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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우리라면(고후4:5-12)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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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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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6-02 21:54 조회 167 댓글 0
 

                      예수를 믿는 우리라면(고후4:5-12)        2024. 6. 2

 

 

사도 바울은 그의 13편의 편지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변의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동일시하는 겸손하고 아름다운 호칭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도 바울이 ‘우리’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배경에는 그의 곁에 늘 함께 동역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디모데, 디도, 바나바, 실라, 누가 등과 같은 동역자들이 언제나 바울의 선교 현장을 함께 지켰다. 연약한 바울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어 주려했던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같은 부부도 있었다.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라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대답을 본문에서 찾아 보게 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파하라.

사도 바울은 분명한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합니다.

또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여러분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나 그의 곁에서 함께 동역하는 복음 전파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오늘 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닌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나 예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고 자신을 신봉하게 하다가 다 잘못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능력이나 그 무슨 탁월함이나 주장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과 우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흑암과 혼동과 공허 가운데에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시므로 창조를 시작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영광의 광채를 주를 믿는 각 사람의 마음에 비추어 주셨다. 그렇지 않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 체험을 갖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만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몰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씀과 더불어서 바울을 만나 주셨다. 성령을 바울에게 충만하게 부어 주셨다. 삼일 만에 못 보던 눈이 환하게 열려서 다시 보게 되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사도 바울은 그 날부터 다메섹 성에서 시작해서 평생을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복음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 환하게 비친 것이다. 이는 오늘 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이처럼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예배는 억지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주께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는 고백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영과 라는 말은 ‘성령으로’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어제도 구파발 역에서 전도하는데 어느 70대 중반의 여성이 전도지를 받으며 지난 주에도 받았다 하면서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은 조선족으로 중국에 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두 아들이 목사라고 했다. 상해와 동북 삼성 지역에서 목회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서 선교하는 젊은 자매와 함께 머물면서 끊임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길을 찾고 있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분부하셨다. 

 

시내에 가면 새문안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화여자대학교가 있다. 배화여자대학교는 116년전인 1898년 10월에 세워졌다. 기독교 전파와 여성 교육을 목적으로 미국 남감리회(南監理會)여선교부의 간호사 출신의 조세핀 캠벨(Josephine P. Campbell, 1853- 1920)선교사가 지금의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 학교 건물을 마련하고 캐롤라이나학당으로 설립하였다. 그 작은 출발이 오늘날 배화여자 대학교의 시작이다. 조세프 캠벨은 텍사스의 작은 개척교회의 조지프 캠벨 목사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어린 남매를 남겨 두고 젊은 남편 목사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8살 때의 일이다. 어린 아들과 딸도 차례로 병으로 엄마 곁을 떠나고 말았다. 연이어 닥친 불행 속에 지내던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재혼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떨치고 오직 신앙 생활에 정진하였다. 시카고 간호 학교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선교부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다. 청나라의 상해와 소주성 등지에서 10여년간 간호와 선교에 정진하였다. 그 후에 조선에 와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7년 10월 그는 미국 남감리회 파송 제 1호 여성 선교사로 제물포 항에 도착하였다. 44살 때의 일이다. 윤치호의 도움을 받아 선교 지역을 택하게 되었다. 그곳이 지금의 내자동 지역이다. 천진해 보이지만 제대로 씻지 못해서 때 묻고 더럽고 배우지 못한 조선의 어린 딸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작하였다. 여성 기숙학교의 문을 열었다. 윤치호에게 한글을 배웠는데 한달 후에 한글 말을 하는데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밤을 새워 가며 한글 공부에 매진하였다. 얼마 후에는 통역이 없이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대부분 냉소적이었지만 적극적으로 어린 소녀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학생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성경 등으로 확대되었다. 학교의 교명은 윤치호가 지어주었는데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다.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육영수 여사도 배화여자고등학교 출신이다. 

 

1901년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 등이 선교 후원으로 보내준 돈으로 배화학당 내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를‘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Lousie Walker Memorial 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는 훗날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후일 종교교회가 설립되자 윤치호는 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장로가 되고 교회 살림에 헌신하였다. 배화여자대학교의 신종석 총장은 은평 지방 평강교회의 장로이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복음 전파에는 힘이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위축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다 보면 주님이 범사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더해 주실 줄로 믿으라. 

 

 

보배를 가진 질그릇 인생답게 살아가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인생을 ‘질그릇’에 비유하였다. 바울 사도 자신이 병약한 질그릇과 같은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배와 같은 복음의 능력이 있었다. 질그릇의 특징이 무엇인가. 쉽게 금이 가고 깨진다. 질그릇은 약하다. 고려청자도 질그릇이고 이조백자도 질그릇이다. 아무리 귀하고 아무리 비싸도 질그릇은 질그릇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서 다루고 아껴서 사용해야 한다. 질그릇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그릇의 품위와 가치가 달라진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성도들을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표현하였다. 질그릇은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인간에게 주님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선물로 주셨다. 그 구원의 복음은 6절에서 말씀하는“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그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 크신 능력이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송명희 자매는 태어날 때부터 몹시 금이 간 질그릇이었다. 중증 장애 속에서 평생을 살아 가고 있는 송명희(1963- ) 자매의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란 고백시에 곡이 붙여져서 불려져 왔다. 그 가사를 보면 기독교 이천년 역사에 열방 가운데 길이 길이 전해질 만한 은혜로운 고백을 담고 있다. 송명희 자매의 공평하신 하나님의 고백 앞에서 감히 불평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우리는 왜 불행한가. 왜 불행하다고 여기는가. 남과 비교하고 주변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 지금 내게 생명 있음이 얼마나 존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복음을 모르던 내가 우상 숭배하지 않고 육체의 탐심에 갇혀 살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처럼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가. 

 

이지선(1978- ) 자매는 이화여자대학교 졸업반 때에 오빠가 운전하던 자에 오빠 곁에 앉아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자동차에 불이 났고 전신 화상을 입었다. 얼굴도 불에 탔고 손가락도 녹아 내렸다. 30번도 넘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는 그 화재 현장에서 목숨을 건졌다.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탄 질 그릇, 금이 간 질그릇, 깨어진 질 그릇 같은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버티고 살아 남았다. 아니 하나님은 그의 목숨을 보존하셨다. 그는 그런 극심한 고통과 불행을 딛고 공부했다. 박사가 되었다. 한동대학교 교수를 거쳐 지금은 모교인 이화여자 대학교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그의 마음 속에 주님은 보배를 담아 주셨다. 심히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삶으로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의 생애를 이야기 한다. 그는 평생을 몹시 금이 간 질그릇이요 깨어진 질그릇과 같은 연약하고 연약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 담아 주신 주님을 향하신 보배로운 믿음은 평생토록 그의 삶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우리는 평생을 앞 못 보고 살아 온 금이 간 질그릇 같던 파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의 찬송시에 곡을 붙여서 부르고 또 부른다. 우리 찬송가에만도 22곡이나 된다. 그의 찬송만 찾아 불러도 은혜가 넘치고 넘친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 각 사람에게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주셨다. 

 

31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백성들아 사랑을 전하세

40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큰 사랑 주님께 영광 할렐루야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오실 는지 아는 이가 없으나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361장,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 갑니다.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498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 죽음과 죄에서 건져 내며

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532장, 주께로 한 걸음씩 왜 가지 않느냐

540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 여전히 찬송 못하나

620장, 그 큰 일을 행하신 주께 영광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녔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이미 30대 초반부터 이명 증상이 심해졌고 청력을 잃기 시작했다. 그런 여파로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였다. 56세에 눈을 감은 그는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고 전혀 못 듣게 된 상태에서 교향곡 제 9번, <합창>, 미사 곡 <솔레무니스> 등의 대작들을 작곡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신학을 공부하고 한 때목회자의 길을 가기도 했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몹시 쇄약해진 몸과 정신적인 연약함 가운데 역사에 길이 남는 그림들을 그려내고 또 그려냈다. 37살에 생을 마친 그의 불행한 마지막 길을 보고 함부로 말할 수만은 없다. 저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인생들이었다. 

 

GPS(global position system)는 인공위성에서 발사한 전파를 수신하여 위치를 파악하는 ‘자동 위치 추적 시스템’이다. 세계 어느 곳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네비게이션의 혜택을 받는 것도GPS의 혜택이다. 복음의 힘은 마치도 이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능력은 한 두 마디의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고 의와 진리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몇 마디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다. 예수께서는“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지 않나. 예수를 모를 때의 나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라. 예수를 모를 때에는 그저 늘 세상 향락을 얻기 위해서 여기 기웃거리고 저기 기웃거리며 살았던 내가 아닌가.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나니 내 삶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7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보배’란 ‘구원의 복음’을 의미한다. ‘새롭게 하소서’나 ‘내가 매일 기쁘게’에 소개되는 이들의 간증을 보라.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7절에서 말씀하는 바울의 표현 그대로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그 심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주를 믿는 각 사람에게 임할 때에 평화, 은혜, 감사, 소망, 위로, 격려하는 무한한 힘이 나에게 임하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내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약하다. 질그릇과 같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살아가기 시작하면 질그릇과 같이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보배와 같은 복음의 능력 안에서 매 순간 이기며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10절을 <공동번역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루 하루 매 순간마다 예수의 부활 생명이 질그릇과 같은 내 몸 안에서 살아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하라.

11-12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항상 죽을 위험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그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위험을 당하지만 여러분은 영원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0, 11절에는 ‘예수의 죽음’, ‘예수의 생명’이란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계셨다. 예수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질그릇과 같은 몸으로 다 담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무덤에서 부활시키셨다. 예수의 생명이란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 하신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을 이기는 것이 생명이다. 이 세상에 생명을 이길 수 있는 힘이란 없다.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죽음의 위험 앞에서 항상 예수의 생명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자들이기 때문이다. 

 

12절에서 말씀하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사망”이란 바울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 오고 있는 순교의 순간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복음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를 굳게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승리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렇다. 성도는 세상에서 최후 승리를 보증 받은 자들이다. 150장 <갈보리산 위에>라는 찬송가의 후렴 가사를 보라.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 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런 믿음과 이런 은혜가 우리 각 사람의 앞날을 주장해 주시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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