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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삽의 기도(시80:1-7)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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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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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2-22 22:22 조회 6 댓글 0
 

                         아삽의 기도(시80:1-7)               2024. 12. 22

 

 

시편 80편은 아삽의 기도이다.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막에서 음악과 찬양을 전담하였다. 다윗의 총애를 받았다. 시편에는 12편의 아삽의 시편이 있다. 시편 50편과 시편 73-83편이 그것이다. 시편 80편은 민족 애가라고 제목 붙이는 여섯편의 시편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아삽과 그의 후손을 찬양의 사람들로 사용하셨다. 아삽은 레위지파 사람이다. 역대상 16장 4-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되돌리게 하셨다. 그 때에 다윗은 아삽을 성막 중심의 찬양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로 임명하였다. 역대상 25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삽과 그의 네 아들들로 하여금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하셨다. 여기서 ‘신령한 노래’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담긴 찬양을 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으로 대하는 시편 80편도 그런 내용들 중의 일부이다.

 

시대적으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주전 722년의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삽과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소망과 회복의 간구를 계속하게 하셨다. 시편 80편에는 3절, 7절, 19절에 반복되는 내용이 있다.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물론 7절과 19절에서는 “주의 얼굴의 광채”라고 하였다. 같은 뜻이다. 우리는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아론의 축복 기도를 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로 인한 은혜와 평강을 축복하고 있다. 그렇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빛이란 회복의 은혜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태양의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이불을 비롯한 온갖 빨래는 빨래줄에 널어서 말리시던 기억이 난다. 요즘 세탁기와 건조기로 건조하는 것이 아무리 뽀송 뽀송하게 건조된다고 해도 쨍쨍 내려 쪼이는 햇볕에 말린 빨래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도심 생활이야 빨래를 햇볕에 말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지만 가끔 아파트 창문에 이불을 내어 거는 곳을 본다. 당장 관리 사무실에서 연락이 갈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아마도 저 아파트에는 시골 추억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가 사시나 보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주의 얼굴의 빛, 주의 얼굴의 광채란 해와 달과 모든 별의 광채를 다 합한 것 보다 더 큰 광채이다. 그 은혜의 빛이 비추어 질 때에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민족의 역사가 달라질 것이다. 개인과 가정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그것을 기도의 사람 아삽은 7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불운한 시대 운명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아삽의 기도를 묵상하는 중에 며칠 앞으로 다가온 성탄의 평화와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양 떼를 인도하시는 목자.

아삽은 하나님을 ‘양 떼를 인도하시는 목자’라고 부르며 기도하고 있다. 맞다. 하나님은 양 떼를 인도하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시다. 예수께서도 요한 복음 15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고 하셨다. 아삽은 하나님을 목자라고 부르면서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다. 그룹 이 무엇인가. 우리가 “날 만나라 날 만나라 그룹 날개 사이에서 날 만나라”라고 찬양하지 않나. 그렇다. 하나님은 법궤를 덥고 있는 시은좌의 두 천사의 날개 사이에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에게 친히 성막 건설을 명하셨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법궤를 마련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고 언제나 계시고 누구에게나 계시지만 특별히 택한 백성 가운데 계신다. 부름 받은 민족, 부르심을 받은 각 사람 가운데 임재 하신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해와 비를 내리시지만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깨닫는 인생들에게 더욱 큰 은혜의 빛으로 임재하신다. 

 

맞다. 하나님은 택한 민족과 택한 백성과 택한 가정과 택한 인생을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제 갈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제 맘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목자이신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각 사람의 인도자이신 목자 예수님, 목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의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이것은 임금이든 평민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수염이 긴 노인을 찾아 다니며 물어 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찬송하지 않나.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라는 569장 찬송이 무엇인가.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항상 인도하시고 

푸른 풀밭 좋은 곳에서 우리 먹여 주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선한 목자 구세주여 항상 인도하소서”

 

라고 말이다. 

 

세상이 험하다. 세상이 위태롭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권력도, 재물도, 건강도, 젊음도, 인기도, 명예도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이란 없다. 오직 주의 말씀 만이 영원한 것이다. 

 

저 지난 주에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 위치한 ‘필그림 하우스’에서 며칠을 지냈다. 그곳에 ‘천로역정’을 조형물로 처처에 장식한 묵상의 길이 마련되었다. 천천히 묵상하며 걸으면 한시간 반 쯤 걸을만한 곳이다. 이틀 연속 아침마다 묵상하며 그 곳을 산책하였다. 우리는 잔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책, <천로역정>을 인다. 잔 번연은 영국 교회의 청교도 신앙을 가진 목사이다. 그의 청교도 신앙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의 국교회는 그를 감옥 안에 12년 동안이나 가두어 두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인 책을 썼다. 역사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책이 천로역정이다. 영국 런던에 가면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웨슬리 채플 맞은편에 있는 공동 묘지에 잔 번연의 묘가 있다. 

 

잔 번연은 마치도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천로역정>과 같은 역사적인 기독교 명작을 남겼다. 이사야 19장 18절에 보면 ‘멸망의 성읍’이란 표현이 있다. 이전에 오래도록 보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장망성’(將亡城, the City of Destruction)이라고 하였다. 장망성이란 ‘장차 망할 도성’이란 뜻이다. 그렇다. 우리 인생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도 천면 만년 살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대로 얼마나 많은 미혹과 얼마나 끊임이 없는 유혹 가운데서 세상을 살아가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가운데 사로 잡혀서 살아간다. 이는 최고 권력자나 평민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어리석다. 왕이라도 어리석은 자의 말에 현혹이 되어 그 권력이 무너지고 만다. 세상을 흔드는 부자라도 어리석음에 빠지면 참으로 별 것이 아니다. 별을 단 장군이라도 무너질 때 보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사관학교에서 배우고, 초급 장교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군인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다 시대의 영웅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엊그제,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요한 계시록 19장을 묵상했다. 그것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왕이든 장군이든 말 탄 자이든 자유인과 종과 작은 자와 큰 자를 막론하고 임한다고 경고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의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말하였다. “왕들과 장군들과 장사들과 말과 말탄 자들과 자유인과 종들과 작은 자와 큰 자를 막론하고 도는 자의 살을 먹으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있다는 말씀이다. 

 

며칠 후면 성탄절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양 떼를 인도하는 선한 목자로 보내신 것을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노아의 때에 홍수로 이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다.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만이 방주 안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았다.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였다. 천사를 통해서 들은 말을 롯은 장차 사위가 될 두 예비 사위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롯의 두 사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롯의 두 사위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과 함께 죽고 말았다.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긴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디고 말았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스와 로마 방문 길에 폼페이에도 잠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에 위치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곳이다. 주후 79년의 일이다. 화산재에 파 묻혀서 2,000년을 지내온 곳이 발굴되었다. 그 당시의 처참한 죽음의 현장이 발굴되기 사작하였다. AD 1748년 이후에 발굴이 본격화 되었다. 그 곳은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 당시에 부호들의 휴양지였다. 공중 목욕탕의 벽화가 찬란하다. 그 당시의 풍요롭고 화려했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발굴 중의 빈 공간에 석회액을 부었더니 그 당시에 화산 폭발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녹고 타버린 체형 그대로 복원되었다. 신비한 역사의 발굴 현장이 보존되어 있다. 지금 발굴된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끝이 있다.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다. 무드셀라는 969년을 살았다.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다. 이삭은 180년을, 야곱은 147년을 살았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아무리 장수한들 새해가 되면 105세가 되는 김형석 박사처럼 살수는 없다. 설령 100년을 넘어 산다고 한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른다면 이 세상에서 천년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인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삶의 목자 삼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능력의 빛으로 구원하시는 주님.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그 능력이 크시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힘이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이 능력을 발하시면 애굽의 바로 왕이라도 두 손을 들어야 했다.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으로 바로에게 경고하셨다. 나중에는 애굽의 집집마다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430년의 노예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신 것은 본문 2절에서 말씀하는 ‘주의 능력’을 나타 내신 기적이었다. 주의 능력이 나타나면 홍해가 육지가 되었다. 반석에서 생수나 넘쳐 났다. 날마다 만나가 가득하였다. 옷도 신발도 헤어지지 않았다. 원하는 때에 메추라기로 배불르게 하셨다. 요단강도 홍해처럼 건너게 하셨다. 여리고 성도 싸우지 않고 무너지게 하셨다.

 

능력의 주님이 그 능력을 나타내셔서 소년 다윗을 통하여 블레셋의 골리앗 장수를 물맷돌 한 개로 물리치는 기적을 보게 하셨다. 능력의 주님은 믿음의 사람 엘리야로 하여금 갈멜 산 꼭대기에서 바알 숭배자와 앗세라 숭배자들이 보는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목격하게 하셨다. 

 

한해가 기울어 가고 있다. 어른이든 젊은이이든 이제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반 백년 쯤을 살고 나서 뒤 돌아 보면 50년 쯤의 시간도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것이 시간과 세월이다. 그러므로 이 헛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말이 무엇일까.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요셉의 두 아들이다. 저들은 야곱이 머리에 손을 어긋 맞추어 얹는 축복 기도를 받았던 형제이다. 세월이 흐르며 보니 야곱의 축복 기도 그대로 동생 에브라임의 후손이 형 므낫세의 후손들보다 더 강성하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근간을 이루는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였다. 거기 언급된 베냐민 지파란 남북 왕조 때에 남 왕국 유다에 속하였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베델과 길갈과 여리고를 중심으로 북 왕국 이스라엘과 접경하고 있었다. 그리하다 보니 마치고 베냐민 지파의 땅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 흡사하였다. 하나님은 아삽의 기도를 통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아삽은“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라는 말씀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주의 능력이 나타기를’간구한 것이다. 왜 그럴까. 지금 능력의 주님이 그 크신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시면 도저히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운명의 날이 찾아 온 것이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이렇게 해서 앗수르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었던 땅에 되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해 주신 선물이요 열매였다. 그렇다. 주의 능력의 빛이 임해야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회복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다. 지난 가을 내내 언론에 자주 언급된 미국 엠디 엔더슨 병원의 종신 교수인 김의신 박사 장로의 지론이 그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의사이고 아무리 용하다는 의사라도 의사가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의 몸의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하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5:15)

질병의 문제인가. 재물의 문제인가. 평안의 문제인가. 행복의 문제인가. 기쁨의 문제인가. 즐거움의 문제인가. 감사의 문제인가. 왜 우리는 감사하며 살지 못하나. 왜 우리는 기쁘게 살지 못하나. 왜 우리는 기도하며 살지 못하나, 시간이 없나. 바쁜가. 시간이 없고 바빠고 먹고 살고 화장실 드나들고 잠도 자고 하지 않나. 물론 바쁘다. 바쁘게 직장 생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눈물 겹다. 과로로 지쳐 간다. 젊은이라고 피곤하다. 장정이라도 쩔쩔 맨다.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사40:30)라고 하였다. 맞다. 세상살이가 그렇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 피곤해하고 곤비해 한다. 쩔쩔 매며 살아간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란 그런 삶이 아니다. <하나님도 쉬셨습니다> 라는 책이 있다.

하나님은 인생이 피곤하고 곤비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쉼과 안식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 날마다 순간마다 새 힘을 얻기를 원하신다. 

 

새 중에 가장 멀리 날아가는 새가 있다. 양 날개를 펴면 양 날개의 길이가 3.5m나 된다. 알바트로스( Albatros)라는 새이다. 중국 사람들은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른다. 서강대학교의 교조(校鳥)이다. 날개짓하는 힘으로 날려 하지 않고 상승 기류를 타고 날아간다. 빠를 때는 시속 160km를 날 수 있다. 몸통의 길이만도 1m에 이른다. 맞다. 우리 인생이 알바트로스처럼 상승 기류를 타야 멀리 멀리 날아 갈 수 있다. 내 날개의 힘만 의지하면 지쳐서 주저 않고 만다. 추락하고 만다. 다른 새들은 수명이 짧다. 그런데 알바트로스는 90년을 사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나. 왜 주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하나. 왜 성령의 임재를 구해야 하나. 왜 주의 얼굴 빛을 구해야 하나. 왜 주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나. 누구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 누가 우리에게 안식과 평화를 줄 수 있나. 누가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나. 누가 나에게 새 힘을 주고 누가 나에게 지치지 않는 권능을 줄 수 있나. 누가 나를 독수리처럼 새 힘을 얻게 할 수 있나. 남은 한해, 맞이할 새해, 앞으로의 나날이 점점 더 주의 능력의 빛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걸음, 걸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를 회복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와 6. 25의 전쟁 폐허를 딛고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입은 민족이다. 세계 근대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민족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골고루 죽을 써도 불사조처럼 일어선 민족이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이렇게 국가를 지어 부르는 나라는 지구상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돌아 보라. 생각해 보라. 기억해 보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잘 사는 나라에서 살 수 있겠는가. 물론 문제투성이이다. 물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 없는 나라, 문제 없는 역사, 문제 없는 문명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아삽의 기도처럼 주께로 돌아가야 한다. 주께 기도해야 한다. 7절의 기도처럼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여야 한다. 누가 나를 회복할 수 있나. 나의 건강, 나의 경제 생활, 나의 환경, 나의 여건, 나의 처지, 내 주변의 이 모든 환경과 여건으로부터 누가 나를 회복시켜 줄 수 있나. 부모인가. 배우자인가. 아들딸인가. 친구인가. 직장 동료인가. 사업체의 상대방인가. 아니다. 없다. 이 세상에 내가 마음을 쏟아 의지할 대상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 나를 나되게 하는 힘은 주께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지혜, 명철, 분별력, 의지력, 기억력, 판단력, 추진력, 화해하며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관계의 힘, 대화의 능력, 성취하는 그 모든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주님의 도우심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은혜가 임할 때에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탄절이 다가온다고 저절로 기쁜가. 저절로 행복한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성탄의 주인공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의 은혜가 내게 임해야 한다. 가정에 임해야 한다. 시대 역사에 한 민족, 한 국가의 중심에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앗수르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바벨론의 침공을 막을 길이 없다. 내 안에 수 없이 일어나는 나의 적이 있다. 절망의 적, 낙심의 적, 의심의 적, 증오의 적, 불신의 적, 시기의 적, 우울의 적, 분노의 적 –암 덩어리가 자라나듯 내 안에서 나를 무너트리려 하는 이 모든 어둠의 세력을 만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주의 능력으로 물리쳐야 한다. 주님이 나를 회복시켜 주셔야 한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셔야 한다. 주님이 나를 일으켜 세워 주셔야 한다. 

 

토트넘 소속의 손흥민이 0. 00%의 코너 킥으로 득점했다고 한다. 세상은 그런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오래도록 쌓아온 실력이 배어 있다. 성도는 하나님이 도우시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이다.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신 일이 그런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려 하시면 못하실 일이란 없다. 원하시면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12해 혈루병 여인이라도 주님은 고치신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라고 그의 무덤에서 불러 내신다.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죽은 자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 자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성탄이 즐거운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대답이시기 때문이다. 올해도 우우한 일이 가듣한 세상에서 매 순간 주님이 주시는 그 얼굴 빛의 광채가 우리 각 사람의 삶을 회복히켜 주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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