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가정(시127:1-5) 2022. 5. 15
가정과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두 축과 같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라도 가정이 없이 태어나거나 자라나는 경우란 없다. 부모를 일찍이 잃은 고아라도 그 어느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가정에서 받아야 하는 사랑의 일부라도 받고 자라나는 것이다. 원시 부족이라도 가족 중심의 부족 생활을 영위해 간다. 저들에게 있어서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부족이 울타리와 같은 나라의 역할을 한다.
시편 127편은 솔로몬의 시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이다. 그 문장이 워낙 아름답고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의미 전달이 선명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시편이다.
집이든지 나라이든지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고 세워 주지 않으시면 계속하여 행복한 가정과 번영하는 나라가 될 수는 없다. 물론 한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가족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그래야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행복이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크게 생각해 보면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아니면 내가 노력하고 내 가족이 열심히 수고한다고 해서 가정의 행복이 절대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개인과 가정과 한 나라의 운명이 다 마찬가지이다.
1절에서 말씀하는 집이란 가정을 일컫는 것이고, 성이란 한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가정과 나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인생의 평안과 안식과 만족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전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가정에 태어나고 자라나는 다음 세대 즉 아들딸들은 부모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누가 행복해하고 싶지 않아서 불행하게 살겠는가. 누가 안식과 보람과 만족을 누리고 싶지 않아서 울고불고하며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살아가겠는가.
자식도 그렇다. 내가 원한다고 아들딸을 내 맘대로 낳을 수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공급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돌보심이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섭리요 다스리심이 아닌가.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을 지낸 오늘은 도대체 가정이란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오늘 읽은 시편 127편에서 찾아 묵상하려고 한다.
세우시고 지키시는 여호와.
집이야 돈이 있으면 지을 수 있고 아파트는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가정은 돈만 있다고 가정다워지는 것이 아니다. 집은 건물이고 가정은 사람이다. 영어로 가족을 ‘family’라고 하는데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라는 설명을 본 적이 있다. 근거가 없는 이야기일지라도 의미는 있다.
건물로서의 집은 돈으로 지을 수 있지만 가정은 사랑과 관심과 격려로 세워가야 한다. 성경은 사실 가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렇지 않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보라. 부부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도 가정 이야기이다. 창세기 5장의 족보도 결국은 가정 이야기이다. 창세기 6장부터 나오는 노아와 그 시대 홍수 심판에 대한 내용도 가정 이야기이다.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이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드린 가정은 노아의 가정뿐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창세기 12장의 내용도 가정 이야기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당시에 75살이었다. 자녀 없이 살아가던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는 65살이었다. 저들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 받았지만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들 이삭이 태어난 것은 25년 세월이 지난 후인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 때의 일이었다. 물론 중간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성경에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가정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 반대로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된 이야기로 가득 찬 가정의 이야기도 적지 않다. 연세 100세의 아브라함이 연세 90세의 사라를 통하여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 가정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증손자 중에 야곱이 낳은 넷째 아들인유다는 손이 없이 ‘엘’과 ‘오난’ 두 아들이 죽었다. 셋째 아들 ‘셀라’는 아주 어린 나이였다. 홀로 된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친정에 내려 가서 지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유다는 아내와 사별하였다. 그 후에 양털을 깎으려고 먼 길을 나섰다가 변장을 한 며느리 다말을 몸을 파는 여인으로 착각하여 며느리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부끄러운 가정사의 내용이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둥이를 낳았다. 그 중에 먼저 태어나려던 형을 밀치고 더 먼저 태어난 아들에게 “터뜨렸다”는 뜻의 ‘베레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오는 이름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라는 역사적인 배경이 바로 창세기 38장이다.
이처럼 한 가정의 구성원인 가족이 이 죄와 악이 가득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별의 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본다. 이런 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렇다. 결코 집은 저절로 세워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만다”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고 만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가족을 위한 기도와 가정을 위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또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셔야 하지 않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고 안위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매사에 하나님 하나님 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이상한 집단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아니.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지 무슨 하나님 하나님 하느냐”라고 반문하고 우습게 여기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가정에 대한 의식 즉 가정관은 어떤가. 나라에 대한 의식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국가관은 어떤가. 우상 숭배하고 미신을 믿고 무속인에게 찾아다니며 굽신거리며 내 인생의 장래사를 묻고 점을 보려고 하는 이들과 우리는 뭐가 다른가.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답게 세워지고 믿음의 가정답게 지켜 지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신앙 생활에는 나의 몫과 하나님의 몫이 있다. 가령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라고 약속해 주셨다. 어떠한가. 무엇이 우선인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가 먼저 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이것이 우선이다. 그런 태도와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면 그 앞에 무슨 내용이 나오는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그 후에 예를 들어 하신 말씀이다. 이 교훈을 말씀하실 때 하신 그 유명한 말씀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라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교훈이 바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교훈의 말씀이시다.
어떤가. 요즘 새 정부의 장차관 인사 청문회 준비와 진행 과정을 보라. 이전의 집권당과 무엇이 다른가. 별로 차이가 없다. 비리 없고 혐의 없고 의구심 받을 일 없어서 털고 털어도 먼지가 조금도 안 날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없다. 그럼 뭘 말하나.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인간은 불의하다. 이건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의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가정도 단 한 가정도 없다. 창세기 6장 9절의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라는 성경 말씀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나. 노아에게 불의가 없어서 성경이 그를 의인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노아에게 불완전한 면이 전혀 없어서 완전한 자라고 한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고 단지 하나님이 그를 완전한 자로 여겨 주신 것 뿐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어야할까. 매사에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려는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이요 하나님이 지키시는 가정이 아니겠는가. 그런 은혜와 평강이 늘 가득한 가정이 되기를 축원한다.
잠을 주시는 여호와.
지금 이 시간에 졸거나 잠이 든 분이 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집, 아버지의 집에 왔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서 졸음이 오거나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은 몸과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 축복일 수 있다. 그래도 예배 시간에 졸거나 잠 들어 버리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현대인의 고민 중의 하나는 불면증이다. 이런 예를 들면 우리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배 부른 소리 하시네”이렇게 반응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시간이 없어 못 자고 고단하게 지내지 하루 종일이라도 자라면 잘 수 있다.”라고 말하며 날마다 고단한 일과 중에 피곤하게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의외로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 잠이 무엇인가. 인생의 삼분의 일이 잠이다. 어린 아기들은 젖을 먹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잠만 잔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일년 동안 하루 평균 16시간 동안 계속 잠을 잔다. 잠을 자면서 무럭 무럭 자라난다. 두 세 살 때에도 날마다 11-14시간 동안씩 많은 잠을 잔다. 13-18살의 십대 때에는 8시간에서 10시간 가까이 잠을 자야 정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중고등 학생들의 학교생활과 학원 생활은 그렇게 넉넉한 잠을 충분히 자도록 여건을 허락하질 않는다. 18-60세 기간에도 7-9시간의 잠을 자야 정상이다. 60세가 넘으면 멜라토닌 호르몬의 생산이 줄어들기 때문에 점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때 드러나는 현상이 수면 부족과 불면증이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노년기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적정 수면 시간은 개인의 체질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발명왕인 과학자 토마스 에디슨은 하루 평균 4시간씩 자면서 연구에 몰두했다. 반면에 역사적인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의 잠을 잤다고 전해진다.
물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잠 자는 시간이 줄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하루에 6-7시간 쯤은 잠을 자야 한다.
잠이란 것은 평안과 안식이다. 그렇지 않나. 만약에 나의 날마다의 일상 생활 중에 평안과 안식이 없다면 아무리 일찍이 일어나서 부지런히 살아가고 밤 늦게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밤이 깊어야 겨우 늦게 잠시 잠리에 들며 노예처럼 열심히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하나님이 평안과 안식을 공급해 주시고 보장해 주시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날마다 억만금을 벌고 통장에 돈이 수 백 억, 수 천 억 아니 조 단위로 쌓아져 간들 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무엇엔가 쫓기는 것 같고 하룻밤도 평안하게 모든 것 내려놓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는 신세라면 뭘 자랑할 것이 있겠나. 뭘 대단하다고 으스댈 것이 있겠나.
지난주에 무슨 책을 읽다가 조선 시대 27명들의 질병과 수명에 관한 글을 보았다. 조선 시대의 왕은 여러 명의 어의를 항상 곁에 두고 매 끼니마다 전국 팔도의 산해 진미 중에서 영양가 높은 제철 음식들만 먹었다. 그런 대도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46세였다. 게다가 40세도 넘기지 못한 왕이 11명이나 되었다. 왕들이 오래 살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운동은 하지 않으면서 영양가 높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고 색을 탐했기 때문이다. 또 나랏 일을 보느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것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원인이었다. 가령 세종 대왕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의 육식가였다. 반면에 운동하는 것을 싫어해서 심각한 비만이었다.결국 여러 질병에 시달리던 세종 대왕은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다른 병이 다시 생기니 몸이 점점 쇠약해지는구나."라며 슬퍼했다. 세종 대왕도 52살밖에는 더 살지 못했다. 물론 백성들에 비하면 왕은 무척 오래 산 편이다. 조선 시대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약 35세밖에 되지 않았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하룻 밤을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또 새 날을 맞아서 별로 몸의 고통이나 아픈 곳이 없이 웬만한 건강을 유지하며 또 하루를 살아 갈 수 있다면 그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시간인지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 말이다.
요즘과 같은 무한 경쟁 사회에서 직업과 직장과 자기 사업을 갖고 지내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면서 수고하고 끼니마다 건강하게 한끼의 음식을 섭취하며 하루 하루를 지낼 수 있다면 그 하루라는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시간인지 모른다.
생각해 보아라. 세계적인 기업 삼성의 이건희(1942-2020) 전 회장의 노년기를 보라. 2014년 5월 10일, 한남동 자택에서 호흡 곤란과 심장마비 증세로 급하게 강북삼성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였다. 그 후 78세에 눈을 감기 까지 6년을 병원에서 연명해야 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 살아가는 것이다. 내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젊음도 나의 것이 아니다. 내 건강도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삼가고 주의하고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앉고 일어나고 들어오고 나가는 그 모든 출입과 범사가 다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알렉산더는 33살에 죽었다.
마릴린 먼로나 다이애너는 36살에 죽었다.
이소룡은 32살에 죽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42살에 죽었다.
진시황은 49살에 죽었다.
나폴레옹은 52살에 죽었다.
존 에프 케네디는 46살에 죽었다.
이 땅에서 평안과 안식을 주시듯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인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사실이 아니라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뭘 말하려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깨달은 성도로 살면서 하루를 평안하고 편안하게 잠을 자면서 일과를 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중의 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가 무엇인가. 잠을 잔다는 것이 무엇인가. 속이 상하고 뒤 숭숭하고 걱정과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의심과 증오와 미움과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 붙잡혀서 내 마음이 초가 끓듯이 부글 부글 끓는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물론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할 시간이 있다. 깨어 있어야만 할 밤이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와의 마지막 밤이 그랬다. 예수는 잠을 자지 말고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저들 세 제자는 조는 정도강 ksl라 깊이 잠이 들어 버렸다. 그 밤에 예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붙잡혀서 골고다를 향하여 끌려가셨다.
우린 이처럼 살아가다 보면 잠을 청해서는 않되는 불면의 밤이 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하루 하루의 생활 중에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편안하고 복된 시간인가. 생각하여 보라. 고문 중에 고문에 잠을 못 자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므로 잠은 하루 일과 중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 중의 선물이다.
오늘 밤에도 주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잠을 푹 잘 잘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룻 밤의 숙면이 선물 중의 선물이다. 큰 고민에 휩싸이고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혹은 응급실로 실려가고 병원의 좁은 병실에서 지내야 하면 일상적인 나의 평온했던 하루 하루의 생활 리듬이 금이 가고 깨어지지 않나.
오늘 이 시간, 그 어떤 이유와 원인의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붙잡혀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주님께서 평안과 안식을 선물해 주시기를 바란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덥으소서.”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라는 찬송의 후렴이다. 주님 안에서 이런 평화와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자식을 주시는 여호와.
자식은 시편 127편의 솔로몬의 고백 그대로 “여호와의 기업이고 여호와의 상급이다.”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 잉태되고 태어났다. 예수는 마리아와 그의 남편된 요셉의 손길 가운데서 자라났다. 어머니 마리아가 보기에 아들 예수는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이었다.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맡기신 여호와의 상급이었다.“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으니”라는 표현은 아들딸 즉 자식을 표현한 언어와 문자의 표현 중에 최고의 표현이 아닐까. 잘 자라난 아들딸을 표현 하는 표현 중에 이보다 더 대단한 표현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우리 각 사람은 나를 낳아 준 부모에게 있어서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은 존재로 사랑을 입고 그런 기대 속에 자라나고 성장해 온 것이다. “이것이 그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고백인가. 그렇지 않나. 아들딸을 내 맘대로 낳을 수 있나. 아들 딸의 건강, 키, 체질, 체력, 지능, 사회성, 지구력, 인내심, 책임감, 성실성, 경제력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을 어머니나 아버지의 기대나 요구로 만족하게 해결할 수 있는가. 아니다.
물론 돌보고 키우고 보살피고 후원하고 붙들어 주고 지탱해 주어야 하는 것 맞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라. 가정마다 자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들딸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태어난 아들딸을 잘 가르쳐 보려 씨름하는 것은 어느 부모의 마음이나 한결같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들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장사의 화살통에 가득한 아들딸처럼 자리매김하려면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된 이들은 아들딸의 앞날과 범사를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시편 128편 3절은 가정의 어린 아들딸을 뭐라고 표현하였나.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하였다. 사진으로 두 그루의 감람나무를 보자.
지난 1997년 11월 19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일곱 쌍둥이가 태어났다. 9주난 일찍이 태어났다. ,출산 전에 의사는 선택적 사산을 권했다. 그러나 부모는 일곱 아기의 출산일을 기다렸다. 아들 넷, 딸 셋이 태어났다. 18년 세월이 흐르고 저들 모두 건강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사진이 2016년 5월 24일, 세계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으로 군대로 직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 후로 6년 세월이 지났으니 저들 칠 남매는 25살된 청년으로 장성했을 것이다. 일년 먼저 태어난 첫 딸과 함께 여덟 남매가 청년으로 장성한 것이다.
그 어린 감람나무 같던 어린 자식들이 잘 자라나면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성문의 담판이란 고대 시대 때에 어떤 사안을 협의하고 판결하던 곳을 말한다. 이는 부당하고 악한 일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서 훌륭하고 유능하게 잘 자라난 아들딸들은 그를 낳은 부모에게 있어서 그런 의지와 힘이 될 것이란 예언적인 축복의 약속인 것이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공동체와 다음 세대가 그런 든든한 연합을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