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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게 노래할 그 날(습3:14-20) 20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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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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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2-15 15:13 조회 225 댓글 0
 

                    기쁘게 노래할 그 날(습3:14-20)          2024. 12. 15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쁘고 즐거게 노래할 날을 꿈 꾸며 살아간다.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외쳐 감격해 하며 노래할 그런 순간을 원하고 원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절대로 거저 주어지지도 않는다. 시편 기자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라고 하였다. 

 

오늘 읽은 본문은 주전 537년 제 1차 포로 귀환을 시작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강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재림주로 다시 오실 것까지를 예언하는 소중한 말씀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나. 본문은 읽기만 하여도 장차 이런 회복의 날, 은혜의 날을 주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인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성탄절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강림절기 동안에 보라색으로 강단을 장식한다. 보라색은 왕권을 상징한다. 왕중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의 존귀한 권위를 상징하며 참회와 금식의 마음을 담고 있다. 우리는 강림 절기를 지내며 네 개의 촛불을 연이어 밝히고는 한다. 예언의 초, 베들레헴의 초, 목자의 초, 천사의 초라고 설명해 오고는 한다. 기다림과 소망, 회개, 사랑과 나눔 그리고 만남과 화해의 의미를 담아서 매 주일 또 하나의 촛불을 더욱 밝혀가는 것으로 성탄의 날을 기다리고는 한다. 

 

그렇다. 기다림은 성탄의 큰 선물 중의 하나이다. 베들레헴 말구유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탄생하기까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33년간의 짧은 생을 뒤로 하고 부활 승천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살아간다.

 

우리는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하고 가정으로도 그러하다. 더군다나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면서 국가적으로 벌어지는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아놀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는 그의 대표작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문명의 발전과 쇠퇴를 분석하며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1934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28년에 걸쳐서 12권으로 출간된 이 저서는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대작이다. 특히,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이론은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전과 응전’ 이는 개인과 국가의 시대 역사를 해석하는 중요한 두 단어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지 않나. 도전과 응전이란 고대 사회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나 가족의 가정사나 다 마찬가지이다. 도전이란 언제나 있고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다양한 변화와 도전 앞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도전은 문명이 직면하는 외부적 또는 내부적 위기를 의미한다. 이 도전은 자연적 환경, 사회적 변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문제, 외부 침략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외부적 도전은 기후 변화, 자연 재해, 외세의 침략 등을 말한다. 내부적 도전은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부패, 문화적 갈등으로 나타난다. 

 

응전은 문명이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과정을 말한다. 문명이 도전에 성공적으로 반응하면 발전과 번영이 이루어지지만 만약에 잘못 반응하고 대처하면 쇠퇴하고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적 응전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나 혁신적 해결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속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비창조적 응전이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거나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때에 찾지 못하면 정체되거나 쇠퇴하고 마는 것이다. 아나로스 시계만을 고집하거나 필름식 카메라를 고집하며 망설이는 가운데 세상이 디지털 시계와 디지털 카메라 시대로 급변한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의 역사로 하면 “이렇게 살만한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가 망한다는게 무슨 말이냐”라며 태평성대를 누리며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던 때에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는 차례로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나. 없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천년만년 가는 권력이란 없다. 역사는 돌고 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온의 딸들이 노래하고 예루살렘의 딸이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날이 찾아왔다”라고 하셨다. “여호와께서 형벌을 제거하여 주시고 원수를 쫓아내 주시는 날, 다시는 원수로 인하여 화를 당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날이 다가 왔다”라고 선포하고 계시다. 어떻게 그런 은혜의 날이 가능해 졌다는 말씀인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가 나의 가운데 계신 날.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함께 계신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실존을 깨달아 알고 체험하며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의 밭에 해와 비를 골고루 내리시는 분이시다. 문제는 그 해를 비추어 주시고 그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실존의 문제가 차이인 것이다. 아침이 되면 당연히 해가 뜨고 때가 되면 당연히 비가 내릴 만큼 내린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르다. 달라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시인하는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 스뱌냐 3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너’는 누구일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실존을 시인하고 믿고 고백하고 경배하며 따르는 자가 바로 ‘너’인 것이다. 사울 왕 말년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다. 그런 가운데 사울은 여호와의 법궤를 불레셋과의 전쟁 일선에 모시고 나갔다. 법궤를 모시고 다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매 순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 천배 만배 중요한 것이다. 

 

교회에 화려한 성탄 장식을 하듯이 내 집에 이런 성탄 장식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가운데 살아가는 나날이 중요하고 그런 순간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천사 가브리엘은 장차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전하였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하셨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우리는 주로 ‘예수, 예수’라고 부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고 섬기는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로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 즉 임마누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96장 찬송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의 가사처럼 그런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 도시며 천한 자를 높여 주시고 잡힌 자를 풀어 놓아 자유하게 해 주시는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신다. 눈 먼 자를 보게 하신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신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 주신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의 생명이 되신다. 

 

예수님은 추한 자를 정결하게 해 주신다. 죽은 자의 생명이 되어 주신다. 죄인들의 중보가 되어 주셔서 죄 사함을 선물해 주신다. 멸망 당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 믿는 자에게 평화를 선물해 주신다. 

 

예수님은 온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  모든 왕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장차 세상을 의와 진실함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의 영광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우리 각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임마누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가 탄생하시는 날.

스바냐 3장에 보면, 9절, 11절, 16절에 “그 때에, 그 날에, 그 날에”라고 언급한다. 물론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오는 그 날 그 때를 말씀하신 것 맞다. 그러나 그 뿐만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날을 말씀하신다. 또한 장차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 가운데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날, 재림의 때를 말씀하시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날과 그 때를 주관하시는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날이 되면 예루살렘의 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시온의 딸들은 더 이상 손을 늘어뜨리지 않게 될 것이다. 손을 늘어뜨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공포와 두려움과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서 양손에 맥이 확 풀리는 상태를 말씀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날, 그 때가 되면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려움으로부터 건지시고 축 늘어 뜨렸던 두 손과 손목과 양팔에 새 힘이 불끈하게 힘 솟도록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렇다.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주님은 택한 백성들 가운데 함께 계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전능자시다. ‘전능자’란 말은 나무를 깎아 만들고 돌을 다듬어 만든 우상이 아니란 말이다. 은과 금을 녹여 부어서 만든 우상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는 전능하신 구원자이시다. 하나님 여호와는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잠잠히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으로 계속되고 지속될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변덕이 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으시다. 잠잠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인하여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 우리는 스바냐 3장 17절에 곡을 붙인 찬양을 안다. 다 같이 한 번 부르자.

 

누가복음1장 4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의 찬가를 대하게 된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만세에 복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셨습니다.

주님은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습니다.

 

라고 찬양하였다. 맞다. 비천한 자의 꿈과 소망은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배고프고 굶주린 경험을 해 본 이들은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 주리고 배고픈 자의 소원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몸이 병들고 마음이 아파 본이들은 병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안다. 병약한 자의 소원은 하루 한 순간만이라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억눌리고 학대받는 자의 소원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안정을 잃어버린 나라의 백성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원한다. 

 

여호수아서 1장 1절은 모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이 여호수아서의 시작이다. 시대의 걸출한 인물, 영웅적인 지도자의 죽음은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던 백성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세가 죽고 나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주셨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라”라는 약속도 해 주셨다. 이는 평생에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이보다 더 귀하고 더 좋은 약속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우리는 ‘연전연승’이란 단어를 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이 있는가. 야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안다. 야구라는 경기가 타율 3할만 되면 엄청난 실력인 거다. 야구란 것이 항상 홈런을 날리는게 아니지 않나. 수 없는 삼진 아웃을 겪으면서 계속해서 타선에 서고 계속해서 볼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나.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여호수아는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때에 애굽에서 태어났다. 모세의 때에 출애굽하는 동족들 사이에 끼어서 광야 생활을 시작했다.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모세의 시종이었다. 40년 동안 모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를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붙들어 쓰셨다. 여호수아는 돈독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여호수아 마지막 장인 24장에 보면 여호수아의 유언이 나온다. “너희가 섬길 신을 오늘 택하라. 오직 나아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이러한 유언을 끝으로 여호수아는 110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민족의 지도자로 택하시면서“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라는 언약도 해 주셨다. 이 얼마나 든든한 약속인가.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100만명의 군대, 1000만명의 군대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하고 분명한 약속이다. 나라가 어수선하다.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고 하나님이 방패가 되시고 하나님이 피할 바위가 되시고 하나님이 요새가 되시기를 기도하자. 

 

천하 만민 가운데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실 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이 근심에 빠져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무거운 짐을 지고 치욕을 당하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원수로 인하여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 다니고 수욕을 당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칭찬과 명성을 얻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흩어진 백성들을 고난과 근심과 두려움의 땅에서 불러 모아서 시온의 기쁨을 누리며 예루살렘의 즐거움을 노래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하실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기를 원하신다. 

 

생각해 보라.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칭찬과 명성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룻기 마지막 장인 4장에 보면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베들레헴의 대 지주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 장면이 나온다. 룻이 임신하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 이 소문을 들은 베들레헴의 마을 여인들이 나오미에게로 몰려 들었다. 그리고 나오미를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그대의 가정에 기업 무를 자가 끊기기 않게 하셨군요 태어난 아기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해 주었다.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은 “이 아기는 그대의 생명의 회복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의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축복하였다. 보아스가 룻에게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들레헴 마을의 여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모아서 ‘오벳’이라고 지어 불렀다. 세월이 흘러 갔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하나님은 슬픔의 여인 나오미에게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룻은 고국인 모압 땅에서 동족이었던 남편 말론을 잃었다. 룻은 슬픔 가운데 따라 나섰던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노총각 보아스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라는 믿음을 갖고 따라 나선 길이 칭찬 받는 길이요 명성을 얻게 하는 길이 되었다. 하나님은 룻이 남편 보아스로 하여금 낳은 아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는 명성을 누리게 해 주셨다. 룻은 다윗의 증조 할머니의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 예수 사랑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원한다. 이곳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교회와 세상의 각계각층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살아 가는 삶의 현장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길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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