발명, 전기의 상용화는 인류 문명의 발전사에 상상을 초월하는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이처럼 사람이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고 성령 안에서 자유함이 주어지는 영적 깨달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이며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을 가리고 있는 수건이 벗겨지는 체험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인 것이다. 우리는 각 사람이 누구나 다 일일이 내 마음의 수건이 벗겨지는 영적 회심의 체험을 가져야만 그 깨달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각 사람은 깨달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정도가 다 다를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정도가 다 다른것처럼 말이다. 고기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기의 맛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을 본다. 상추쌈에 고기 한 점을 올리고 마늘과 청양고추와 양파를 얹고 쌈장을 잔뜩 발라서 먹는 것은 고기의 제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란 것이 그렇다. 복음 그 자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누리는 자유함을 선물과 혜택으로 누리게 된다. 이것은 “은혜 받았다” 혹은 “은혜가 뭔지를 안다”는 정도의 차원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의 영역인 것이다. 

 

요즘이야 바나나가 흔해 빠찐 과일이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그렇지 못했다. 동남아 선교지에서 두리안을 처음으로 먹어 본 적이 있었다. 희한한 맛이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에도 두리안이란 과일이 수입되긴 한다지만 그 값이 만만치 않다. 사실 두리안은 현지에서도 싼 값의 과일은 아니다. 둘리안을 한 번도 못 먹어 본 이에게는 아무리 두리안 맛을 설명해 주어도  그 맛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두리안을 먹어 보고 나면 두리안에 대한 향수가 생기게 마련이다. 복음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주의 말씀 안에서 복음을 깨닫고 마음을 덮고 있던 수건과 같은 편견과 고집과 완고함에서 벗어나게 되면 내 영혼에 자유함이 주어진다. 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자유함이란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가 복음을 누리는 자유함이란 두리안이 값비싼 과일인것처럼 그렇게 접해야 하는 세계가 아니다. 진리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는 값 없이 거저 받아 누리는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오늘 참여하는 성찬이 그러하다. 성찬의 의미, 성찬의 은혜, 성찬의 감격, 성찬의 축복, 성찬에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알고 믿고 떡과 포도주를 받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차이는 너무나도 큰 것이다. 

 

 

진리를 나타내는 직분을 다하라.

4장 1절의 ‘직분’, 4장 2절의 ‘진리를 나타냄’이란 말씀이 그런 말씀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러한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이 직분 앞에서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깨닫고 수행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이란 것이 주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핍박자요 박해자요 포행자였던 살기 등등하던 사울이 어떻게 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는가. 이는 전적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입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을 낙심케하는 수 없는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역경과 시련에 대하여 간증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율법 안에서 잘 나가던 사울인데 율법에 갇혀 살던 마음의 수건이 벗겨진 후에 그가 겪어야 했던 복음 전파자로서의 고난이란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에게는 넘치는 수고,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을 뻔한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다. 한 번은 돌로 맞았다.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는 일을 겪었다. 일주야를 바다에서 살아 남았다.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들로 인한 위험을 당해야 했다.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잠을 못 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다. 어떤 때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쳐야 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날마다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가득하였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약한 자들과 함께 약해 하였다. 실족한 자들과 함께 실족하였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고후11:31)라고 간증하였다. 

 

성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감상적인 일이 아니다. 이는 의무요 사명이요 분부하심이요 명령이다. 고린도 후서 3장 18절의 말씀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전파하는 이 직분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은 주의 영광을 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하는 일이다. 이는 오직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일이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집사 스데반의 설교한 후에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온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초대 교회의 때나 오늘 날이나 성도의 영광, 직분자의 영광이 있다. 집사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 이런 직분을 존귀하게 여기자. 속장 교사의 직분을 소중하게 여기자. 왜 그런가. 하나님 앞에서 성도가 누리는 직분자의 영광이란 세상의 그 어떤 권력, 그 어떤 인기, 그 어떤 명예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았는가. 마음의 수건이 벗겨졌는가. 주저함이 없이 이 진리, 이 복음을 주변에 전파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부르심의 직분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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