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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고넬료와 베드로(행10:34-43) 2018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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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8-01-27 20:10 조회 17,660 댓글 0
 
                고넬료와 베드로(행10:34-43)               2018. 1. 21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좋은 영향이 나의 삶에 미치게 마련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사업의 동료를 만나고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고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성경의 인물들로 하면 모세와 여호수아의 만남, 엘리야와 엘리사의 만남처럼 말이다. 예수의 12제자들을 보라. 베드로나  안드레 형제, 요한과 야고보 형제들과 같은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 만나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나는 사도의 반열에 세움 받고 쓰임 받지 않았나. 사도 바울이 다메섹 성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만나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이방 선교의 중심에 세움 받는 사도가 되지 않았나. 사도 바울의 13편의 편지가 성경에 기록될 정도이니 그만한 복을 받은 인물이 신약 시대에 그 어느 누가 또 있나.
 
로마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욥바에 선교 방문 중이던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면서 삶이 한 차원 달라졌다. 예전에 경험한 적이 없던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 오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던 저들 가족과 친척들과 친구들이 함께 모여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던 중에 성령을 받았다. 방언도 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게 되었다. 성령을 먼저 받고 나중에 물로 세례 받는 새로운 영적 경험을 모두가 다 같이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말씀하신 예언이 점점 성취되어 가는 장면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스라엘 밖의 주변 도시와 주변 나라들에 이르기 까지 점점 부활의 복음이 전파되고 성령이 역사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욥바의 베드로는 자기를 찾아 온 고넬료의 부하들을 집안에 들였다. 하루를 묵게 한 후에 다음 날 욥바를 출발해서 가이사랴 까지 갔다. 드디어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모여 겸손히 기다림.
우리가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기다릴 때에는 잠깐 만 늦어도 시간이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다. 요즘도 그러한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도착하기 전 까지는 전혀 연락할 수단이 없던 시절이니 말이다. 도착해야 도착하는 것이고 도착할 날짜에 도착이 안 되면 별의 별 상상을 다하게 되는 것이 그 당시의 형편이었을 것이다.
하인들과 경건한 부하를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심부름 보내 놓은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모아 놓고 베드로 사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누구를 간절히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그 기다림이란 것이 주는 느낌이 어떠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인 곳에 마침 베드로가 도착하였다. 고넬료는 기쁜 마음으로 베드로 사도를 맞아 들였다.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맞아 들였다. 그 때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나도 사람이라.”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렇지 않나. 당시의 로마 백부장이면 군대의 낮지 않은 지위를 가진 고급 장교이다. 그런 저가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베드로 사도를 정중하게 맞아 드렸다. 태도는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태도나 인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히려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백부장 고넬료는 진심으로 사도 베드로를 존중하고 환영하는 뜻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맞아 드린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요.”라고 대답하므로 인간미가 훈훈하게 풍기는 장면을 보였다. 생각해 보라. “그럼 나는 주님의 사도이고 당신은 일개 로마 군대의 장교일 뿐이지.”, “절할 마음이 있으면 더 정중하게 땅에 엎드려 절하게...” 뭐 베드로 사도가 이런 자세로 백부장 고넬료의 엎드려 절하는 절을 받았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었겠나.
 
백부장 고넬료는 예절이 정중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베드로도 주변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할 줄 아는 겸양한 모습이 일상의 예절에 배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서로에게 보인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벤살렘 교회를 섬길 때에 과거에 대한민국해병대 부 사령관을 지낸 예비역 소장  김기홍 장군을 교회의 간증 예배에 모신 적이 있다. 그는 그 당시 해군 교회 소식의 장로였다. 그는 화기 소대장 시절 월남전의 짜빈동 전투 승리 신화의 주인공이다. 1967년 2월 14일부터 그 다음 날까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 대한민국 해병대와 월맹군의 격전이 벌어졌다. 월맹군의 수는 2,400명 이상이었다. 우리나라의 해병대는 장교 10명 사병 284명 다 해서 294명이었다. 그런데 십대 일의 전쟁에서 우리 군대가 크게 이겼다. 이 전쟁 기록은 위키백과 사전에도 나온다. 우리 군대는 15명이 전사하고 3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월맹군은 234명이 전사하였다. 불가능할 것 같던 전쟁은 우리 해병대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월남전의 전사에 기록된 ‘짜빈동 전투’이다. 이 전쟁으로 그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김기홍은 일 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경상도 시골 두메산골 마을에서 자라난 그는 1960년에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경사였다. 군대에는 그의 고등학교 선배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두메산골 시골 고등학교의 영광이었다. 그런 그가 장군이 되고 해병대 부사령관 까지 지냈다. 그 모든 간증의 바탕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었다. 얼마나 겸손하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구수한 경상도 매너를 지녔던지 2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분을 생각하면 “그는 장군 출신이지만 참으로 겸손한 분이셨다.”는 기억이 새롭다. 그의 간증은 나라 안팎에 수 백 번의 초청을 받고 또 받았다. 이제는 연세가 꽤 많을 것이다.
김기홍 장로는 간증집회 중간에 찬양을 불러 은혜를 더 한다. 김 장로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 태어나 절망, 좌절, 배고픔으로 생활하다 13살 때 예수를 믿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간증했다.  "지독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장군 장로가 된 이야기, 월남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전쟁을 치룬 이야기, 군대 내에서의 확고한 믿음생활, 상관의 압력에도 해병교회를 건축한 이야기, 예수의 증인이 되어 간증하는 삶이 된 이야기"등을 들은 기억이 요즘도 생생하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4:6)고 하였다. 이는 잠언 3장 34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 주변의 그 누가 교만하게 행동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나. 그러나 겸손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면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나. 예수는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으로 소개하였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생활 하는 중에도 매사에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모습을 배우고 실천하는 성숙한 성도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매주 좋은 읽을거리와 은혜로운 볼거리를 카톡으로 보내 주는 남자 권사가 있다. 그는 지난 주중에는 이런 글을 보내 주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을 내려지길 기다린다. 또 새날이 시작되면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잔등에 실리길 기다린다.
 
주인은 낙타의 건강상태와 기운과 체력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준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나. 나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내 형편에 적합한 인생길의 짐을 실어 주신다.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형편을 잘 아신다. 그리고 내가 감당할 만한 짐을 지고 가게 해 주신다. 넘어지고 쓰러지면 손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신다. 한 낮의 뙤약볕 아래서는 쉴만한 물가와 그늘을 찾아 안식하게 해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신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나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삶을 시시 때때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새에게는 날개가 무거운 짐일 수 있으나 새는 그 날개로 인해서 원하는 창공을 훨훨 날아서 원하는 곳으로 날아다닐 수 있고 날아 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고통이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주의 모든 말씀을 듣기 원하는 이들.
유대인인 사도 베드로가 이방 사람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유대의 율법으로 하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용감하게 먼 길을 찾아 가서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것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행동이 가능하였던 것은 욥바에서 정오기도 시간에 기도하던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차근차근 자신의 경험을 그들에게 이야기 하였다. 세 번이나 똑 같은 환상이 반복되었다. 그러한 체험 이후에 베드로는 결심하였다. 베드로는“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천사를 통한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 땅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피부색이나 언어나 인종이나 문화나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 어떤 종교에 사로 잡혀 있었든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다 평등하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은 고넬료는 정중하게 베드로를 환영하는 인사말을 하였다. 며칠 전에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체험한 내용과 천사의 가르침에 대한 간증도 하였다. 고넬료는 인사말의 끝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였어도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늘 그냥 그런 상태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서 내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레마’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시작할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예배의 매 시간 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길 축원한다.
예배 시간의 말씀 선포를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넬료의 고백을 보라. 사도행전 10장 33절에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앞에” 라는 이 태도가 얼마나 소중한가.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그 멀리 욥바에서 자신들의 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정중한 예절로 맞아들이고 베드로를 통하여 선포될 주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0장 34절부터 43절까지의 말씀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베드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셨고 물로 세례를 베풀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
예수는 온 갈릴리와 유대의 마을을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
예수는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그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예수께서 유대 땅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들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나무 십자가에 못 박고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흘 만에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
그러나 부활 하신 예수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오직 택하신 증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나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부활 하신 주님을 모시고 조반을 먹은 적도 있다.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에게 명하셔서 백성들에게 전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셨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증언한 이들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누구나 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이다. 어떤가.
우리가 이런 설교 말씀을 대할 때에 성령이 임재하실 만한가.

우리 다 같이 542장 찬송, “구주 예수 의지함이”를 부르자.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영생 허락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주를 믿는 나의 맘을 그의 피에 적시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버리네
안위받고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영원무궁 지나도록 주여 함께 하소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믿음 더욱 주소서
 

성령의 강림.
이와 같은 베드로 사도의 설교 말씀을 경청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임하시는 주의 영이시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보면,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오셨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문을 열고 들으면 누구나 다 성령 받고 방언하고 하나님을 높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면 성령이 임하고 인생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우선순위가 달리지게 된다.
 
지난 월 화 수, 삼일 간 50여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시간을 가졌다. 어떤 목사는 자신은 20대 때부터 밤무대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며 세상의 한 가운데서 살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졌다. 성령을 받았다. 막내 동생 같은 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지금은 부부 목사로 아내와 함께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며 산다고 했다. 그는 그의 과거 경력처럼 구수한 입담을 갖고 있었다. “저 쪽 동네에서 이 쪽 동네로 전향했지만 아직도 어색하고 부족한 것이 많다”고 고백하며 겸손하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인생이 달라진다. 늘 교회에는 다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큰 은혜를 받을까봐 마음 문을 꼭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살아 역사는 말씀이 내 심령에 들어 와서 은혜를 끼칠 수가 없다. 길가와 가시밭과 돌짝밭의 마음 상태로는 성령이 임하기 어렵다. 좋은 땅이 되어야 100배로 결실하게 되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임해야 성령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나이다. 분리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나면 그보다 더 기쁘고, 그보다 더 신나고, 그 보다 더 흥분되고, 그 보다 더 좋은 경우란 없다.
 
성령이 임하고 나면 생각이 바뀌고, 취미가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관심사가 바뀌고, 말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뀐다. 성령 받고 나면 옛 사람이 사라지고 새 사람이 된다. 우리가 새 옷 사면 옛날 땀내 나는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나. 이처럼 성령이 임하고 나면 이전의 내 모습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올 1월 새해맞이 축복기도 성회로 첫 주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모였다. 그 시간에 선교 간증한 몽골의 김석환 선교사의 이야기 중에 “참새는 자기 날개 힘으로 날아 보려 하기 때문에 멀리 날지 못하지만 독수리는 날개의 힘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기류를 타고 날아가기 때문에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높게도 날 수 있고 멀리도 날수 있다”는 설명이 은혜가 되었다. 그렇다.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그런 상태이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성령이 내려 오셨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그 시간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에서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 위에 내려와 임하였다. 하늘 위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성령 받고 나니 이렇게 좋고, 이렇게 변하고 이렇게 기쁘다고 고백한 찬송 가사가 있다. 감리교 목사요 신학자요 교육가였던 이호운(1911-1969) 목사의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다. 436장 찬송이다. 그가 작사한 또 다른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 찬송을 부르며 뒤 따라 가리라
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 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
영생을 누리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노인 청년 구분 없이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성령 받아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살아가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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