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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성령을 받은 사람들(행10:44-48)          201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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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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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1-28 14:32 조회 17,024 댓글 0
 
                 성령을 받은 사람들(행10:44-48)          2018. 1. 28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강림에 대한 내용을 대하게 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여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이다.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에 그러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하였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고 그 불의 혀 같은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그들 120여 성도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해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까지 성령이 번져가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10장을 네 번째 나누어 묵상하는 본문에 보면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모두 다 이방 사람들이었다. 그런 저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수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성령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영이 아니시다.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열방의 민족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임하시는 영이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모르고 부인하고 배척하던 무리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났다.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성령이 임하고 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 받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 각 사람을 해방해 주시기 때문이다.

자연인의 상태와
성령을 받은 성도의 모습은 모든 것이 다르다.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 사람을 죽을 몸에서 살리신다.

성령은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성령은 보혜사 즉 도우시는 영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성령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신다.
성령은 평안을 주시는 영이시다.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들은 세상 근심과 세상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 370장 2절)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이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모인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임하였다. 이는 성령이 유대인들만의 성령이 아니라 천하 만민을 향하여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욥바에서 베드로 사도를 따라서 동행하였던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 현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11장 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다. 왜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은 것을 비난하고 시비 걸었다.

그러나 이미 이방 지역인 가이사랴와 로마 사람들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인 할례자들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욥바의 신비 체험과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갔던 경험을 간증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항변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할례파 신자들은 더 이상 베드로를 비난하지 못하고 잠잠하여 졌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11:18)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신 일을 시인하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고넬료의 집에 모여 다 같이 성령 받은 고넬료의 친척들과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더 나누도록 하자.


방언을 말함.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다양한 현상과 은사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고넬료의 가정에  모여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던 친척과 친구들은 한 결 같이 방언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의 현장처럼 고넬료의 곁에서 함께 성령을 받은 무리들도 한 결 같이 모두 다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가 방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과만 나누는 생생하고 비밀스러운 대화이다. 방언에 대하여 무지한 이들은 교회 생활을 아무리 오래 하였어도 방언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고 나면 진리이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가 원수가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낼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국가 기밀을 관장하게 된다. 이처럼 대통령이나 왕은 자기 국가의 크고 작은 사정을 많이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와 방언을 말함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세계를 모두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게 되면 성령 안에서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서 기도하게 된다.

전쟁 중에는 아군만의 암호와 통신 주파수를 사용한다. 이것을 적에게 해킹 당하면 않된다. 사탄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침범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방언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주파수에 접속된 영적 기도생활을 하게 된다. 바울은 이와 같은 기도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6:18)

이 세상의 악한 영인 사단을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원하다.”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10:19)고 말씀해 주셨다.

방언을 말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분명한 영적 증거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방언으로 기도하며 지낼 만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길 축원한다.


하나님을 높임.
성령 받고 나니 고넬료의 모든 친구와 친척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한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받은 무리들이 새 술에 취한 것처럼 기쁨을 갖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높인 것처럼 고넬료의 친척과 친구들도 모두가 다 성령 충만을 받고 찬송하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성령 받으면 찬송이 달라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진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신 하나님의 우리의 눈에 보이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들은 영의 눈을 활짝 열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 받은 성도의 삶이란 한 순간 하나님을 높이고 마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점점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성령 받은 증거 중의 하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부인의 남편은 큰 사업가였다. 부인은 결혼 전부터 예수를 믿는 신실한 자매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내는 늘 남편도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고는 하였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생겼다. 어느 토요일 저녁에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내일부터 나도 교회에 다니겠소. 나도 예배에 함께 가겠소.” 아내는 밤새도록 설레는 마음으로 잠을 설쳤다. 다음 날인 주일 날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뭘까. 오늘 성경 본문은 뭘까. 오늘 목사님의 설교 내용은 뭘까. 오늘 성가대는 어떤 찬송을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교회에 도착하였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나란히 곁에 앉아 예배드리는데 그날 설교 본문은 창세기 5장이었다. 창세기 5장은 아담에게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 내용이다. 몇 주 동안 주일마다 남편은 매 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물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실하게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느냐”고. 그런데 남편은“처음 교회에 갔던 주일 날 창세기 5장의 말씀에 보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죽더구만. 아담도 죽었고 아담의 아들 셋도 죽었고 에녹도 죽었고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도 오래 살긴 했지만 그도 죽었고 무드셀라의 아들 라멕도 죽었더만. 인생이 어짜피 그들처럼 그렇게 다 죽고 말텐데 이왕이면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하고 대답하더란다.

성령 받고 나면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깨달아진다. 그러므로 성령 받고 나면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성령 받기 전의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취하고 놀고 즐기고 세상의 온갖 낙을 쫓아 성공하고 출세하고 떵떵 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생의 목적처럼 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령 받고 은혜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인생관이 달라진다. 그 어느 나라이든지 권력자의 끝을 보라. 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인생들의 나중을 보라. 하나님을 모른다면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지식인가, 학력인가. 외모인가. 가문인가. 지위인가. 재물과 소유의 분량인가. 그 어떤 명예, 그 어떤 권력인가.

최근 워싱턴 포스트 신문 뉴스(2018. 1. 25)가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부부는 뉴욕 맨해튼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반 고호의 ‘눈이 있는 풍경’작품을 임대하여 자신들의 백악관 침실에 설치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이 미술관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는 고흐 작품은 스페인 전시를 앞두고 있어 임대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 대신에 이탈리아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아메리카'를 장기 임대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작품은 18캐럿 금으로 도금한 좌변기이다. 대통령의 지나친 부(富)에 대한 조롱을 담은 풍자성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화장실에 설치돼 있어서 관람객이 실제 사용하기도 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반(反) 도널드 트럼프 성향이 강한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는 "이 작품은 99%를 위한 1% 예술이다. 200달러짜리 점심을 먹었든지 혹은 2달러짜리 핫도그를 먹었든지 당신이 무엇을 먹었든지 간에 결과는 똑같다. 변기로 간다."고 설명을 덧 붙였다.

인생이 성령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구겐하임 미술관의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의 말처럼 모든 인생의 끝은 한 줌의 배설물처럼 끝나고 말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런 그는 그와 화려했던 과거를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하고 높이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매진하는 삶을 달려갔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8)고 고백하였다.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 받고 수많은 기회에 간증과 집회에 초청을 받는 이어령 교수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 평생 수염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의 한 어린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주무실 때에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시나요. 아니면 이불 밖으로 내어 놓고 주무시나요.”질문을 받고 보니 자기 자신도 궁금하였다. 그래서는 그 날 밤에 밤새도록 잠을 설쳐 가면서 잠을 청하는 자신을 관찰해 보았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니 수염을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해지고 그 수염을 이불 밖으로 꺼내 놓으면 허전해져서 영 잠이 오질 않았다. 지난 30년 이상을 한 번도 깎지 않은 이 긴 수염인데 잠을 자는 동안에 이 수염의 위치를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자신에게 한번 쯤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나는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밖에 있는지. 성령 안에 있는지 성령 밖에 있는지. 진리 안에 있는지 진리 밖에 있는지. 자신에게 묻고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10장 46절의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일시적인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는 일회적 체험으로 끝날 일도 아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체험되고 고백되고 결단되는 분명한 삶의 변화이며 태도의 변화이며 인생관의 변화이다.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대답을 얻는 시간이 하나님을 높이는 시간이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송 한 두 곡을 감격스럽게 불렀다고 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인생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의 삶을 지속적으로 평생토록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또 인용하지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 신앙으로 세움 받지 아니하면 아직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변화의 고백 속에서 평생을 매 순간마다 살아갈 수 있어야 성령 받은 성도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일 수 있다. 


사도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함.
성령 받고 방언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하며 기쁨에 가득해진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그 날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세례도 받았다. 저들 모두는 성령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물세례도 받게 되었다. 그런 저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은혜 받은 증거가 아닌가. 은혜가 임하고 나면 성경 읽지 말라고 해도 읽고 묵상하고 구구절절이 사모하게 된다. 은혜가 임하고 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하게 된다. 방언을 사모하지 말라고 해도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원하게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던 그 자리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두 다 도망가고 없었다. 예수는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갈릴리에서 올라온 여인들만이 그 두렵고 슬픈 골고다 언덕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안식일이 시작된다. 그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관원인 니고데모가 앞장서서 예수의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묘실에 장례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니고데모가 누구인가.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던 그 인물이 아닌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이런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쓸쓸하게 예수 곁을 떠났던 그 사람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예수의 장례를 정성스레 모신 주인공이 되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참으로 많다.  베드로처럼 큰 소리치고 장담해 놓고는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고 숨어 버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불분명하고 흐릿해 보였으나 니고데모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장에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감동적인 자리에서 쓰임 받는 그런 성도들이 따로 있다.

올 들어서 고넬료에 관한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은 네 주째 계속하고 있다. 성령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억하실 만한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란 칭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천사의 임재와 깊은 기도의 세계도 체험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 중에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의 말씀도 들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바라기는 올 한해 그리고 앞으로 평생토록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기억되는 그런 신앙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주의 종들을 귀하게 여기고 주의 말씀 듣기를 몇 날 며칠이라도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말씀의 사람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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