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약속(욜2:23-32) 2022. 10. 23
사도행전 2장 17-21절의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 중에 요엘서 2장 28-32절의 내용이 나온다. 요엘 선지자는 누구인가. 요엘서 1장 1절에 보면“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라고 했다. 요엘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된 것 말고는 달리 더 언급된 내용이 없다. 그러나 ‘요엘’이란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고, 그의 아버지 ‘브두엘’의 뜻은 ‘하나님의 성실’인 것을 보면 경건한 유대인의 가정임이 분명하다. 요엘서의 내용 중에 ‘전제, 소제’등 제사 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제사장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요엘 선지자는 남 유다의 제 8대 임금인 요아스(재위 B. C 835=796) 왕 때의 인물이다. 요아스 임금은 그 당시의 대 제사장 여호야다가 악한 여왕 아달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운 왕이다. 아달랴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다. 남 왕국 유다의 제 6대 왕 아하시야의 왕비로 출가해 와서 지내는 동안에 왕과 왕비가 여호와 보시기에 줄곧 악을 행하였다. 왕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 왕위를 차지하고 여왕으로 섭정하였다. 열왕기하 11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달랴는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유일한 여왕이다. 그는 바알 숭배를 끌어 들이는 등 여호와 앞에서 악을 자행하였다. 왕위에 오르자 남 유다의 다윗의 후손인 왕족을 멸족시키려 하였다.
그런 비상 상황에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부인이자 왕자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세바는 어린 왕자 요아스를 그를 키우는 유모와 함께 6년 동안 성전의 침실에서 숨겨 키웠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가 일곱 살 된 요아스를 왕위에 앉도록 하였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곁에 있는 동안에 성장기를 보낸 왕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작한 왕이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 왕의 고모인 여호세바의 남편으로 고모부였다. 그는 다윗의 왕정이 기울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갓 태어난 요아스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졌고 숨겨 키워 다윗의 혈통을 잇는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요하스 왕 때에 남 유다 지경에 메뚜기 떼의 큰 재앙이 있었다. 이로 인해서 남 유다 지경의 모든 땅이 황폐하게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로 살아가는 남 유다 지경에 극심한 가뭄이 덮쳤다.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장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마음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
강화도 시골에서 산 언덕 세 개를 넘어 걸어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 중학교 시절의 어느 여름 방학 때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본 책 중에 펄벅(Pearl S. Buck, 1892-1973)의 <대지>라는 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몹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왕룽(王龍)부부와 그의 세 아들을 중심으로 그 일가의 생애를 통해 격동하는 근대 중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척박하고 광대한 땅에서 생활하는 중국 농민의 잡초와 같이 끈질긴 생활상을 그렸다.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독특한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중국인들과 그들의 삶을 다룬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1931년에 발표된 그 소설의 내용 중에 중국의 광활한 땅에 휘몰아친 메뚜기 떼의 끔찍한 재앙을 설명한 내용이 나온다. 그야말로 대재앙이다. 어머 어마한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옥수수와 콩밭을 비롯한 농작물이 초토화가 된다. 펄벅은 미국인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의 딸로 중국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후에는 작가이며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그는 퓰리쳐 상과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펄벅은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 박사 부부와도 인연이 있었다. 유일한 박사의 부인이 중국계 미국인인 호미리 여사였다. 펄벅 여사의 일화 중에는 역대 미국인 노벨 상 수상자들을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가 백악관으로 초청하였다. 펄벅이 미국인이지만 중국이 활동 무대인 것을 알고는 “주한 미군에 너무나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고 있으니 차라리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 좋겠다”고 말하자 펄벅은 큰 소리로 “그것은 마치도 미국의 건국 초기처럼 옛날 영국의 식민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라고 정치적인 판단과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한다.
하나님은 남 유다 지경을 휩쓸고 지나간 메뚜기 떼의 대 재앙 후에 선지자 요엘을 보내셔서 말씀하셨다. 메뚜기 재앙과 극심한 한발의 원인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유다 백성들의 불신앙과 죄악 때문이라고 경고하셨다.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요엘서 1장과 2장 17절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을 포함해서 요엘서 2장 18절 이하에서 회개한 개인과 민족에게 내려 주실 은혜와 복에 대하여 약속하신 내용을 접하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복을 원하지 저주와 화와 재앙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화도 있고 재앙도 있다. 질병도 있고 사고도 있고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인재이든 자연적인 재난이든 재앙도 있다. 태풍, 토네이도, 쓰나미, 지진, 홍수, 가뭄, 흉년, 전염병 등이 오고 또 온다.
그런데 성경은 요엘서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서들과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이 한결같이 재난과 화의 배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분명히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요엘서의 기록자인 선지자 요엘을 통한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재난과 재앙과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깨닫고 겸손하게 주께로 돌아 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주께 회개하고 돌아 오는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복과 성령의 충만함과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다.
기쁨과 즐거움을 찬송할 날을 약속.
요엘은 주전 800년 전의 분열 왕국이었던 남 유다의 선지자이다. 그 시대에 대 재앙과 대 기근이 있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서 약속하셨다. 요엘서 1장 4절에 보면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며 기분 좋아하고 즐거워 할자가 누가 있겠는가. 9절에 보면 제사에 사용할 소제나 전제의 재료도 끊겼다. 밀과 보리와 감람유와 포도주가 끊겼다는 말이다.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슬퍼한다고 하였다. 1장 10절에 보니까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씀들을 대하다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답답해진다. 12절에 보니까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1장 13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른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라고 말이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메뚜기 재앙과 큰 한발 때문에 제사 드릴 소제물과 전제물이 부족하고 끊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제사 다운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마음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우상을 숭배하고 바알을 찾으며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이 실은 더 심각한 원인이라고 경고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금식하고 회개하며 진정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촉구하고 있다. 1장 14절 끝에 보면 “여호와께 부르짖을 지어다”라고 하였다. 1장 19절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리니”라고 하였다.
요엘서 1장 2-3절에 보면 오늘날로부터 2,800년 전에 있었던 옛날 이야기로 듣지 말고 요엘서의 말씀을 자녀들과 후세에 계속해서 말하라고 하였다. 1장 2절에 “늙은 자들아”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나이 먹고 늙어 가도록 하나님 안에서 경험한 인생 체험을 하나님 안에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후대에 전하고 또 전하라는 강조이다.
무슨 말씀인가. 인간의 흥망성쇠가 주 안에 있다고 가르치라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내 하고픈 대로 살아가지 말고 더딜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자녀에게 말하고 후세에 계속하여 말하라는 것이다.
만복의 근원이 세상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되려고만 하지 말고 주께로 돌아와야만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1장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지 않으시면 농부들이 부끄러워지고 포도원 지기들이 곡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생각하여 보라. 열심히 땀 흘려 밤낮 없이 논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와 포도원지기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나라가 평안한 것이 아닌가. 이 말씀은 오늘 날로 하면 산과 논과 밭과 바다와 각종 생산 공장을 비롯한 산업의 현장과 건설 현장과 회사의 사무실과 상점과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들과 가정에서 가족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에 이르기까지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려면 자기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하나님이 산과 들과 바다와 도시의 생산 시설을 비롯해서 모든 경제 분야에 복을 내려 주셔야 한다. 요즘처럼 물가가 치솟고 금리가 폭등하고 노사 갈등이 심하고 달러 가치가 계속 올라가고 부동산 시장이 요동치면 행복해 할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지금의 이 경제 대란이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지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전문가들 중에도 흔치 않다.
한 마디로 불안한 안개 정국 속에서 이 계절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엘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고 계시다. 2장 23절을 보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세상 사람들은 돈이 최고다. 부동산이 최고다. 목 좋은 곳의 아파트가 최고이고 목 좋은 곳이 상가 빌딩 소유하는게 최고다. “조물주 아래 빌딩주”라고 하지 않나. 돈 잘 버는 아빠 엄마 보다 빌딩 갖고 있는 할아버지가 최고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지금 나는 어떤가. “하나님. 하나님”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심은 정작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기준에 사로잡혀 살아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시온의 자녀들아”라고 부르고 계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시온이란 예루살렘 성의 다른 이름이다. 시온의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일컬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하다. 오늘날로 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찬송가의 가사처럼“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성령님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가라”는 분부이시다. 그리할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시고 예전과 같게 내려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다. 여기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 중에 ‘적당하게’라는 약속이 얼마나 크고 좋고 대단한 약속인가. 그렇지 않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지나치는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풍성하게 넘쳐 나게 하신다는 것인 풍족한 삶을 상징적으로 교훈하시는 말씀이시다.
도시에 살든지 농촌에 살든지 섬 마을에서 살든지 우리는 누구나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구나 원한다. 그러나 참으로 기쁘고 즐거워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살아 가는 믿음의 사람이 누리는 물질의 복은 복 중의 복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재물이 넘치어 나면 십중팔구는 교만에 빠지고 타락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넘치어 나는 풍성한 재물의 복을 받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24절에 말씀하신 대로 삶의 현장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응답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방 선교와 복지와 구제를 위해서 마음껏 쓰임 받는 가정들이 줄줄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리라는 약속.
하나님은 지금 메뚜기 재앙과 극심한 가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 유다의 백성들에게 선지자 요엘의 입을 통해서 분명하게 경제적인 회복과 풍성하고 풍족한 회복의 날이 다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이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욜2:27)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성령 받은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의 설교에서 인용된 그 본문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8-29)라는 그 유명한 약속의 말씀 말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내려 주셔서 밀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가득하게 하시고 농부와 포도원 지기의 얼굴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하는 표현 중의 하나는 28절의 시작인‘ 그 후에’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 후에’란 대단히 종말적인 말씀이다. 성경 전체로 하면 장차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예수를 통해서 이룩해 가시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까지의 긴긴 구원 역사의 서막을 설명하시는 매우 중요한 표현인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풍성하고 풍족한 먹을 거리로 인하여 배부르게 탐욕을 채우며 누리며 살다가 죽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은 현세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나이와 성별과 신분을 뛰어 넘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의 공로로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성별 구분이 없이 그 누구나 물을 붓듯이 부어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한다.
구약 시대의 기름 부음이란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들에게 의식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만민에게 물을 붓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약속은 초대 교회 성령의 강림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오고 오는 후대에 민족과 언어와 신분과 성별과 피부색을 뛰어 넘어 열방의 만만들에게 임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여기 28절의 ‘부어 주리니’라는 ‘붓는다’는 ‘솨파크’(שׁפך)는 ‘비나 폭포수’ 같이 많은 양의 물이 쏟아지는 것을 뜻한다. 성령을 만민에게 충만하게 공급하실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신 것이다.
엄청난 양의 폭포수를 보았는가. 우리나라에도 폭포가 있지만 세계의 거대한 폭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 캐나다와 미국 국경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폭포, 남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국경에 위치한 이과수 폭포 등은 설명으로는 그 규모와 위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가서 봐야 실감이 난다. 이과수 폭포는 275개의 폭포가 펼쳐져서 쏟아져 내린다.
자녀, 늙은이, 젊은이란 연령 구분을 말씀하는 것이고 남종, 여종은 성별 구분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어느 민족 그 어느 누구에게나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시겠다는 만민을 향한 성령 충만의 약속이시다.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며 이상을 볼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 안에서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는 초청이신 것이다. 이런 은혜를 충분하게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구원의 약속.
32절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인생이 이렇게 우상 숭배가 심하고 세속화 되어 있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복인지 모른다.
어제 구파발 성당 앞 광장에서 전도하는데 초등학교 2-3학년 정도 되는 남학생이 저 만치 20-30미터 쯤 거리에 엄마가 눈에 띄자 ‘엄마’하며 달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엄마’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해 전에 보았던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담과 하와 말고는 이 세상에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예수도 엄마가 낳았다. 예수도 엄마가 키웠다. 예수께서도 그를 낳은 엄마인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었고 엄마인 마리아의 복 중에서 만삭되어 태어났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도 그를 낳은 엄마인 마리아의 젓을 먹고 자라났다. 엄마 마리아가 해 주는 이유식을 먹었다. 엄마 마리아가 해 주는 음식을 먹으며 키도 자라고 지혜도 자라났다. 이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장성한 인간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엄마될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보내셨다.
엄마라는 존재는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엄마를 보내셨다.”라고 말하지 않나. 어린이에게 있어서는 ‘엄마’라는 존재가 전부인 시절이 있다. 이처럼 인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라야만 온전한 구원과 영원한 구원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 32절의 ‘부르는’이란 단어 ‘카라’(קָרָא)는 ‘애타게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메뚜기 재앙과 같은 시련이 덮치고 극심한 가뭄이 온 땅에 임하듯 황량한 고난을 겪을 때에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만 한다. 여호와께 부르짖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들 통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3)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나아와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