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의 바울의 권면(고후:1-13) 2022. 7. 17
지난 주일에는 ‘전도자 바울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주일 말씀을 묵상하였다. 오늘은 ‘전도자 바울의 권면’이란 제목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사도 바울이나 그와 동역하던 실루아노나 디모데나 디도를 비롯한 모든 선교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었다. 이는 당시 건강하게 고린도교회를 지켜 가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날 고린도 후서의 말씀을 묵상해 가는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각 사람은 이 시대에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God’s co-worker”라고 하였다. ‘co’라는 말이 ‘더불어, 함께, 같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여호와이시지만 스스로 혼자 일하지 않으신다.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방주의 건설도 하나님의 손으로 손수 짓지 않으시고 긴긴 세월 동안 노아의 손길로 지어지게 하셨다. 출애굽도 하나님이 직접 바로 왕을 만나지 않으시고 말이 어눌하다고 고집하는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을 보내셔서 일하게 하셨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적을 보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내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 힘 만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하나님이 힘과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과 판단력과 추진력을 주셔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슨 권면을 계속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 당시의 이 같은 권면은 오늘 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겨 가는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또 새로운 권면의 말씀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라.
신앙생활은 은혜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은혜를 모른다면 어떻게 주를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다르겠는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저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았다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그렇게 쉽게 타락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나.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우리는 모든 게 나 중심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잘 나서 이렇게 성장했고, 내가 잘 나서 공부도 했고, 내가 잘나서 직장도 가졌고, 내가 잘나서 장사도 했고, 내가 잘 나서 사업도 했고, 내가 잘 나서 재산도 마련했고, 내가 잘 나서 이만큼 누리며 산다고 여긴다면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은혜의 눈으로 보면 내게 은혜 아닌 것이 단 한가지나 있나. 모든 것이 주의 은혜가 아닌가. 두 눈, 두 귀, 양 팔, 양 손, 열 손가락, 양 다리, 열 발가락 이 모든 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없는 사람 생각하고 장애로 태어난 사람 생각하고 살아가며 팔 다리를 잃고 손가락 잃고 시력 잃고 더 이상 귀가 먹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답답해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아니 지금 내가 못 걷고, 못 듣고, 못 말하고, 못 보고, 못 욺직인다고 해도 내게 남아 있는 주의 은혜가 족한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요 희극 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쓴 단편 중에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들을 추적하여 글을 썼다. 예수를 만난 알콜 중독자가 말했다. 나는 앉은뱅이일 때는 앉아 구걸만 하면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었는데 주님께 고침을 받고 나니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속이 상해서 한잔 한잔 하다 보니 알콜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폭력배를 만났다. 전에는 나는 못 보는 소경이었다. 예수가 나를 고쳐 주었다. 그러나 눈 뜨고 세상을 보니 속이 상하고 화나는 일이 많아서 주먹질하다 보니 폭력배가 되고 말았다. 창녀를 만났다. 저는 전에 창녀로 살 때에 예수 만나 새 삶을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 나는 가정도 이룰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더러운 여인이라고 외면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 은혜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란 “하나님으로부터 값 없이 거저 받은 사랑”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은혜이다. 죄 사함 받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이 은혜이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영생하는 천국 백성이 된 것이 은혜이다. 배를 신처럼 섬기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이 은혜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이 은혜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혹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를 깨달을 때에 시작된다. 그러므로 은혜를 모르는 자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의 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어느 집에 정중하게 초대를 받아 도착하면 그 가정의 현관문이 열리고 환영을 받고 현관 안에 신을 벗고 응접실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집에서 준비한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마신다. 디저트로 여러 가지 과일도 먹고 케이크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초콜릿도 먹는다. 이처럼 은혜는 주어지는 사랑을 그때 그때 받아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은혜에 대하여 편지하면서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라는 말씀 말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은혜’와 ‘구원’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렇지 않나. 죄를 범하여 타락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은 이 무더운 여름에 비도 계속 내리지만 순간 순간 뜨거운 햇볕이 내려 쪼이게 하셔서 오곡 백과가 결실해 가게 하신다. 날마다 비만 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아의 홍수 때처럼 40일간 밤 낮이 없이 계속하며 하늘에서 비만 내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다. 반대로 일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뙤약볕만 쨍쨍 내려 쪼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를 내려 주셔서 이 땅의 삼라만상이 골고루 힘을 얻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신다. 이 땅의 온갖 채소와 각양 아름다운 꽃과 열매 맺는 나무들과 들판의 풀과 산을 덮는 울창한 숲들에 때를 따라 내려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택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푸르름이 유지되겠는가. 그 숲에 벌과 나비와 온갖 기고 뛰고 달리는 동물들이 번성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우주 삼라만상을 질서있게 운행하신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이만한 건강을 유지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만 끝나면 사람 살만한 세상이 다가 올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위험이 인류의 앞날을 두려움과 공포 속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의 말씀에서 대하는 대로 이 세상에 영원한 평화와 안정과 행복이란 없다. 이 세상은 언제나 흉용한 날들이 계속된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가뭄과 굶주림과 흉년과 홍수와 각종 재앙이 끊임이 없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건강한 이성으로 대하지 않고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정을 주고 받고 짝을 맺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이 찾아 왔다.
물가는 폭등하고 서민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져만 간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유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 잡아 사회의 질서를 위협한다. 나라 안에 동서의 갈등과 남북의 이념의 대립과 사상의 혼란으로 서로를 원수시하며 물고 뜯고 찢으려 한다. 나라도 걱정이지만 가정이 흔들리고 파괴되는 경우가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리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번져 가고 있다. 차라리 혼자 사는게 더 낫겠다고 여겨서 혼자 지내는 세대가 점점 늘어 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성도인 믿음의 사람들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명분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우리 각 사람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에 은혜를 받아야 하고 지금 이 시간에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now is the time, now is the day”
이 ‘지금’이란 시간을 은혜의 시간, 구원의 시간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금 중에 최고의 금이 ‘지금’이라고 하지 않나. 황금, 백금, 24k 다 좋고 다 귀하지만 지금이 귀한 시간이다. 지금이 가장 가치 있고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지금 은혜받지 못하면, 지금 은혜를 모르면 나중에, 다음에, 내일 은혜를 받게 된다는 보장이 없다. 441장 찬송가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1절 가사는 이렇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구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 속에 지금 오셨네
나의 생명되는 내 주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이런 은혜와 사랑이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축복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가라.
세상에는 분야마다 일꾼을 찾는다. 구직 광고가 계속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취직이 만만치 않다. 세상은 각 분야마다 실력있는 인재를 찾고 있다. 밴처 기업들은 각 분야에 경험 많은 인재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각 분야의 공무원 시험에 마음을 쏟는 청년층들이 점점 늘어 나고 있다. 그 어느 분야이든 실력이 없이 채용될 수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 이는 작은 가게 하나를 운영하고 작은 기업 하나를 세워 나가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해당 일자리에서 인정받고 발전하려면 실력과 능력과 자질과 인품을 골고루 갖추어야만 한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더욱 더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기업의 비밀을 다른 기업이나 다른 나라에 팔아 버리는 배신자도 있다. 어떤 이들은 국가 기밀을 국제적으로 유출하는 배신자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꾼은 어떠하여야 할까.
3-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일꾼은 어떠하여야 한다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일꾼은 그 누구에게라도 비방을 받으면 않된다.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자신을 지켜 가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누구 앞에서든지 거리낌이 없게 처신해야 한다. 매사에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은 온갖 고난을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한가. 그렇지 않다. 평생토록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몸의 질병과 고통을 달고 살수도 있다. 늘 기도하며 살아도 자식이 속 썩일 수 있다. 가정사가 뒤숭숭할 수 있다.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바울이 고백하고 있지 않나.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라고 하였다. 예수 믿고 예수 전하며 살아가는데 누가 이런 끊임이 없는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원하겠나.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일상은 늘 그랬다. 그래도 바울은 감사했고 기뻐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분명하고 담대하게 권면하였다. 바울은 고난 중에 보석처럼 다듬어지는 맑은 영혼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래서 그는 감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라고 말이다.
이어지는 그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확신에 가득 찬 신앙고백을 보라. 8-10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다.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자, 그러면 하나님의 일꾼은 어떻에 세상 중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인가. 오늘, 지금 이 시간 우리 각 사람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나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꾼답게 가정과 세상과 교회에서 살아가려고 씨름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축원한다.
마음을 넓히라.
마음을 넓히라는 교훈이 무엇인가. 오늘 날 나는 어떤가. 가정과 직장과 사업의 현장에서 늘상 대하는 주변 사람과 가족들 앞에서 나의 마음 가짐은 어떠한가. 사도 바울은 너무나 분명하게 권면을 계속하고 있다. 다시 또 <현대인의 성경>으로 11-13절을 읽도록 하겠다.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우리는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그 어떤 사업의 현장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마음이 넓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그렇지 않나. 그 어느 누가 마음 좁은 사람, 속 좁은 사람, 속이 답답하고, 생각이 답답하고, 매사가 답답해 빠진 사람을 그 누가 원하겠나. <개역개정성경>에서는 11절에 보면‘좁아진 마음’을 말하지만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훨씬 실감나게 “옹졸한 마음”이라고 해석해 놓았다. 우리 말에 ‘좁쌀 영감’이란 말이 있지 않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마음을 넓히라는 것이다. 그렇다. 은혜받은 사람은 마음을 넓혀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은 마음을 넓혀야 한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마음을 넓혀야 한다. 은혜 받은 성도라면 넓어진 마음, 넓어진 생각, 넓어진 의식, 넉넉해진 사고방식의 새사람으로 변화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매사에“그럴 수가 있어”라고 시비 걸지 말고 “그럴수도 있지”라고 넉넉하게 받아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그래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행복하고 그래야 교회 생활이 행복해 질 수 있다.
‘고린도인들이여’라는 표현은 바울의 마음이 몹시 격앙된 흥분 상태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열린 입과 넓어진 마음에 대하여 말한다. ‘입이 열리고’라는 말은 진실하게 말하고 거짓이 없이 말하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누구와의 사이에 마음이 닫히면 서로 대화를 멈추게 된다. 말을 섞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입이 열리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은 서로의 오해가 풀리고 섭섭한 감정이 가라앉고 원만한 관계가 회복되는 시작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오해하고 폄훼하고 거짓 사도들의 잘못된 거짓 복음 전파로 인하여 영적으로 병들어 가고 무질서해져 가는 고린도교회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렇게 권면한 것이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라고 말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스스로 마음이 옹졸해져서 사도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고 비난하고 오해하고 분쟁을 일으키는 세력이 있었다. 저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권면을 계속한다. 13절에 보면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라고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딸에게 넉넉하고 안정되고 너그러운 말로 타이르듯이 권면을 계속하고 있다. “아비의 권면에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라고 말이다.
우리는 쉽게 갱년기라는 단어를 쓴다. 갱년기를 의학적인 용어로 “남녀가 신체의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하는 시기”를 말한다. 남녀와 개인에 따라 차이기 조금씩 있기는 하지만 대개 40-50대에 갱년기가 시작된다. 술을 많이 마시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경우의 남성은 이미 30대 후반부터 호르몬 분비가 감소하고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남성의 경우 갱년기 현상은 “건망증, 우울증, 자신감 결여, 집중력 저하, 불안, 무기력, 피로, 탈모, 식욕 저하, 복부 비만, 성기능 저하, 관절통, 안면홍조, 불면증” 등이다. 남성의 경우에는 여성들에 비해서 갱년기 증상이 불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혈액검사를 통해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 수치’를 분석해 보면 자신의 갱년기 현상을 분석 받을 수 있다. 이런 용어가 사용된 것이 1935년부터이니 그렇게 오랜 역사가 아니다. 남성들이 수염이 난다든지 목소리가 굵다든지 남성미를 갖게 하고 여성화를 막는 흐르몬의 이름이 ‘테스토스테론’이다.
여성의 경우의 갱년기 현상은 얼굴과 목과 가슴이 갑자기 빨갛게 변한다.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 온 몸에 열이 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잠을 자다 말고 갑자기 깨어 일어나기도 한다. 식은땀을 흘리거나 가슴이 두군거리기도 한다.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여성성이 멈추고 여성 호르몬의 양이 갑자기 줄어들면 골다공증이 심각해지기도 한다. 가려움증, 우울증, 과민 불안, 기억력 장애, 피로 증가, 두통, 집중력 저하, 신경질, 짜증이 자주 난다.
교회를 섬겨 나가는 40-50대 남성들과 여성들 그리고 그 이상의 60, 70, 80대의 남녀 그 누구라도 분명하게 해야 한다. 갱년기 증상만 핑계 대지 말고 서로에 대하여 마음을 넓혀야 한다. 받은 은혜를 헛되이 여겨서는 않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대로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참되고 유명하고 영생하며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만유의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무더워져 가는 여름에 넉넉하게 자신의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일꾼답게 은혜로운 나날을 기쁨과 감사와 소망 중에 살아가는 넉넉한 마음, 넓은 마음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