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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14) 20221225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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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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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25 21:25 조회 1,753 댓글 0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2:1-14)           2022. 12. 25 성탄절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라고 기억하나. 가장 좋았던 일은 무슨 일이라고 기억하나. 사실 내게는 기쁘고 좋은 소식이지만 상대방에게는 시기와 부러움만 사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세상에 그 누구에게나 골고루 다 좋고 다 기쁜 소식이란 그리 흔하지 않다. 한 쪽이 기쁘면 다른 한 쪽은 속이 상하기도 하고 한 편이 좋은 일이면 상대편은 아쉬운 일이 대개이다. 

 

그런데 역사 중에 누구에게나 골고루 다 좋고 기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신 소식이다. 예수의 탄생 목적은 예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의 성공이나 자신의 출세나 자신의 영광이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이 땅에 탄생한 분이 아니셨다.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다. 성탄절이며 성탄주일인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을 함께 묵상하려고 한다. 

 

 

다윗의 동네에 나신 구주.

누가복음 2장 4절과 11절에 보면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다. 베들레헴은 3천년 전에 다윗이 태어난 마을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농부였던 이새의 여덟명의 아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가 아는대로 다윗은 룻기의 주인공 부부인 보아스의 증손자이다. 보아스가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았다. 베들레헴은 다윗이 태어난 동네여서 유명하다. 반대로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예수께서 탄생한 곳과 같아서 다윗 자신의 이름 또한 더욱 더 유명하기도 하다. 물론 베들레헴의 지명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곳은 창세기이다. 야곱의 부인 라헬이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베들레헴의 길가에서 난산하고 눈을 감았다. 창세기 35장 19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당시에는 ‘에브랏’이라고도 하고 ‘베들레헴’이라고도 하는 두 가지 지명을 사용하였다. 또한 <룻기>의 배경이 되는 마을이 베들레헴이기도 하다. 

베들레헴에 관한 예언은 구약 미가서 5장 2절에 근거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정도 쯤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지금이야 도시로 발전해서 75,000여명이 산다지만 2천년전의 베들레헴은 주거 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무려 145km나 된다. 그 멀고 먼 길을 요셉은 정혼한 마리아와 동행하였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에 따라 조상의 마을에 찾아가 호적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황제였던 그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aius Octavius, B.C27 - A.D14)이다. ‘아구스도’라는 명칭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인데 그 뜻은 ‘숭고한자, 존귀한 자’라는 의미이다. 정치적인 명령이 아니라면 그렇게 먼 길을 만삭이 된 마리아와 동행해서 베들레헴에까지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지내놓고 보니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인가.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서 이새의 가정을 방문하게 하셨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를 만나 기름 부으라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해서 베들레헴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떼어 놓을 수 없은 역사적인 동네가 된 것이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이다. ‘에브라다’란 ‘풍성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베들레헴의 이전 이름은 ‘에브라다’였다. 그래서 붙여진 미가서 5장 2절의 표현이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베들레헴’의 지명은 구약에서만 40번, 신약에서도 8번이나 나온다. 그처럼 베들레헴은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다윗의 동네로 알려진 성경의 중심 마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 속에 누가 어디서 태어났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러분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성경의 인물들로 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려가 아브람과 나 홀과 사람을 낳았다. 그곳 지명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라는 곳이다. 창세기 11장 28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출애굽의 주인공인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났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사람이다. 저들의 직업은 어부였다. 갈릴릴 호수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호수의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어부로 생업을 이어 가던 집안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예수 만나서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가롯 유다는 그의 출신지 이름을 붙여서 ‘가롯’출신 ‘유다’라고 불리었다. 사도 바울의 출생지는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이다. 토마스 아켐피스란 아켐피스 출신토마스란 뜻이다. 4세기의 성자로 불린 어거스틴 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오늘의 아프리카 북부의 알제리 지역인 히포에서 태어났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시코 이처럼 누가 어디서 태어났느냐를 역사는 주목한다. 영국 웹옷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난 존 웨슬리, 남아공의 원주민 출신 넬슨 만델라, 미국 켄터키 시골의 통나무 집에서 태어난 아브라함 링컨, 미국 노스 캐롤라아나 샬롯 출신의 빌리 그래함 등등 이런 나열을 하려면 끝이 없다. 이처럼 한 사람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을 따라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하나님께 영광으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어찌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탄생하였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원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음을 온전히 감당하는 과정을 거쳐서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러운 길로 이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알릴 때에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 밤에 베들레헴의 산 허리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양떼를 돌보고 지키던 목자들은 천군천사의 전하는 말을 듣고 아기 예수의 탄생한 곳을 찾아 갔다. 천사들은 이 사실을 알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와 요셉과 마리아를 만났다. 천사들로 인한 경험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설명하였다. 마리아는 목자들이 하는 말을 마음에 새기며 각하고 있었다. 목자들은 천사가 나타나서 설명해 준 그대로 듣고 본 예수의 탄생 현장을 방문하고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20)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룩하는 생이었을 뿐만이 아니다.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수 많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선교적이고 헌신적인 삶이 이어져 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행하셨다. 이를 성경은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나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그리고 요한복음 17장 10절에 보니까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받은 영광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실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셨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은 잉태, 출생, 성장, 생애, 고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 승천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과정 과정이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의 연속이었다. 예수의 삶은 모든 순간 순간의 행적과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아기.

누가복음 2장 14절의 천사들의 노래 가사는 세 가지의 대구(對句)로 형성되어 있다. <지극히 높은 곳과 땅, 하나님과 사람, 영광과 평화>가 그것이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였다. 천한 만민을 향한 평화가 아니다. 여기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선하신 은총을 구원의 선물로 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라야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룩하신 죄 사함의 은총과 속죄의 은혜를 덧입은 자들만이 누리는 평화이다. 이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나면 하나님과 우리 각 사람의 사이에 화목과 평강이 화해의 강을 이룬다. 

 

에베소서 2장 14절부터 18절까지 편지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그 절정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가시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평화를 선물해 주셨다. 각색 병자를 고쳐 주셨다. 귀신을 내어 쫓아 새 삶을 살게 해 주셨다.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 살려 주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12살에 죽은 딸을 살려 주셨다.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고 이미 장사 지낸 나사로를 돌무덤 앞에서 불러 내셨다. 

 

벳새다 광야의 저녁나절, 배고파하는 이만 여명의 무리들을 어린아이가 가지고 나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게 하셨다. 오히려 열두 광주리의 부스러기가 남게 하셨다. 풍랑이 거세고 파도가 넘실 거려서 배 안에까지 물이 넘쳐 들어오는 갈릴리의 폭풍우 속에서 바람과 파도를 명하여 잔잔하게 해 주셨다. 가나 혼인집의 떨어진 포도주를 물로 맛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셨다. 앞 보는 이들의 눈이 떠지게 해 주셨다. 열두 해 혈루병 여인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다. 네 사람이 들것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치유와 회복과 풍성한 공급을 통해서 평화를 누리게 해 주셨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라고 찬양하는 증거가 이것이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1870년 독일과 프랑스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성탄절을 맞아 ‘오 거룩한 밤’을 부르며 전투를 멈추었다. 성탄 찬양은 독일군 쪽에서 먼저 불리기 시작했고 프랑스 군대도 함께 부르게 되었다. 온 군병이 성탄의 감격으로 눈물 흘리고 기뻐 뛰며 찬양했다. 전쟁터가 찬양터로 바뀐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휴전이 선포되고 결국 종전하게 되었다. 

 

예수는 전쟁과 싸움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살인과 증오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 안에서 이런 평화를 누리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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