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5:1-6) 2022. 6. 12
로마서 3장 21절부터 4장 전체까지의 말씀을 단숨에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5장에서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의인이 아니다.
의인이 아니라는 말은 죄인이란 말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맞다. 한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죄로 말마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 그러면 의로워지는 길이란 없는 것일까.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보다 2천년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의롭다’라고 인정을 받게 되었을까.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다. 로마서 4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맞다. 이는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근거이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곧 이어서 ‘칭의’(稱義)의 문제를 다룬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는 1절의 내용 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따르는 상급이 있다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상태’를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신칭의의 상태는 로마서 3장 22절에 그 명확한 대답이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에게 ‘죄 사함’이 선물로 주어지고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구원(救援)이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하실 일을 바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나이 100세에 90세된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조급한 요구를 받아들이고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런 모습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셨다. 다시 긴긴 세월이 흘러갔다. 로마서 4장 20절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을 때가 되면 이루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의심하지 않았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20-22)
자,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인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의 첫째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화평’이 무엇인가. 공동번역과 새 번역 성경에서는 ‘평화’라고 번역했다.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서는 화목이라고 번역하였다. 화평, 평화, 화목 다 같은 의미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peace’라고 했다. 헬라어의 ‘에이레네’(Εἰρήνη),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은 단순히 분쟁과 다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마음이 편안한 심정 안정 상태 정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단어의 본뜻은 ‘보상’과 ‘회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된 ‘화평’이란 죄로 인하여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해결되어 타락하기 이전의 원만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의 죄가 해결되고 죄 사함을 받은 자녀의 권세를 덧입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회복한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예전에 보던 <개역한글> 성경의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번역이 훨씬 마음에 와서 닿는다. 영어 성경에 보면 ‘with God’이라고 했다. ‘누리자’라는 표현은 권면에 가깝다. 그러나 원뜻은 ‘누리도다’라는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상태와 결과를 내포하고 있는 상급과 보상과 같은 말씀이다. 그렇지 않나. 누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복인가. 매사가 그렇지 않나. 우리 말 속담에 “버는 놈이 따로 있고 쓰는 놈이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 않나. 구원의 은혜와 선물은 누리는 자에게 임하는 복이다. 그렇지 않나. 로마서 5장 2절의 ‘은혜’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여 보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는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인간은 결코 의롭지 못하다. 의로운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데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이것이 자녀의 권세이다. 이것이 양자됨의 은혜이다. 어제 낮에 참 더웠다. 올 여름 중에 가장 더운 것 같았다. 물론 그늘에는 바람이 그런대로 불기는 했다. 그러나 참 더웠다. 구파발 성당 쪽 지하도 입구에서 전도하는데 모처럼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젊은 부부들도 많았다. 어린 아들 딸의 손을 잡고 가는 여러 부부를 보았다. 어떤 젊은 부부는 딸만 셋이었다. 어떤 젊은 아빠는 두 어른 아들의 손을 양쪽에 잡고 지하철을 타러 급하게 가고 있었다. 저들의 광경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만약에 아빠가 없이 큰다면”이라고 말이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 그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성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복이다. 로마서 4장 6-9절에 보면 ‘복’이란 단어가 네 번이나 연이어 나온다. 그렇지 않나. 무엇이 복인가. 내 공로가 없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그 상태가 복 중의 복이 아닌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할례자이든 할례자가 아니든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면 그것이 복이 아닌가 말이다. <주는 평화> 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리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리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한 화평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우리가 주일 예배 시간마다 첫 찬송으로 부르는 입례찬송들이 대개 찬송가 1, 2, 3, 4, 5장이다. 송영이라고 한다. 그 가사가 무엇인가. 모든 가사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천군천사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 의해서 영원히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로마서 5장 3절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광이다. 그렇지 않나. 죄인된 우리 인간에게 무슨 영광스러울 것이 있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임한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자랑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아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얼마나 허물투성이인가. 그러나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베드로는 어떻게 해서 초대 교회의 그렇게 위대한 사도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이로써 우리는 성도가 누리는 나중 영광이 처음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복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낳은 아들들 중에서 야고보와 유다를 보라. 예수의 동생들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자가 되었나. 예수의 아우이기 때문에 형님 덕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와 같은 역할을 맡았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자녀 교육을 똑 소리나게 잘했기 때문인가. 물론 이런 영향 저런 혜택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의 아우들 중에서 야고보나 유다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믿음의 의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바라고 즐거워한 것이 아닐까.
성도가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란 그런 것이다. 그 주어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의 감격을 갖고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스러워 하며 소망을 품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덧입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다. 5절 말씀대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는 6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롬5:9)들이다.
오늘 날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서로 다 다르다. 그 형편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역량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경제력도 다르고 삶의 여건도 다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누구나 다 각 사람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살이에는 환난이 있다. 환난이 계속된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그러므로 어느 시대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 어느 누구일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인 우리가 절망과 탄식과 한숨 가운데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고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
34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라는 찬송가의 후렴 가사처럼 말이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곧 승리 하리라”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양을 함께 부르자.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기며 살아가는 이런 은혜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한다.
소망(所望)을 이루자.
물론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인간은 음식 없이 약 사십일을 살 수 있고 물 없이 약 삼 일을 버틸 수 있다. 공기 없이는 약 8분을 버티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망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 갈 수가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소망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단테는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의 입구에 “여기에 들어가는 자들아, 모든 소망을 버려라”라고 써 놓았다. 그렇다. 소망이 끊어지는 곳이 지옥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과 고난과 질병 가운데 무너져 버리는 인생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인 우리 각 사람은 그 어떤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개인이든 가족이든 나라이든 가난을 극복하는 힘도 소망이고 시대적인 거대한 악이나 불의와 거짓을 이기는 힘도 소망이다. 질병과 연약한 현실을 이겨 내는 힘도 소망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분부하였다.
물론 성도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소망은 부활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인 영광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환난 가운데서라도 참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품고 사는 소망은 그 어떤 환난과 핍박 가운데에서도 최후 승리를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말미암아’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로마서 5장 1, 2, 5, 9, 18절을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1)
또한 그로 말미암아(2)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5)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9)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18)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의 복을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역사를 일으키시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각양 좋은 것들을 공급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위대한 찬송이 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라는 찬송가 481장이다. 영국 축구 프리미어 리그 FA컵 결승 때 모든 관중이 일어나서 이 찬송을 부른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도 불렀다. 인도는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국경일에 이 찬송을 부른다.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는 인도의 간디가 가장 사랑했던 곡이라고 전해진다.
시인이며 21살에 영국 성공회 성직 안수를 받은 목사인 영국의 헨리 라이트(Henry Francis Lyte, 1793-1847)가 1847년 9월 4일, 그가 24년간 목회하던 바닷가의 가난한 교인들에게 한 마지막 설교 시간에 헨리 라이트 목사는 설교단까지 거의 기어서 올라갔다. 그날 그의 메시지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젊어서부터 천식,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던 그는 결핵 요양차 이탈리아를 거쳐서 프랑스 니스에서 54살에 눈을 감았다. 그가 얼마 동안 집을 비웠던 목사관 서재의 책상 위에는 한 편의 시가 놓여 있었다. 14년 후인 1861년에 오르간 연주자이고 작곡자였던 윌리엄 몽크(William H. Monk, 1823~1889)에 의해 곡이 붙여진 찬송가이다.
4절의 마지막 소절에 보면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라고 찬송하고 있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주 홀로 마귀 물리치시니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주 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십자가 밝히 보여주소서
내 모든 슬픔 위로하시고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런 충만한 성령의 은혜와 늘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각 사람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