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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의 감사 찬송(시138:1-8) 202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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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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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7-30 01:51 조회 5,216 댓글 0
 

                      예배자의 감사 찬송(시138:1-8)          2022. 7. 24

 

 

역사에 뛰어난 왕들이 적지 않지만 다윗(David, BC 1040-970)이야말로 놀라운 치적을 가진 왕 중의 한 사람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다윗에 대하여 적지 않게 알고 있다.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에 소개된 다윗에 대한 내용만해도 그 분량이 방대하다. 다윗은 사람이 세운 왕이 아니다. 다윗은 주전 1010-970년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이었다. 사도행전 13장 20절에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였다. 어느 왕조이든지 대개 혈통을 따라서 왕이 되지 않나.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왕자들 중에서 왕의 대를 잇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왕이 아니었다. 다윗은 이스라엘 변방의 시골 마을은 베들레헴에서 살던 이새라는 평범한 목축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명의 형들이 있었다.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였던 그는 늘 들판에서 양을 치며 지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주목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이다. 사울 왕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큰 아들을 비롯해서 아들 셋을 동시에 군대에 보내야 했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아들이 많기로 아들 셋을 동시에 군대에 보낸 부모의 심정을 말이다. 그것도 평안할 때의 군대가 아니라 전쟁이 벌어진 상태에서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요즘이야 메스컴이 발달해서 실시간 전쟁 뉴스가 전해지지만 삼천년 전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걱정도 되고 염려도 컸던 아버지 이새는 군대의 천부장에게 전해 주고 싶은 비상 식량들과 아들들에게 먹이고 싶은 비상 식량들을 챙겨서 막내 아들 다윗에게 심부름을 다녀 오게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섰던 다윗의 전쟁 위문 방문이 그의 생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다윗의 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생이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의 편에서 생각하면 우리 각 사람의 운명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나 다윗은 특별하였다. 다윗의 운명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의 나날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체험하며 지내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다윗이 물맷돌 한 개로 이긴 전쟁의 장면은 소설과도 같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울이 왕으로 있던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전쟁에 능한 장수가 한 두 명이었겠나. 활 잘 쏘는 용사가 한 두명이었겠나. 칼 잘 다루는 용사가 왜 없었겠나. 창 잘 던지는 뛰어난 용사가 얼마나 많았겠나.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손을 빌려서 일하지 않으시고 전쟁터에 심부름을 갔던 10대 중반의 소년 다윗이 던진 물맷돌 한 개로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의 목숨을 거두게 하셨다.

 

이러한 일로 다윗은 온 나라의 백성들이 다 아는 이름이 되었다. 적군 블레셋의 군대까지도 주목하는 소년이 되었다. 우리는 그날, 그때, 그 현장에서의 다윗의 고백을 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나님은 이러한 분명한 믿음의 사람, 소년 다윗의 손길을 사용하셨다. 그가 던진 물맷돌 하나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생명을 다스리셨다.

 

다윗을 사위 삼았지만 늘 미워하고 시기하며 적대시하던 사울의 칼과 창으로부터 하나님은 다윗의 생명을 보존하셨다. 그리고 긴긴 세월 후에 다윗의 나이 삼십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다윗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 신분이나 출신으로 하면 절대 다윗의 힘과 역량으로는 왕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주목하셨고 그를 사울 왕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의 제 2대 왕이 되게 하셨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138편은 다윗이 왕으로 있으면서 수 없이 쳐들어 오는 주변 국가들의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경을 넓혀가며 강성대국을 이룩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한 감사 찬양시이다.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나. 누가 지는 것을 원하겠나. 공부를 하든지, 운동 경기를 하든지, 게임을 하든, 농사를 짓든지,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지, 무역업을 하든지 그 어떤 일을 하든지 잘 되고 번성하고 경쟁에서 이기길 원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소원이 아니겠나. 그런데 세상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주를 의지하고 그래서 주께 기도하고 그래서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 아닌가. 

 

1-2절에 보면 다윗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고 있다. 다윗은 예배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즐겨하였다. 2절에 보면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때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예배자를 삼으시려는 것이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찬송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이다. 

 

올해 초에 은퇴한 명지대학교회 유병우 원로 목사는 코로나 전파가 심각하고 19명으로 예배자를 제한하던 때에도 주중에 어느 시간에든지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과 함께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준비한 헌금을 예배당의 봉헌함에 봉헌하고 돌아가는 시간을 계속하여 갖도록 강조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는 다윗의 마음이란 이런 마음이다. 다윗은 나라가 어수선하여 전쟁의 최전선에 나가 있던 때라도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의 성전을 사모하였다. 예배를 사모하였다. 사실 다윗 때의 성전이란 솔로몬 때에 성전이 지어지기 이전이니 성막이었다. 다윗은 성막 시대를 살았던 임금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마음은 늘 성막에 있었다. 

 

다니엘도 예배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청년의 때에 나라가 힘을 잃게 되자 느브갓네살 왕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 그가 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였다.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바벨론의 다리오 왕의 명을 어기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절대 숭배하던 다니엘이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왕의 명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는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평소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예배를 사모하는 열심이다. 예배가 식으면 신앙도 식는다. 신앙이 불붙으면 예배 생활도 불이 붙는다. 예배 생활은 나의 신앙생활 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와 같다. 예전에는 예배에 열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면 신앙의 열심이 식은 것이다. 반대로 예전에는 예배를 드려도 그만 않 드려도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예배 생활 우선의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전보다 믿음이 견고해져 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날마다 예배만 열심히 드리면 다냐”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 이야기 하지 말고 다윗 이야기를 하자. 다윗은 왕으로 있으면서도 예배를 소중히 여겼던 인물이다. 아무리 국사가 바쁘고 아무리 나라 안팎으로 뒤숭숭하여도 다윗은 언제나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사는 것이 날마다의 소중한 일과였다. 여기 ‘향하여’라는 단어 אֵ֖ל(엘)은 멀리서 성전을 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앞에서’라는 뜻이다.  אֵ֖ל(엘)은 곧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즉 다윗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부지런히 했던 예배하는 왕이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고 하였다. 다윗이 아는 하나님,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 다윗이 섬기고 따르는 하나님은 두 단어로 함축하면 ‘인지와 성실’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주님이시다. 여기서 ‘인자’(仁慈)란  חסד(헤세드)는 “인애, 자비, 사랑, 긍휼”등을 나타내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표현한 단어이다. 또한 ‘성실’(誠實)하심이란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 그러면 다윗이 그렇게 주의 성전에 나아가서 예배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는 예배의 내용이 무엇인가. 예배의 이유가 무엇인가.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으므로.

다윗은 체험의 사람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하여 소문으로 듣고 남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어 자기도 믿어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분명한 하나님 신앙을 갖고 자라났다. 이는 다윗의 베들레헴에서의 어린 시절부터가 그러하였다. 2절에서 언급한 ‘주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홍수 후의 노아와 언약하셨다. 그 후에 하나님은 데라의 아들 아브람에게 찾아가셔서 언약하셨다. 그 언약은 일방적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닫고 믿고 받아 들이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리함으로 아브라함을 언약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사무엘하 7장 8-16절에 보면 하나님이 다윗과 언약하신 언약의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 요약하면 이렇다.

내가 너를 양을 치던 자리에서 데려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겠다.

네가 가는 모든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

네 앞에서 원수를 멸하고 내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내가 너로 하여금 정한 곳에서 살게 하겠다. 

내가 너로 하여금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고 편히 쉬게 하겠다.

너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나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겠다.

네 자손이 내 집을 건축할 것이고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

나는 너와 네 후손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내 아들이 되게 하겠다.

만인 그들이 죄를 범하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서 은총을 거둔 것처럼 하지는 않겠고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견고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배경을 안다. 어느 날 다윗 왕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자 나단과 함께 시간을 갖고 있었다. 다윗 왕은 평소의 생각을 선지자 나단과 나누었다. 때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주변의 침략국들을 일일이 무찔러 이기게 하신 후였다. 다윗은 백성들과 함께 평안한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다윗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선지자 나단이여. 나는 이렇게 화려한 백향목 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늘 휘장 가운데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선지자 나단은 왕께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시지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져서 돌아간 그 밤에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출애굽한 이후 오늘날까지 내 영이 머무는 곳을 장막과 성막으로 하였어도 내가 언제 누군가에게든 백향목 집을 지어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제대로 된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셨고 귀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이 사무엘하 7장 8-16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내용이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영원한 연약을 지키셨다. 다윗의 후손들 중에 형편없는 왕들이 적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켜나가셨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때가 찬 경륜으로 다윗의 혈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 다윗의 통치가 영원하였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케 하셨다. 

다윗도 여전히 온전한 인물이 아니다. 다윗에게도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 허물과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욱 간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지내고자 하는 다윗을 주목하셨다. ‘전심으로’ 라는 말은 ‘둘로 나누이지 않은 마음’을 뜻한다. 다윗은 인간적인 부족이 많고 여전한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자의 마음이 특심하였다. 다윗의 마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며 찬송할 마음으로 가득하였다. 다윗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씨름하였다.

 

오늘 날 우리들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신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여 선한 길을 예비하고 계시다. 나는 나의 앞날을 모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한순간 앞일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사를 아시고 매사를 아신다. 나의 나됨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우리 각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살아 왔고 그 분의 손 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런 은혜가 각 사람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응답(應答)하시고 힘을 주어 강하게 하시므로.

신앙 생활은 체험 생활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맛보아 알고 나면 하나님을 떠나 살라고 떼어 밀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면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체험과 확신이 있다면 어찌 기도하지 않겠나. 다윗은 기도와 응답의 사람이었다. 3절을 보라.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라고 하였다. 그렇다. 다윗은 시시 때때로 주께 간구하였고 시시 때때로 주께 응답 받으며 살았던 수 없는 기도의 사람이요 수 없는 응답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만 응답하시고 조지 뮬러의 기도에만 응답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다. 누구나 주께 부르짖으면 들이신다. 

 

주님은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친히 약속하셨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말이다. 

다윗은 계속하여 분명하게 간증하고 있다.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이다. 그렇다.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주께서 각 사람의 영혼에 힘을 주어서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한 영의 권세로부터 무너지는 인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강하고 담대하기를 원하신다. 

 

여호수아 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젊은 여호수아를 대를 잇는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네 평생에 능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강하고 담대하여라. 내가 모세에게 명하였고 모세가 네게 명령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여라.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께 간구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셔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다.

모세가 그러하였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러하였다. 

사사 기드온이 그러하였고 여 사사 드보라가 그러하였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그러하였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 다윗이 그러하였다.

하나님의 예언자 이사야가 그러하였고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가 그러하였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 에스더와 그의 삼촌 모르드개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셨다. 그리하므로 바사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의 제 이인자였던 하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하려던 음모가 다 드러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던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오히려 하만 자신이 매어 달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은 금식하며 철야하며 울며 기도하고 간구하던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를 통해서 선조들의 땅 예루살렘 성을 52만에 중건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기도와 간구의 사람을 찾으신다.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힘을 주셔서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평생을 날마다 간구와 부르짖음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충만한 힘을 공급받으셨다. 맛디아로 보충된 사도행전의 열두 사도들도 다 기도의 사람이요, 간구하는 사도의 길을 걸아갔다. 육체의 운동이 유익이 있듯이 기도하면 주께서 각 사람의 영혼에 힘을 주시고 그 범사를 강건하게 하신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하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를 위하여 보상(報償)해 주시므로.

4-5절에 보면 다윗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자기 자신이 늘 주께 간구하는 기도의 왕으로 살아가듯이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다 주께 감사하는 그런 날이 오기를 소망하였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찬양하는 날이 오기를 간구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체험한 여호와의 영광이 크고 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지만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을 굽어 살피신다. 6절의 ‘낮은 자’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시인하고 늘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인생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굽어 살피시는’ 자상하신 아버지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무리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 같아도 각 사람의 마음의 교만을 아신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여도 만약에 그 마음 속에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게 교만한 마음을 품는다면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임금 사울의 나중 불행을 보라. 사울 왕이 군대가 부족하여 망했나. 사울 왕이 무기가 부족해서 망했나. 사울 왕이 전쟁의 일선에서 그를 보호하는 자들이 없어서 적이 쏘는 화살에 중상을 당하였나. 아니다.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넘어질 수 밖에 없고 한 순간도 나의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신앙 고백 가운데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환난 중에 나를 지키시는 분이 누구신가.

원수와 대적자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원수들의 악한 생각과 분노로부터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 누구신가.

 

우리 각 사람이 믿고 예배하며 감사하고 찬송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시는 전능자이시다. 다윗은 7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주의 오른 손이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그리고 다윗은 이어서 분명한 신앙 고백을 기도로 올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라고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녀들의 범사에 보상하시되 풍성하게 채우시고 흔들어 넘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보상 그러면 금방 돈과 재물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맞다. 하나님은 다윗의 때에 이스라엘의 왕궁에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이 넘쳐나게 하셨다. 은과 금과 각종 보석과 향료와 온갖 좋은 것들로 차고 넘치게 하셨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예배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에 위로와 만족과 평강과 기쁨과 감사의 영이 샘 솟게 하시는 전능자이시다. 

 

나라 안팎으로 어렵고 마음 무거운 소식이 엄습하는 이러한 때에라도 여전히 우리 각 사람에게 주께서 보상해 주시는 날마다의 감사와 기쁨과 보람과 만족과 위로가 넘쳐나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생각하여 보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최고의 보상이 무엇인가. 재물인가. 성공인가. 출세인가. 일확천금인가. 세상 지위와 인기와 권력과 명예인가. 젊음인가. 물론 다 좋다. 그러나 내 영혼에 부어 주시는 감사와 찬송과 만족과 기쁨이 최고의 보상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찬양하는 것이다. 

 

주 없이 살수 없네 죄인이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소서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됩니다.

<292장, 주 없이 살수 없네>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내 영혼에 평화가 남쳐 남은 주의 큰 복을 받음이라.

....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12장 찬송,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우리 다 같이 <나는 예배자입니다>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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