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가르치라(신6:4-9, 잠4:1-9, 잠22:6) 2022. 5. 1 어린이 주일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이는 <어린이 날 노래>의 가사이다. 윤석중 작사, 윤극영 작곡으로 1948년 작품이다. 맞다. 어린이는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푸른 벌판으로 흘러가는 냇물처럼 거침이 없이 구김이 없이 자라나서 나라와 교회와 열방의 일꾼이 되어야만 한다.
작품 <파우스트>로 잘 알려져있는 독일의 작가요 철학자요 과학자로 불리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어린이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소망하는 만큼 자녀를 세우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그들을 성심으로 사랑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어떤가. 나에게 있어서 어린이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혹은 우리 가정에 있어서 어린이는 어떤 존재인가. 어린이가 없는 가정, 어린이가 없는 교회, 어린이가 없는 사회, 어린이가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냈고 세계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 받던 노벨 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Nelson (Rohihlahla) Mandela, 1918-2013)는“우리 아이들은 우리의 가장 큰 보물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어린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구조를 찢고 나라와 민족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얼마 전 러시아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피난민 엄마가 어린 딸 등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새겨 넣은 사진이 세계 언론에 실린 것을 보았다. 계속되는 전쟁 중에 엄마는 죽고 두 살 된 딸아이만 살아남을 경우를 염려해서 등에 써넣은 이름과 생년월일이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어린이는 가정의 소망이요 나라와 민족의 소망이다. 오늘 신명기와 잠언에서 세 곳의 말씀을 읽었다. 그 중에 잠언 4장 3절의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라는 표현이 먼저 마음에 와서 닿는다. 그렇지 않나. 우리들 중에 아기로 태어나지 않은 이가 어디에 있나. 우리는 누구나 다 어느 가정인가에서 엄마 아빠의 아들과 딸로 태어나서 자라난 것이다. 부모를 일찍이 잃었거나 엄마 아빠를 일찍이 잃고 외롭게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나의 어린 시절의 진 자리와 마른자리를 거두어 준 그 누군가의 손길이 있어서 오늘 날의 내가 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스로 태를 자르고 스스로 다 알아서 성장한 어린이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서 마리아와 마리아의 남편될 요셉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신 것이다.
예수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려서부터 나사렛 회당에 드나들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자라났다. 동족을 애굽에서 출애굽하는데 쓰임을 받았던 모세도 갈대 상자에 담겨서 나일강에 떠내려 보내졌던 불운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민족적인 선지자로 오래도록 쓰임 받은 사무엘도 실로의 성막에서 외롭게 부모와 떨어져서 지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 다윗 왕도 아버지 이새의 무릎 위에서 자라나던 베들레헴 마을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성경은 자녀 교육 특히 어린이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제대로 잘 가르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을 이곳저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오늘 읽은 말씀을 차례대로 묵상하도록 하자.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치라.
소위 ‘쉐마’라고 이름 붙이는 내용이 신명기 6장 4-9절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였다. 여기 ‘들으라’라는 표현이 ‘쉐마’이다. ‘쉐마’란 단지 그냥 들리는 소리를 들으라는 정도의 명령어가 아니다. 이는 “듣고 순종하여 지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경 말씀을 접하며 살아가나.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말씀으로부터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서 듣고, 라디오나 TV나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듣는다. 또 끊임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암송하기도 하고 늘 묵상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다양한 내용의 교훈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순종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면 신명기 6장 말씀은 무엇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는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라.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라.
집에 앉았을때에든지 길에 갈때에든지 누워 있을때에든지 일어날때에든지 언제 어디서나 이 말씀을 강론해라.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아라.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아라.
또 네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기록해라.
위 내용은 딱히 설명이 필요 없는 행동 강령이다. 이렇게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유일신 신앙을 가르쳐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라.
너 자신뿐만 아니라 네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쳐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라.
늘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손목에도 말씀을 차고 미간에도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기록하도록 해라.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가르치시는 이유가 뭘까.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지, 얼마나 사랑하며 생활해야 할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시다.
“마음을 다하여”라는 것은 “전인격으로”라는 말씀이다. “뜻을 다하여” 라는 것은 “성품, 영혼, 생명을 다하여”라는 말씀이다. “힘을 다하여”라는 것은 “활동력을 다하여”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힘을 다 쏟아 부어서 생명을 바치듯이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보면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딸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께 합당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이는 부모나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 순위를 교훈하신 말씀이시다. 예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앞 절에 보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도 교훈하셨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따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자녀 세대와 어린이들에게 하나님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 교육, 학원 교육 다 필요하고 다 중요하지만 하나님 사랑하며 살아가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 신명기 6장 7절에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하였다. 여기 ‘부지런히’라는 단어는 ‘날카롭게, 찌르듯이’라는 뜻이다. 어물어물 대강대강 되면 되고 말면 말고 정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칼로 여미고, 뾰족한 송곳으로 찌르듯이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강조이다. 그렇지 않나. 오늘날 얼마나 사회 범죄가 다양하고 심각한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다면 그런 극악한 범죄, 끔찍한 범죄에 연루되겠는가.
<연금술사>라는 책의 저자로 잘 알려진 브라질 출신의 작가 파울로 코엘로(Paulo Coelho, 1947-)는 “어린이는 항상 어른에게 세 가지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유 없이 행복하고, 항상 무언가 바쁘고, 원하는 모든 힘으로 요구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하는 제자들에게 아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교훈해 주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법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는 가족과 교회학교 교사와 성도들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도록 가르치라.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은 다 제 잘난 맛에 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어른이나 젊은이나 어린이나 누구나 다 매우 이기적이다.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고집이 세다. 내가 최고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어리석다.
31장 분량의 잠언 중에 9장 까지의 내용에 솔로몬의 잠언 15개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 일곱 번째 잠언이 오늘 읽은 잠언 4장의 내용이다. 지혜에 관한 내용이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적 지혜’의 중요성과 그 가치에 대하여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매 구절마다 다양한 명령어가 계속되고 있다.
들으라(1)
주의하라(1)
떠나지 말라(2)
네 마음에 두라(4)
지키라(4)
얻으라(5, 7)
잊지 말라(5)
어기지 말라(5)
버리지 말라(6)
사랑하라(6)
높이라(8)
품으라(8)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그 명령에 순종하고 따를때에 받을 상급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교훈해 주셨다.
그리하면 살리라(4)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6)
그가 너를 지키리라(6)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8)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8)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마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9)
이처럼 현세와 장래에 주어질 다양한 축복에 대하여 약속해 주셨다.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낮추고 모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고 살아가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육에 골고루 행복과 만족과 평안을 선물해 주실 것이다.
5절과 7절의 ‘얻으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있다. 여기 ‘얻으라’는 단어는 상업적인 용어이다.‘구매하여 소유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 안에서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5절)는 명령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잠언 기록자인 솔로몬은 7절에서 다시 반복하고 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하였다.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라고 하였다. 예수의 비유 중에 밭을 갈던 사람이 밭에 보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천국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마도 예수께서도 잠언의 이런 말씀을 염두에 두고 그런 천국 비유를 교훈해 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살아갈 줄 어린이로 키워내면 평생토록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영원한 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가르치라.
잠언 22장 6절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하는 ‘아이’란 젖먹이를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나이는 품에 안고 젖을 먹일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조이다. 뿐만 아니라 ‘가르치라’는 말씀은 ‘하노크’라는 단어인데 ‘바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성막에 보내서 하나님께 바쳐진 어린 아이로 자라나게 한 것처럼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자처럼 키워 내야 한다는 강조이다. 부모에 의한 가정 교육과 어린 자녀를 향한 엄마 아빠의 신앙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나를 교훈하는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러면 난 이미 다 틀렸네. 우리 아들딸은 이미 다 장성해 버렸으니”라고 탄식하고 절망해서는 않될 것이다. 하나님은 물론 젖먹이 때부터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키워야 할 것을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야만 할 것이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대로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헬라 사람이었던 이달리아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부모가 먼저 믿게 되었는지 아니면 군대의 선배나 동기 중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먼저 믿고 그에게 전도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모두 다 경건하게 하나님을 잘 섬기던 믿음의 가족이었다는 점이다. 고넬료는 군대의 백부장인 직무에도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구제와 말씀 생활에 열심이었다. 환상 중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친척과 친구들을 일일이 불러 모으고 베드로 사도를 초청해서 부흥회를 연 것을 보면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번 5월 18일부터 삼일 간 있을 말씀 부흥 성회를 위해서 직장인들이 휴가라도 내서 참여할 정도의 열심을 가진 장로, 권사, 집사, 속장, 교사들이 있기를 기대한다.
어려서부터, 젖먹이일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십대 청소년일 때와 사춘기일 때에도 예배의 사람,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도록 붙들어 주어야 한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은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의 소년이었다. 그 꿈을 이야기 하는 바람에 배 다른 10명의 형들에게 몹시 미움을 받았다. 한 아버지의 아들들이었지만 다른 형제들은 요셉에 대하여 시기심이 불타 올랐다. 결국 요셉은 17살 때에 애굽의 노예 시장에 노예로 팔려 가고 말았다. 그런 요셉을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셨다. 요셉의 생애를 창세기에서 읽다 보면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라는 표현이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헤를 받게 하시매”(창39:21),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그렇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도 그런 여건 중에서도 형통하게 하셨다. 여주인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요셉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다.
나중에 요셉은 억울하게 갇혀 있던 감옥에서 바로 왕 앞에 나갈 길이 열렸다. 술을 맡은 관원이 과거에 옥중에서 만났던 요셉을 왕에게 소개한 것이다. 바로 왕은 요셉을 만난 후에 그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창40:38) 그리고 요셉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0:39)
요셉은 어려서부터 달랐다. 어려서부터 태어나자 마자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았다. 편애에 가까울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컸다. 어머니 라헬이 일찍이 돌아가셨어도 요셉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가운데 살아갔다. 아버지 야곱의 집에 있을 때이든지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후에든지, 주인마님의 성 유혹을 뿌리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든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최악의 환경 중에서도 요셉을 존귀하게 하셨다. 형통하게 하셨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이런 믿음을 갖도록 해 주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은 언제나 너와 동행하실거야. 그러므로 너도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않되, 너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면 않되.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너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높이시고 존귀하게 하실 거야”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잠언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어려서나 젊어서나 늙어서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그의 생을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복된 가정 복된 후손이 자라나는 복된 나날이 되기를 기도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