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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일과 땅의 일(요3:9-21) 202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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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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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5-27 22:19 조회 241 댓글 0
 

                    하늘의 일과 땅의 일(요3:9-21)            2024. 5. 26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동시에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인간은 땅의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살지 하늘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요한복음 3장은 유대인의 관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바리새파인 니고데모가 밤 중에 예수께 찾아와서 질문한 질문으로부터 말씀이 시작된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내용의 대화와 질문을 제기하였다.

 

예수께서는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다. 라고 교훈해 주셨다. 예수의 설명을 들은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설명해 주신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땅의 일이란 무엇이며 하늘의 일이란 무엇일까. 예수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구나”라고 탄식하셨다. 니고데모는 의식주의 고민 속에 사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유대 사회의 70인의 산헤드린 의원 중의 한 사람인 바리새파였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영향력이 있는 지위를 누리며 살던 자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

 

그의 첫 화두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그 출발은 거듭나야 한다는 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사람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 법인데 너희는 나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구나”라고 아쉬움을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의 일이란 의식주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땅의 일이란 거듭남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의 일이란 하나님이 계획하신 속죄의 방법, 성육신을 통한 예수의 탄생, 성령의 역사에 의한 궁극적인 구원의 성취”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요3:8)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요즘처럼 과학이 발전하고 기상 관측이 발전한 시대에도 기상 이변으로 재난을 당하는 현장을 보면 속수 무책이다. 토네이도, 홍수, 집중 폭우, 우박 등으로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인명 피해도 발생한다. 미리 알았다면 온 도시가 집중 호우에 잠기도록 그 도시에 남아 있겠나. 토네이도로 내 삶의 근거가 다 박살나고 사라질 것을 안다면 마냥 기다리고만 있겠나. 야구공만한 우박이 하루 종일 내린다면 그 지역에 그냥 가만히 있겠나.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바람이 임의로 불어도 그 소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구원에 대한 관심, 영생에 대한 문제 앞에서도 그렇게 무지무각하게 살다가 죽어가는 이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땅의 일이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거듭남을 통한 구원의 시작을 말씀한다. 또한 하늘의 일이란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중생(重生) 즉 거듭남이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니고데모는 구원의 출발이며 구원의 시작에 불과한 거듭나는 길에 대해서조차 못 알아듣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구원의 시작이 “땅의 일”인 거듭남이라면 구원의 완성은 “하늘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는 민수기 21장 4절 이하의- 광야 사건을 예로 드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교훈하시는 하늘의 일이란 무엇일까.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永生).

요한복음 3장 15절에 보면,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믿는 자라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예로 소개하신 모세 시대 광야의 놋뱀 사건을 보라.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의 응답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꼭대기에 달라는 것이었다. 그 놋뱀을 쳐다 보는 자는 살리라는 약속이었다.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났다. 늘 예로 들지만 나라마다 의무, 응급 상징이 장대 꼭대기에 매어단 놋뱀의 상징이다. 

 

15절의 ‘믿는다’는 ‘피스튜온’은 일회적인 고백이 아니라 계속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이다. 또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이란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양적 의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의미하는 질적 차원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이란 미래적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지금이란 시간에 누리는 선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영원이란 시간도 지금(只今)이라는 순간의 시간이 이어져서 누리는 복이기 때문이다. 

 

성경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핵심 단어가 ‘영생’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의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는 선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멸망의 반대가 영생이다. 멸망이란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서 회복할 수 없는 심판의 상태다. 그 반대로 영생이란 멸망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에녹처럼 동행하며 살아가는 완전하고 영원한 삶을 뜻한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도 보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6장 54절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이다.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멸명하지 않고 영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대이며 섭리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의 열매가 영생이다. 그 영생의 선물을 받아 누리는 길이 믿음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라고 하였다. 

 

모든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겪는다. 피할 자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 영생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매 순간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며 은총이다.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재난이 끊임이 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간 순간이 영생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구원(救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심판을 받고 오직 유대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다. ‘심판’이란 ‘크리노’란 헬라어는 ‘분리하다, 정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심판하시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분리와 정죄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멸망의 반대로 사용된 구원이란 “멸망의 위기 가운데 빠진 자를 구출해 내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이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시작된 불 순종과 타락이 죄이다. 그 죄의 결과인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새로운 삶이 주어지는 영생의 복이 구원이다. 

 

사람이 범죄하고 나면 스스로 그 죄에 갇히고 만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에 두려움에 갇혀서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죄의 결과가 심판이며 죄의 결과가 멸명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인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왜 찬송하고 왜 기도하고 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와 엎드리길 원하는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매일 6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하면 잠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하여 기도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는 기도하고 서너 시간이 지나면 그 기도의 기운이 잦아들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합당하고 옳은 가르침이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전적 타락의 상태를 벗어 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 받을 자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의지에 의해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렇지 않나. 죽은 자에게 스스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다. 부활의 권능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어둠과 죄와 사망에서 부활의 권능을 선물로 덧입혀 주시는 것이 구원의 은총이다. 인간이 공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선한 행실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다. 

 

성도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계속하여 누리는 길은 진리를 따르는 길이다. 21절에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라고 하였다. 빛의 반대는 어둠이다. 음지를 좋아하는 생명체는 빛이 비치면 곧장 어둠을 찾아서 숨어 들어간다. 19절을 보라. 정죄란 이 세상에 빛이 왔으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여 어둠 속에 숨는 상태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며 이것이 악의 속성이다. 20절에 보니까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하였다. 맞다. 그렇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내 안에 있는 속사람의 악을 보라. 어둠에서 빛의 자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려야 한다.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다. 무덤 속에서는 시체가 썪어 가고 있는데 무덤의 바깥을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도 무덤은 무덤일 뿐이다. 예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마7:19)라고 하였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란 행위의 열매를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란 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요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뉴스의 초점이 되어 있는 유명 가수는 여러 큰 교회마다 불려 다니며 찬양도 하였다. 유튜브에는 그가 부른 찬송가와 찬양 조회 수가 수백만 횟수가 넘는다. 그가 찬양할 때 수 많은 청중들이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였을 것이다. 대중 앞에서 노래 한 곡을 부르면 대기업 직원 연봉 만큼의 수입을 올렸다. 하룻 밤에 중산층 시민이 평생 벌어 모아도 못 모을 만큼에 재화가 쏟아져 들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노래하고 기회가 되면 예배하는 이들 앞에서 그렇게 찬양하던 그 자신에게 구원 받은 자의 감격과 은총과 그에 부응하는 삶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결국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구원 받은 자의 상급이 따라 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그 어떤 선행이나 공로를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인간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의 은혜를 이어갈 수 없다.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였다. 자주 인용하지만 가롯 유다는 예수의 마지막 유월절 예비일 만찬석상에서까지도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가롯 유다는 사탄의 지배를 받았고 예수를 배반하였다. 예수를 팔아 버렸다. 그리고 예수를 떠났다. 스스로 참담하고 불행한 마지막 길을 가고 말았다. 

 

지난 주일이 성령 강림 주일이었다. 성령 강림 주일은 행사로 끝나서는 않된다. 성령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매 순간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삶이다. 484장 찬송가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의 1절 가사처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라는 믿음에서 어느 한 순간도 멀어져선 않된다. 아주 작은 틈만 보여도 사탄이 스며 들어 와서 믿음의 사람을 넘어 트리려고 한다. 과거에는 연탄 개스를 마시고 죽는 사고가 많았다. 새마을 보일러 시스템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방 구들 밑에 연탄을 피웠다. 그러다 보니 방바닥 어느 틈으로든 연탄 개스가 스며 들면 잠다가가 죽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거은 마치도 그와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틈으로 스며 드는 연탄 개스가 사람을 죽게 하듯이 사탄 마귀에게 틈을 주면 악한 영이 찾아 들어 와서 얼씨구나 하고 믿음의 사람을 심판 받을 악의 소굴로 끌고 들아 간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여야 한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성령 오직 말씀 오직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에서 벗어나면 불행해 지는 것이다. 깨달은 믿음, 받은 믿음을 잘 지켜 나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의 운동이 몸을 강건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을 강건학게 하기 위한 은혜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호흡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기도란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임재와 동행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면 안된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기도와 말씀 가운데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 임한 심판.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아무 종교나 가지면 되지 왜 꼭 기독교여야 하느냐고 묻는다. 왜 꼭 하나님, 왜 꼭 예수여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다른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라고 하였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가두었다고 끌어 내서 심문하던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협박할 때에 베드로 사도가 대답한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다. 18절을 보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가 아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범죄 이후로 타락한 인간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란 말이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홍수에 잠겨 죽은 심판도 심판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므로 심판을 받은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과 영생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와 이미 받은 심판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고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 상태의 심판 받은 자들이 공존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하고 양과 염소가 공존하는 것이다. 오늘 묵상한 말씀이 두렵고 떨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복음을 모르고 이미 받은 심판 아래 거하며 구원이 뭔지 모른 채 영생이 뭔지 모른 채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누가 구원할 수 있겠는가. “저 죽어 가는자 다 구워나고 죽음과 죄에서 건져내며 죄인을 위하여 늘 애통하며 예수의 공로로 구원하네 저 죽어 가는자 예수를 믿어 그 은혜 힘입어 다 살겠네” 라는 498장 찬송가 1절처럼 이런 구원 받은 자의 은혜과 구령의 열정이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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