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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주 안에서 나누는 감사(합3:17-19, 빌4:10-20) 201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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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1-26 21:20 조회 15,434 댓글 0
 
주 안에서 나누는 감사(합3:17-19, 빌4:10-20)     2017. 11. 26 추수감사주일 교회설립 제 8주년

힘들게 임신한 젊은 부인의 태아에게 이상이 발견되었다. 아기의 뇌가 두개골 밖으로 나와 있는 이상을 알게 되었다. 태어나더라도 15분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다. 부부는 눈물과 기도 속에서 아기를 낳기로 결정했다. 뱃속의 아기에게 '루카스'라고 이름을 미리 지어 준 부부는 매일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대화를 나누고, 아기를 위해 기도했다. 어느덧 출산의 날이 되었고,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뇌가 빠져 나와 있었지만 부부에게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부부는 루카스가 조금 더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하여 사랑스럽게 안아 주었다. 아기는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평온하게 잠든 것처럼 보였다. 주어진 15분이 지나고, 서너 시간이 더 지나자 의사는 집으로 데리고 가도록 권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기를 위해 부부는 많은 것을 해 주었다. 가족이 모여 파티를 열고, 선물을 안겨주었고, 사랑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17일 후 루카스는 부부의 곁을 떠났다. 루카스의 장례식 날, 아빠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내 아들 루카스에게 감사합니다.”
 
어린 아기 루카스는 이 세상에서 17일 동안 엄마 아빠의 사랑을 흠뻑 받고 살다가 눈을 감았다. 루카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기일까? 아니다. 루카스의 탄생은 그의 아빠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선물해 주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가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아버지의 뜻과 소원을 알아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도 피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복음성가가 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내가 벌어 내가 먹고 살고, 내가 아들 딸 낳아 내가 키우며 사는데 웬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가. 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는가 하고 질문하면 안 될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아닌 것이 있는가. 이 절기에 강단을 장식하는 이 모든 곡식과 채소와 과일과 열매들 중에 인간이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이 그 하나나 있는가. 유대인의 세 절기인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인 추사감사절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출애굽의 감사가 있으니 유월절이요, 밀과 보리로 배를 채워 주시니 맥추절이요 가을걷이의 먹을 것을 풍성하게 주시니 추수절, 수장절, 장막절이 아닌가.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믿고 자녀 되어 사는 것이 얼마나 크신 주님의 은혜인가.

그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자들과 미신을 따르고 어리석은 신앙에 빠져 있는 이들 중에서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그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가.

세계에는 자기 나라를 잃고 난민 신세가 되어 바다를 떠다니고 자기와 가족들을 받아 줄 나라를  찾기 위해서 정처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떤 나라의 어린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 한 번 제대로 흡족하게 먹어 보지 못한 채로 병들어 죽어 간다. 파리 떼가 우글거리는 쓰레기 장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영양실조에 빠져 허덕거리며 연명한다.
 
이번에 판문점 남북 공동 경비 구역을 통해서 귀순하다가 추격하는 북한군 병사들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목숨을 건진 북한 병사의 이야기를 보라. 그의 건강 상태는 남한과 대치된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북한군대의 현실을 말하지 않는가.
 
어제 조선일보(2017. 11. 25) 주말 특별 기사에 우리나라 무속인의 실태에 대한 전면 기사가 실렸다.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100만 명가량이라고 한다.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냐면 기독교의 목사 전도사의 수가 14만 명이다.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 등의 수가 1만 6000여명이다. 불교의 승려의 수가 4만 7000명가량 된다. 이런 통계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100만 명의 무당 박수 점쟁이라니. 이 숫자는 5500만 인구 대비로 하면  인구 55명 당 무속인 한 사람 꼴이라니 섬뜩한 생각이 들지 않나. 어쩌다 나라가 이 꼴이 되어 가는가. 신 내림 굿을 배우는 학원의 수강생이 한 곳에 100명 이상씩 모여서 비싼 수강료를 내고 굿을 배우는 세상이란다. 
 
겨울의 문턱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교훈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 중에 출애굽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 중의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430년간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애굽을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게 해 주셨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시작한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제사 신앙과 절기 신앙을 가르치셨다.  절기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속으로 하면 구정과 추석이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믿는 성도된 우리들에게 있어서 절기 신앙이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입증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사도 바울은 그가 늘 말하던 대로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 중에 이스라엘 인이요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모세의 율법과 법도와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일에 무흠하기를 원하리 만큼 철저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제사 신앙과 절기를 지키는 신앙에 철저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 체험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에 붙잡혀 열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이유도 복음 전파의 죄목을 쓰고 매여 있는 몸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 아침 하박국서와 빌립보서를 읽었다.

하박국서의 말씀이 무엇인가. 참으로 그런가.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는가. 하박국의 고백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등 그 어느 과일 나무를 들여다 보어도 거둘 열매가 하나도 없다. 밭을 바라도 보아도 완전 흉작이다. 밭에 거두어 먹을 소출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를 들여다보아도 텅 비어 있다. 양 한 마리도 없다. 외양간을 들여다보아도 소 한 마리 없다.
 
완전 폐허, 완전한 흉작이다. 이런 절대 굶주림과 기근 앞에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다.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그래도 감사하는 것이 하박국의 모습이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이어진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쯤 되면 배고프던 시절에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표현인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초근목피가 무엇인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배를 채우고 냉수 마시고 풀밭에 누어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며 처량한 신세타령할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당장 한 끼 해결할 먹을거리가 막막한 상황에서 이런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형편이 그러하였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유롭지 못한 몸이다. 그런 그가 감옥 안에서 세상의 성도들을 향하여 편지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모든 사람에게 너희 관용을 나타내라.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우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나는 비록 지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족함을 배운 자의 감사.
사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고 물질적으로도 부족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그의 옥중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도운 것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편지의 마무리 부분인 본문에서 정중하게 감사하며 언급하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점점 형편이 나아지는 것이 좋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누가 원하랴.  그런데 바울은 감히 말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이런 고백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형편’이 무엇인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라고 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자족을 배우는 것이다.
모세 때의 광야 40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애굽에 있었으면 만나나 메추라기 보다는 더 좋은 것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애굽 생활이란 것이 노예 생활이 아닌가.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건너 편 광야로 이끌어 내었나. 만나나 메추라기나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가 아니면 광야 생활 40년을 어떻게 버티며 살 수 있었겠는가. 광야 생활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고 파 하던 땅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요단 강 건너편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하셨다. 가나안이 어디인가. 짓지 않은 집, 파지 않은 우물 물, 심지 않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의 풍성한 열매들을 누가 주었는가.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하지 않았나.
 
내 배부르고 내 등 따뜻하면 다 좋을 것 같았지만 그 다음은 안일한 삶이요 그 다음은 타락의 연속이 아니었나. 긴긴 사사기의 내용이 무엇인가. 왜 사울 왕의 나중이 잘못되었나. 왕 세우신다고 하지 짐 보따리 뒤에 숨던 자가 나이 40된 사울이었다. 그런 사울이 나중에 얼마나 기고만장했나. 사무엘 선지자를 어떻게 대했나.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지 않았나. 자족 할 줄 모르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만다. 자족할 줄 모르면 내 안에 내가 주인이 되고 만다.
 
날 구원하신 주께 감사하는 절기여야 한다. 교회의 지난 8년 아니 앞으로 80년이 지나도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신자는 신자다워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지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면 안 된다.
 
어제도 태준이와 방송실에서 주일 준비 확인하고 있는데 “목사님 우리 교회가 좀 더 부흥 됐으면 좋겠어요.”하고 말했다. 부흥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부흥이 무엇인가. 나 한 사람이 주 안에서 거듭난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때에 부흥이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믿지 않던 가족이나 사회 생활하면서 주변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나도 당신 다니는 그 교회 같이 다니면 안 될까.” 이런 말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감사가 있고 자족함이 있고 위로가 있고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의 거룩한 연합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이 계절에 여러 차례 부르고 또 부르는 “날 구원하신 주 감사”찬양의 가사를 보면 숙연한 생각이 절로 든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은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 감사
측량 못 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
 
가사 중에 특별히 이런 내용들이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서 닿는다. 그렇지 않나.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 감사
측량 못 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어떤가. 쉽게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가. 사람이 좋은 차, 넓은 집, 넉넉한 수입과 마르지 않는 경제력, 먹고 마시고 입고 쓰는 모든 지출에 아쉬움이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수입된 것은 1903년 미국에서 고종임금이 타는 차를 가져 온 것이다. 그 후, 1911년에 영국으로부터 다임러 리무진을 한 대 더 들여왔다. 첫 차는 역사에 남아 있지 않고 두 번째 자동차는 복원되어 창덕궁 어차고에 전시되어 있다. 114년 만에 이제는 집집마다 자동차요 어떤 집은 2-3대씩 된다. 우리 어렸을 적 초등학교 시절에는 집에 전화기, 피아노, 자전거, 재봉틀, 라디오, TV,전축 이런 것 있는지 가가호호 조사한 적도 있지 않나. 사람이 소유에 집착하면 만족이 없다. 100평 아파트에 살아도 족함이 없다. 북한산과 남산과 한강을 등기 문서로 가져도 족함이 없다. 제주도 전체를 내 소유 삼아도 욕심이 채워지질 않는다.
 
우리 가운데는 병들고 허약하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밤낮 쉼이 없이 일하고 또 일해도 손에 들리는 수입은 뻔하고 주변에 돈 달라고 손 벌리는 식구들만 넘쳐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는 뭔가. 나는 일하는 기계, 돈 버는 기계인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인생이 곤고해진다. 밤을 새워가며 일해도 족함이 없다.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 감옥 안에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산적은 없었다. 그는 다메섹의 예수 체험 이전에도 그랬다. 그는 다메섹의 체험 이전에 잘 나가던 유대주의자요 앞서가던 바리새인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생일 정도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 만난 이후에 그의 삶이 더욱 곤고해졌다. 걸핏하면 굶고 걸핏하면 잠도 못자고 걸핏하면 춥고 배고프고 헐벗었다. 매도 여러 번 맞았고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가운데 죽을 번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도 복음을 전파하던 이유 때문에... 그런 그가 말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서로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자의 감사.
우리는 대개가 빌립보서 4장 13절을 절대 긍정의 삶을 교훈하는 말씀으로 이 구절말 뚝 잘라내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이 말씀 말이다. 이 구절을 천번 만번 외운다고 해서 수능 시험 망친 학생에게 100점짜리 성적표가 날아오나. 이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운다고 해서 인생의 숙제들이 순풍에 연실 풀리듯이 술술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하나. 아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이런 고백의 바탕은 무엇인가.
 
바울에게는 비천함, 풍부함, 배고픔, 배부름, 풍부와 궁핍에 적응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자의 달관이 있었다. 바울은 온갖 우여곡절 많던 지난날들을 뒤 돌아 보며 모든 것이 주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하며 숙연하게 옥중에 갇혀 있다. 우리는 그의 남은 생을 주께 맡기며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는 절대 믿음의 한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만나보게 된다.
 
바울은 더 이상 편지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숙연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4:14)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새번역은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잘 한 일입니다.”라고 했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나를 도와 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6:2),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권면하였다.
 
기쁨을 함께 나누며 배가 되고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감사.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잘 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섬김과 돌봄이 결국은 하나님께 향기나는 제물을 드린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그 시대에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쓰고 계셨기 때문이다.
 
광야 생활 중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막을 건축하였다. 모세가 자기 살 집을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제사할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 중에서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을 가져 왔다.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료와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출25:5-7) 그런데 그 앞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누구나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25:1-2)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가는 배실 한 가닥이라도 성막을 짓기 위하여 드리고 조각목 하나라도 구하여 드리고 염소 털이라도 가진 것 중에 구별하여 드린 이들이 성막 건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선교의 노장 사도 바울을 위하여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정성스럽게 모금을 하였다. 그리고 바울의 쓸 것을 보내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지내는 바울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고 감동이 되어 편지하는 것이다.
 
17절에 바울은 말한다.
선물을 구한 것이 아니라 섬긴 이들에게 오히려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고 했다. 그 동안 에바브로디도 편에 전해 준 모든 물품과 사랑이 얼마나 귀한가하면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넉넉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축복하며 문안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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