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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나를 따르려거든(막8:31-38)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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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2-25 22:34 조회 17,111 댓글 0
 
                   나를 따르려거든(막8:31-38)            2018. 2. 25     3.1절 99주년 기념주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의 여러 마을로 다니셨다. 하루는 길을 가시던 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 때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같은 본문인 마태복음 16장 16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본문에는 곧 이어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단한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일 후에 예수는 자신이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당할 고난과 죽음과 그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밝히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시자 가장 먼저 반응한 제자는 역시 베드로였다. 32절에, ‘드러내놓고’라는 표현은 ‘명백하고 담대하게’라는 뜻이다. 즉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 장차 자신에게 임할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공동 번역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고 번역해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에 주변 사람에게 이렇게 반응하나. 아무에게나 그럴 수 있나. 아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면서 까지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대단히 흥분되고 격양된 행동을 보이지는 못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께 대하여 그리하였다. 예수를 붙잡고 잡아 흔들면서 항변하였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예수의 가실 길과 겪을 고난에 대하여 막아서려는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항변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다. 성경이니까 젊잖한 표현으로 기록한 것이지 쉽게 말하면 무슨 말씀인가. “너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려면 내 곁에서 꺼져 버려라.”하고 무섭게 책망하신 말씀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꾸짖으셨다. 그 사건 이후에 예수는 곧 이어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심각한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중대한 신앙의 태도에 대하여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대하는 중에 은혜가 되길 바란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첫 태도는 ‘자기 부인’(自己 否認, Self Denial)이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요즘 내 신앙생활이란 것이 나 중심인가 아니면 예수 중심인가.”하고 반문해 보자. 애초부터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좋다더라.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 진다더라. 예수 믿으면 집안이 편안해 진다더라.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더라.”뭐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를 믿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좋다. 예수 믿고 나서 가정이 평안하고 가족 간에 행복하고 가정사가 형통하고.... 뭐 그런 거 다 좋다. 그러나 그런 식의 바람이나 소원을 갖고 종교에 귀의하려하는 이들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많다.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원어의 뜻은 자기 본래의 성품이나 죄된 생각이나 습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육의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릴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뿌리를 끊고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앙이며 칼럼에서 99세를 일기로 엊그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신 빌리 그래함 목사를 붙들었던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의 신앙이기도 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그 무엇도 대신 할 수 없는 신앙.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이다.
 
내 안에 내가 주인으로 살아서 나를 내가 주장하고 내 생각, 내 경험, 내 판단, 내 느낌, 내 목적, 내 취향, 내 요구,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하루하루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고, 사고 싶은 것 다 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지내면서 나를 부인하고 주를 따르며 산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어떻게 나 중심으로 원하는 것을 다 하면서 주를 따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이런 믿음직스럽고 멋진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인데 어떻게 잠시 뒤에 ‘사탄’이라고 책망을 받게 된 것일까. 베드로의 그 어떤 태도와 모습이 그런 지경으로 자신을 몰고 간 것인가. 베드로는 예수께서 장차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버린바 되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 삼일 후에 살아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받아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은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예수는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그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신 아버지의 분부하신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께서 하루하루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에게 하라고 하신 아버지의 분부를 이루어 가는 주님의 삶의 과정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맞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다. 교회 생활 즉 우리의 공동체 생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늘날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해야만 할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자. 40년 전인 1977년에 신학교에 입학하니까 첫 학기 첫 시간에 어느 과목 교수께서 칠판에 크게 백묵으로 독일어 단어 세 자를 써 놓았다. 그리고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그 시간 그 강의의 장면과 내용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Sit's in Leben
삶의 정황
 
이란 세 단어였다. ‘생명의 자리, 삶의 자리, 살아가는 인생의 자리’에서 매 순간마다 어떻게 반응하고 응답하며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은 예수께서 붙잡히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 고통 중에 돌아가시기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그래서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를 부인하고 팔아 버렸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거짓말하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다. 다른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저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 하신 후에도 그랬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고도 저들은 한 자리에 숨어 있었다. 그 현장에 부활 예수께서 찾아 가셨다. 그런데도 그 날 밤에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 일곱 명은 갈릴리에 가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등 저들 제자들이 평소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던 제자들이었다면 그랬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역사의 중심에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일 앞에서 믿음의 사람답게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겁해지고 초라해지고 후대의 역사가들과 후손들에게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말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일제 36년 식민지를 겪어야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제의 만행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신사 참배 강요, 창씨개명, 한국말 사용금지, 일본말 사용 강요, 태평양 전쟁에 쓸 전쟁 물자 강탈 등등 점점 더 탄압이 극심해져만 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일본의 편에 서서 살아  남으려 하고 그런대로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고 자식들도 가르치고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젖어 살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날이 찾아오고 후대에 역사를 재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이 항일파와 친일파가 아닌가.
 
각계각층의 내노라 하던 인물들 중에서 친일파로 구분되어 후대에 그 이름을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워진 이름들이 많다. 왜 그렇게 되었나. 그 시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자기 부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이처럼 오늘 날도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판단하고 부끄럽게 살면 자자손손 그 부끄러움이 점점 더해 가고 말 것이다.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떡이 있으니 떡 먹고 술이 있으니 술을 마시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역사의 흐름 앞에 예수 정신을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을지라도, 극심한 고난이 내 앞을 가로 막을지라도, 내 앞에 죽음의 칼이 놓여 있을지라도 역사 앞에 비겁하게 타협하며 목숨을 연장하려 하지 않고 의로운 고난과 의로운 죽음의 길을 택하는 것‘자기 부인’이 아닌가.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린 후에 자기 부인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만 것이다.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깨닫고 살지 못하고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며 분별력 없이 살았기 때문에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 조차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린 것이다. 아이 성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던 정예화된 3,000명의 특공부대원 중의 한 명이 아간이었다. 그러나 아간은 전쟁 명령을 어기고 자기를 부인하는 전투태세를 지키지 못하였다. 결국의 그의 탐심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아골 골짜기에서 돌 탕에 맞아 죽고 불태워지는 무서운 심판을 받고 만 것이다.
 
우리가 지난 해 마틴 루터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지냈다. 그 당시의 역대 교황들과 교황청의 높은 자리에 있던 추기경들과 신부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러나 역사는 그런 타락한 교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지내던 종교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 시대 현장에서 역사의식을 갖고 불의에 항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원했던 종교 개혁자를 주목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예수”이런 신앙의 중심에 서서 자기를 부인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역사의 불의 앞에 맞섰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마의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던 그 사명의 십자가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내게서 이 쓴 잔을 옮겨 주시옵서.”라고 기도하던 그 십자가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에 새벽에 붙잡히셨다. 그리고 묵묵하게 죽음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온갖 수치와 고난과 아픔을 다 참고 견뎌 내시며 끌려 다니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어떤가. 자신에게 물어 보라. 지금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인가. 나의 탐심인가. 나의 게으름인가. 세상이 너무나 좋게 느껴지는 세상 열락인가.  너무 형통하고 너무 좋고 너무 세상이 신나서 세상으로부터 발을 뺄수가 없는가.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자기 가난, 자기 고난, 자기 연약함, 주기 질병, 자기 부족, 자기 불만족, 자기 열등감 혹은 반대로 나의 풍요, 나의 성공, 나의 교만, 나의 지식, 나의 학벌, 나의 거만, 나의 우월감  등등 도대체 뭐가 나의 십자가인가.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고난, 고통, 거룩한 두려움, 불이익, 제약, 순교의 위협, 죽음의 도전 뭐 이런 것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공동체로 하면 “예수사랑교회”라는 교회 생활의 공동체성이 오늘 날 우리에게 지워 주신 우리들의 십자가일 수 있다.
초급장교로 임관하고 광주 보병학교에 입소하였다. 임관한 이후였지만 소위 계급장을 띠고 유격 훈련장에 들어갔다. 빨간색 모자를 눌러 쓰고 까만 썬글라스를 쓴 날카로운 외모의 교관과 조교들이 초급장교를 햇병아리 다루듯 했다. 혹독한 유격 훈련이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한 나절 내내 목봉 체조라는 것을 한 적도 있다. 전봇대만한 통나무를 7-8명의 분대원들이 어깨 위로 높이 들었다 내렸다하는 반복 동작을 오전 내내 하는 체력의 극한점을 경험하게 하는 혹독한 훈련이었다. 나는 큰 키도 작은 키도 아닌 중간 키였다. 내 앞에 성균관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해 온 동기가 한 조였다. 키가 너무 작아 어떻게 임관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동기는 두 팔을 높이 들어 보아도 목봉에 손바닥이 다치를 않는다. 그러하다 보나 마음에는 원할 지라도 그 동료는 목봉체조에 고통 분담이 되질 않았다.
 
어떤가. 나는 나의 가족의 일원으로 나의 몫의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교회의 지체로서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을 거쳐서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자기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 하는 곳을 향하여 나아갔다. 물론 중간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 예수는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시고 너무나 채찍에 몹시 맞으셔서 거반 죽은 자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예수는 이마와 얼굴과 잔등과 온 몸이 피 범벅이 된 채로 넘어지고 쓰러지고 힘겹게 일어났다가는 다시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골고다를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고 있었다.
 
사순절 신앙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자기 점검의 기회여야 한다.
주님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주님이 더없이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를 본 마카리우스는 주님께로 달려가서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겠노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주님은 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실 따름이었다. 마카리우스는 또 다시 주님께로 달려가 간청했다. "주님, 제발 저에게 십자가를 넘기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그를 모른 체하시며 십자가를 양어깨로 무척 힘들게 걸쳐 매고 묵묵히 걷기만 하셨다. 마카리우스는 가슴이 아프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끈기 있게 주님 곁을 따라붙으며 십자가를 넘겨 달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여전히 십자가를 양어깨에 둘러맨 채 발걸음을 멈추더니 마카리우스에게로 몸을 돌리셨다. 그러고는 마카리우스가 당신을 처음 목격했던 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이것은 내 십자가란다. 네가 조금 전에 내려놓은 네 십자가는 저기 있지 않느냐. 내 십자가를 져 주려고 하기 전에 네 십자가부터 져 나르려무나." 사랑받는 자 마카리우스는 뒤로 돌아 주님이 가리키신 지점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그의 십자가가 모래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그는 얼른 그 십자가를 걸머지고 주님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와 보니 놀랍게도 주님의 어깨에 걸려 있던 십자가가 온데 간 데 없었다. "주님, 주님의 십자가는 어디로 간 겁니까" 마카리우스가 주님께 물었다. 주님은 빙긋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아들아, 네가 사랑으로 네 십자가를 질 때는 내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진배 없단다."
이 이야기는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초 까지의 남아공의 선교사요 영성가요 목회자요 설교가요 탁월한 저술가였던 엔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이란 묵상 중에 나오는 글이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이 있나. 아이스스케이팅 쇼트 트랙 여자 계주 3000미터를 보았나. 넘어져도 일어나고, 앞서거니 뒤 서거나 금방 또 부딪칠 것 만 같은 아슬 아슬한 순간들을 극복하며 서로 선수의 힙을 힘껏 밀어 주며 이어 달리는 순식간의 숨막히는 경기의 장면을 보라. 얼마나 긴긴 시간의 연습과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과 인내와 투지와 기술이 쌓이고 쌓여서 거기 까지 갔겠나. 교회 생활, 기도 생활, 예배 생활, 누군가를 주의 자녀로 전도해서 새 사람으로 세워 가고, 봉사하고,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주를 섬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좋은 결과가 있는 경우가 있나.
 
컬링이란 경기도 보라. “여어어영미이이이이야아아아...........”검은테 안경을 지긋히 콧 잔등에 내려 쓰고 두 눈의 초점을 맞추어서 온갖 집중력을 다 하는 그 모습을 보라. 그래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감상이 아니다. 유희와 소풍이 아니다. 자기 십자기를 지는 것은 매 순간의 영적 전쟁이며 자기와의 싸움이다.

나를 따를 것이니라.
기독교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다. 그냥 명상하다 말고, 좌선하고 마는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주삼라만상과 각 인생의 중심에 찾아 오셔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런 구원 사역의 모범을 보이시고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께서는 늘 고단한 나날을 사셨다. 어떤 때는 너무 배가 고파하시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배 안에서 고물을 베고 잠이 드셨는데 큰 풍랑이 일었다. 배 안에까지 물이 넘쳐 들어오고 배가 가라앉게 생겼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고단하게 깊은 잠을 주무시기도 하셨다. 예수는 밤이 되어도 잠자리도 변변히 준비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물론 언제나 그러셨던 것은 아니었다. 예수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12제자가 함께 동행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한 끼 음식을 먹어도 꼭 13인분이 해결되어야만 했다. 물 한 잔씩을 마시려고 해도 13잔의 물이 필요하였다. 그런 예수와 예수의 12제자들을 섬기고 돌보고 공궤하는 손길도 끊임이 없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그런 내용들을 자세히 기록한 부분이 있다. 누가복음 8장 1-3절이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오늘 날 우리 교회의 지난 8년도 마찬가지였다. 첫해, 둘째 해, 그리고 해마다 달마다 주마다 날마다 주의 사역을 위해서 남다르게 헌신해 온 막달라 마리아. 권력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을 계속해 온 이들이 구석구석에 있어서 오늘 날의 교회로 자리 매김해 온 것이다. 예수 당시에 저들이 자기 소유로 예수를 섬기고 예수 곁의 제자들을 섬겼다. 오늘 날 우리교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주를 섬기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또 섬겨온 헌신이 있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렸던 여인이었다. 그는 예수를 만나 귀신이 떠나가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인생을 살았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는 그 당시 로마의 헤롯 왕 곁에서 출세한 남편의 아내로서 세상적인 지위와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주님께 받은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감사하며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를 돌보고 섬겼다.
 
신앙생활, 교회 생활이 내 기분, 내 감상, 내 비위 맞추기 정도의 수준에서 맴돌다 마는 상태의 반복의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어쩌다 보니까 물댄 동산이 되나. 어쩌다 보니까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이 되나.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주어지는 열매요 결과요 축복이지만 내 몫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에 기적도 일어나고 표적도 일어나는 것이다. 빈 항아리에 아구까지 차도록 물을 퍼다가 붓는 순종이 먼저 있었고 그 물을 다시 퍼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과정에 순종하던 하인들은 알았다. 언제 어떻게 해서 물이 포도주가 되었는지를 하인들은 알았다. 역사의 현장에 순종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이들이라야 체험한 기적을 생생하게 간증할 수 있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렇지 않나. 우리 민족의 해방도 어떻게 하다 보니 그런 날이 왔나. 아니다. 3.1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바쳐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헌신하였는가. 서재필, 유관순, 윤동주, 윤봉길, 안중근, 안창호, 김구, 이준, 신석구 목사, 신홍식 목사, 이상재, 조만식, 이승훈, 전덕기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길선주 목사, 김규식 등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죽음과 희생의 땅에 피어난 무궁화 꽃이 해방의 꽃이며 광복의 꽃이 아닌가. 6.25 전쟁 극복과 유신군사 독재를 뛰어 넘고 민주화와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이룩한 오늘 날 큰 나무처럼 세계 강국으로 발전하게 된 밑거름이 된 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자랑스럽지 않나.
 
후대의 역사가 이완용을 귀한 인물로 치나. 누가 일본 눈치보고 러시아에 기웃거리며 중국에 빌붙어 살아남아 보려고 한 자들을 귀하게 여기나. 수많은 매국노들과 친일파 나부랭이들을 귀하게 여기나. 역사의 현장에서 비겁하게 쭈뼛쭈뼛하며 살고 아첨하며 살다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마는 인생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주의 제자다운 삶을 살 것인가 선택하여야만 한다. 결단하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기도와 말씀과 헌신과 희생의 중심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각 사람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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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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