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가라(시37:1-11) 2025. 2. 23
시편 37편은 36편과 함께 다윗이 쓴 지혜시이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 통치 왕국을 소원하며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며 이와 같은 계도적인 시편을 남기는 은총을 입었다. 마치도 시편 1편의 말씀을 재 해석하는 듯한 내용으로 가득찬 말씀이 담겨 있다. 39절에 보면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앞 절인 38절에 보면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며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상에는 악하게 살고 편법으로 살고 불의한 방법을 떡 먹듯이 하며 살면서도 잘되기만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의 때에도 그런 인간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1절에서 거론하는 악행하는 자나 불의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세상을 활보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하나님 없이도 살 것처럼 세상을 막 살아가는 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세상에는 악을 일삼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의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악인 때문에 불평하거나 불의하게 살면서 형통한 주변 사람 때문에 시기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였다. 7절에서는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8절에 보면,“악한 꾀를 써가며 잘 되는 이들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를 그치라”라고 하였다. 불평할 가치 조차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 경우는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하였다. 2절에 보면,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라고 하였다. 9절에 보니까,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그 누군가가 저지르는 악행이나 불의한 자들이란 때가 되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10절에 보니까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라고 말하였다. 성경의 역사를 보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어떻게 되었는가. 아이성 점령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간의 범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의 나중은 어떻게 되었는가.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가롯 유다의 말년은 어떻게 되었느냐 말이다. 우리가 악을 가까이하고 불의를 짝하면 그 나중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악하고 불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교훈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3절에 보니까,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으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5절에 보면, 여호와께 자신의 살아가는 길을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고 살아가면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과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교훈하였다.
그렇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이 잘 되고 번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흔들리지 말고 굳굳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맡기고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이 복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과 경쟁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에 대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내가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악한 자들의 악행이나 불의한 자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 흔들리지 말고 굳굳하게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3절의 “선을 행하라”라는 권면이 무엇을 뜻하나. 선을 행하는 것은 생각이나 명상의 차원이 아니다. 그야말로 행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가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예수의 비유가 나온다. 예수께서 재림주로 강림 하실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하시겠다고 하셨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라고 하셨다. 오른 쪽에 구별한 이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고 축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을 자의 선행이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드렸고 목 말라하실 때에 머실 것을 드렸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한 자들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헐 벗었을 때에 입을 옷을 드렸고 병드셨을 때에 돌보아 드린 자들이라고 하셨다. 옥에 갇히셨을 때에 면회하고 돌아 본 이들이라고 하였다.
그 때에 이런 칭찬을 받게 된 자들이 예수께 질문하였다. “언제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까”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대답해 주셨다.
그런데 왼편으로 구분된 염소와 같은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하셨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꾸준히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꾸준히 선한 일에 참여하고 선교와 구제와 봉사를 목적으로 한 헌금에 참여하는 일을 기적을 이루는 일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매주 혹은 매달 그리고 속회 예배로 둘러 앉을 때마다 봉헌하는 작은 헌금이 모여서 큰 일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꾸준히 선교사를 후원하고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들을 후원하며 다양한 선한 사업에 열심을 다해 오고 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다. 주님께 칭찬 받을 일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 보면 내 주변의 약한 자를 돌보고 섬긴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 복을 받을 일이며 장차 영생하게 될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1)라고 하였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고 무슨 일인가를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사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그런 감동과 감화와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령 받은 성도들은 서로의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두었다. 저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의 물건을 공유하였다.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 보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
올해는 한국 선교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는가. 저들은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서양의 발전한 문물을 가지고 왔다. 서양의 선진화된 의술과 의약품을 가지고 왔다.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쟁 고아들과 홀로 된 여인들을 돌보고 섬겼다. 한센 병과 같은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우리가 아는 중앙대학교 전신인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자요 중앙대학교의 학장과 이사장과 총장을 지낸 임영신(任永信, 1899-1977)은 구한말인 1899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마을에 설립하고 운영하던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에 15살 때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유학할 길이 열렸다. 거기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 들였다. 지도력을 가지고 기독교 학생 동아리를 주관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6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하였다. 24살 때인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일본군대가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청년 임영신은 학살 장면을 찍은 수백장의 사진첩을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건너나서 이승만을 만났다. 일제의 만행을 미국과 세계에 고발하길 원했다. 그 이태 후에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6년 동안 유학을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나중에 YWCA 총무로도 섬겼다. 15살 여학교 때에 접한 복음의 씨앗이 한 사람의 생애를 움직여 간 것이다. 충남 금산군 시골 마을의 한 소녀에게 복음이 들어 갔을 때에 주님의 선한 손길이 그의 생을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선한 행실로 이끌어 간 것이다.
어저께 청소년부와 청년부 겨울 수련회가 있었다. 늘 기도하고 기도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의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기와 청소년의 때와 청년기 때에 예수를 만나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길 기도한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붙잡혀 평생토록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주의 선한 일꾼들이 되길 원하고 바란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내 주변의 악한 이들의 악행을 보고 마음 상해 하지 말고, 불의한 자들의 불의를 보고 섣불리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대신에 신실하게 주를 향하며 여호와를 기뻐하며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이 나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4절의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대하는 나 자신의 태로를 일컫는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노아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였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요 온전한 자였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과 늘 동행하던 자였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가길 원했던 노아는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삶을 살아갈 때에 그의 실수나 실패를 뒤로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간계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야곱이었지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부르심을 점점 깨닫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야곱은 점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언약의 후손다운 삶을 이어 나갔다. 인간은 누구나 약하다. 누구나 부족하고 누구나 실수가 많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은 점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분별해 나갈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된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라고 찬양하지 않나. 그렇다. 우리 각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나 자신이 과연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든지 주님이 불편하게 여겨지고 주님의 거북스럽게 여겨진다면 되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복되게 여겨져야 하지 않겠는가. 4절 후반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면 “하나님이 내 마음의 소원을 나에게 이루어 주신다”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렇지 않나.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를 기쁨으로 대하고 즐거움으로 대하고 감사함으로 대하고 중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안다면 그 어느 부모가 자기를 기뻐하는 아들딸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가 부르는 강림절 찬송가 중에 <곧 오소서 임마누엘>이란 찬송가가 있다. 그 후렴이 무엇인가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이라고 찬송한다. 맞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 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 하여라”이와 같은 찬양의 마음은 성탄절 새벽에 한 번 부르고 말 찬송가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항상 가득찬 기쁨의 찬송이요 경배여야 하는 것이다.
시편 100편 2절에 보니까,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생활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각 사람이 매 순간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 갈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새로운 기쁨을 주시고 평강의 영으로 덮어 주실 것이다.
사람들이 강아지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이유가 뭘까. 언제나 강아지가 주인을 반기고 기뻐하기 때문이 아닌가. 반려 동물인 강아지가 말은 못하지만 주인을 반기고 주인을 기뻐하고 주인을 좋아하고 주인을 따르는 것을 주인이 알기 때문에 주인이 그 반려견을 아끼고 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닌가.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아들딸에게 좋은 것을 주고 더 주고 싶어하실 것이다. 이것을 시편 37편의 기록자인 다윗은 “하나님이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로다”라고 하였다. 이는 다윗 자신의 체험이 바탕이 된 간증이요 고백일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생애에 부어주신 너무나도 다양한 응답들을 간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나님 자신도 다윗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다윗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만족스럽게 여기셨다.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다윗은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시편 89편 20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내어 나의 거룩한 기쁨을 그에게 부었도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은 사무엘상 13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한 사울 왕에게 마음을 접으셨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하셨다. 그 주인공이 바로 다윗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13: 14)라고 하였다.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흡족해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담아서 기쁨을 드리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각 사람에게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올 한 해도, 그리고 평생토록 하나님과 기쁨으로 동행하는 중에 나를 향하여 각양 좋은 것들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높이며 살아가는 주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을 구하며 살아가는 생활이란 “금 나와라 뚝딱 은나와라 뚝딱”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며 잠잠히 주의 뜻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우리가 기도 몇 마디 한다고 하나님이 금방 ‘알았다’하고 응답하시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삭 낳은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섬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다른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 3장 8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라고 교훈하였다.
노아가 방주를 건설하며 깨달은 교훈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얻은 교훈이 무엇인가. 모세 시대 때에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터득한 진리가 무엇인가. 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길을 광야에서 사십 년씩 방황하고 배회하여야 했는가. 왕이 될 것이라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온갖 고난과 위기를 겪으며 배운 진리가 무엇인가.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조의 땅에 되돌아가고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가기까기 겪었던 이방 땅에서의 칠십년의 세월은 오늘 날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생각하여 보라. 참고 견디고 잠잠히 기다리고 기다리며 인내하지 않고 이룰 수 있었던 일이 과연 몇 가지나 되는가. 우리 삼 형제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 배고파요, 엄마 배고파요”라고 말하면서 부엌에 드나들면 할머니나 어머니는 한결 같이 대답하시고는 하였다. “애들아. 밥이 뜸이 들어야 먹지”라는 대답이었다. 요즘이야 햇반도 흔하고 전기 밥솥만 열면 따뜻한 밥이 나를 기다려 주지면 옛날에는 달랐다. 우리 속담에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렇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인생사가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사란 것이 발만 동동거린다고 해서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실을 바늘 구멍에 먼저 넣어야지 실로 바늘의 허리를 묶어서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 7절의 ‘잠잠하고’라는 말씀의 뜻은 단순히 침묵한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서두르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맡기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할 때에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안식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기다리다’라는 말씀은 ‘시선을 집중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옳고 공의로우심을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을 내려 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앙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교훈해 주신다. 9절 후반부에 보니까“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하였다. 맞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다 보면 때가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시고 간증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 앞에 빌고 무당을 찾아 다니고 점집에 드나 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설마 우리 중에 누가 그럴까” 라고 속단해서도 않될 것이다. 엘리야와 같은 시대적인 선지자가 살던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고 아세라를 섬겼는가 말이다. 오늘 날도 여전히 ‘바알이여 바알이여’하면서 우상 숭배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으냐 말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다. 아무리 세상에 악인이 가득하고 불의한 자들이 판을 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주의 뜻을 구하는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차지하게 하시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 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좋으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다 읽지 못한 시편 37편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신다”라고 하였다. 26절 후반부에 보니까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