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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딤후1:3-8)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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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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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0-16 08:10 조회 4,157 댓글 0
 

                        마지막 편지(딤후1:3-8)              2022. 10. 16

 

 

요즘은 문서를 주고받는 통신 수단이 하도 발전해서 예전처럼 손으로 쓴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경우가 훨씬 줄어들었다. 그러나 2천년 전인 사도 바울 당시에는 편지를 써서 인편에 보내는 길 밖에는 멀리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소식이나 의사를 전달할 길이 없었다. 사도 바울은 편지의 사도였다. 그의 쓴 편지 13편이 신약성경에 포함될 정도이다. 그의 편지들은 사사로운 내용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서 전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교회의 역사의 그의 편지 13편을 성경에 포함시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지난 2천 년의 교회 역사 중에 이단과 사이비의 교주들이 받아서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문서들과 성경의 권위와 나란히 두려고 주장하는 문건들이 없지 않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등 다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은 언제 편지를 써 보았는가. 누구에게 편지를 써 보았는가. 무슨 내용, 무슨 주제의 편지를 써 보았는가. 만약에 내게 남아 있는 생애의 마지막 편지를 누군가에게 쓴다면 어떤 내용의 글을 쓰겠는가.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절감하면서 쓴 마지막 편지이다. 지금 바울 사도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 당시에 로마의 황제 네로(Nero, AD 54-68)는 로마 시내에 일어난 화재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점점 극심해져 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투옥된 때는 주후 66년이나 67년 늦가을 경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곧 다가올 겨울 추위에 대비해서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죽 종이에 쓴 성경도 갖다 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성경이나 겉옷도 챙길 겨를이 없이 강제로 체포되어서 급하게 감옥에 갇힌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얼마 후에 순교 당하였다. 그 때가 아마도 주후 68년 경쯤이었을 것이다. 디모데후서4장 6절에 보면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라고 편지한 것을 보면 이미 바울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마지막 편지’라고 정한 것이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후서에서 디모데에게 무슨 편지를 쓰고 있는가. 

 

 

거짓이 없는 믿음을 이어가라.

바울 사도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밤낮 없이 계속해서 기도 생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기도 할 때마다 그의 생각에 가득 찬 디모데를 떠올리고는 하였다. 디모데는 마음이 따뜻한 인물이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라는 표현이 그걸 말해 준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처럼 위대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베드로 정도의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오는 이 순간에 사도 바울의 생각에 가득찬 한 사람이 디모데였다. 왜일까.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마음 따뜻한 추억을 갖게 한 믿음의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한 것읻다. 춥고 외로우며 배가 고프고 고통스러운 감옥이지만 디모데를 만나 볼 수 있다면 마음에 기쁨이 가득할 것 같다고 했다. 

 

이 정도면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얼마나 끈끈한 관계인가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는 “청경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조상이란 직접 그의 위 조상들을 말한다기 보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을 언급한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만 그 자신이 철저한 유대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늘 밤낮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디모데를 보고 싶어 한 것은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바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유대인이었다. 디모데는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이 계승된 믿음의 사람이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진실한 믿음’을 말한다. 바울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그 당시에 거짓 교사들과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서 복음적인 신앙 위에 굳게 선 믿음의 사람을 찾아 보기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핍박과 유혹과 미혹이 계속되면 누구든지 믿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 곁에서 충성스럽게 주를 섬기던 동역자들 중에서도 주를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나를 버리고’라는 것은 단지 바울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순교를 각오한 믿음의 사람인 사도 바울을 버렸다는 말은 배교 즉 예수를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가 버렸다는 말이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며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라고 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배교하고, 주를 떠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계속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란 표현을 쓴다. 이는 단지 혈통을 이어가는 믿음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언약하신 언약이 어떻게 그의 자자손손 계승되었는가를 말씀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가운데는 내가 신앙생활의 시작인 당대 신앙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대 삼대 그 이상의 신앙의 대를 이어 오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나라도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된지 137년의 긴 세월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가령 나의 강화도 시골 마을에는 1906년 8월 23일에 데이밍(Charless Scott Deming) 선교사에 의해서 김용하, 전병규를 필두로 집집마다 세례 교인이 탄생하였다. 그 후에 스크랜턴 선교사도 이 마을을 찾았고 여러 세례 교인들이 입교인이 되도록 지도하였다. 김용하의 아들 중에 일찍 세상을 떠난 김철교의 아들인 김종우는 배재고등학교를 거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동대문, 상동, 정동 제일교회에서 목회하고 감리교의 존경 받는 감독격인 총리사도 지냈다. 신실한 믿음으로 자라난 그의 아들 중에 김용우(1912-1985)는 국방부 장관과 국회의원도 지냈다. 주 영국 초대 대사, 유엔 총회 한국 대표, 대한 체육회장, 올림픽 위원장, 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청빈한 삶을 살던 그는 은퇴 후에 한 때는 택시 기사로 생계를 이어 가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향의 선조들의 유산 3,000여 평을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에 기증하였다. 2020년 코로나가 창궐하던 때에 고향교회는 7억여원을 들여서 예배당 리모델링을 진행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용우의 딸 김00권사는 자신의 아파트를 팔아서 작은 전셋집으로 이사한 후에 3억원을 건축 헌금으로 하나님 앞에 봉헌하였다. 

 

강화도 섬마을 시골의 작은 동네에 심기어진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첫 가정인 김용하의 후손들은 나라 안팎에서 복음의 큰 나무와 숲을 이루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세워진 인천 내리, 서울 정동 제일, 상동, 종교, 새문안 교회 등에는 이처럼 ‘거짓이 없는 믿음’을 계승한 기독교 명문가들이 한두 가정이 아니다. 바라기는 예수 사랑교회의 성도들이 이와 같은 ‘거짓이 없는 믿음’의 대를 계승해 나가는 은혜와 간증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우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는 ‘성경(聖經), 이성(理性), 전통(傳統), 체험(體驗)’이 네 가지를 늘 강조하였다. 맞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야만 한다. 냉철한 이성과 체험적인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어져 가야만 한다. 존 웨슬리 자신이 친가와 외가의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던 믿음의 가정이요 안수받은 목회자의 가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은사(恩賜)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

그 당시의 사료에 따르면 디모데는 성경이 소심하고 사역 현장에서 그를 반대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디모데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 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은사’(恩賜)란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부어 주신 각양 은사들을 말한다. 그 다양한 은사를 사장시키지 말고 갈고 닦아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사역을 제대로 잘 감당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은 마귀 사탄이 주는 마음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부끄러움을 가리고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었다. 에덴 동산을 거니시던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라고 아담을 찾으셨다. 그 시간에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후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두려움 가운데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어 있었다. 창세기 3장 10절에 나오는 내용이다.‘두려움’이라는 감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두려움의 감정은 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제(10월 15일) 인터넷 뉴스에 따르면 부산의 어느 40대 여성이 50대 남자 의사를 살해하여 시체를 유기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해당 여성은 무기 징역형을 받았다. 주식 투자 관계로 서로 알게 된 40대 여성은 50대 의사가 1억원의 상환을 요구하지 해결한 능력이 없었다. 의사가 40대 여성에게 “당신의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겠다”고 말하자 두려운 마음을 가진 40대 여성은 지난 4월 6일, 부산 금정구의 한 주차장에서 의사를 살해하였다.  경남 양산의 한 밭에 시신을 유기하였다. 남의 차량에 종이로 만든 가짜 번호판을 붙였다. 죽인 의사의 부인이 이 여성을 의심해서 다음 날 새벽 전화로 다그쳤다. 불안해진 40대 여성은 시신을 다시 파내서 외손 엄지에 인주를 발라서 ‘허위 주식 계약서’에 지장도 찍었다. 그야말로 엽기(獵奇) 행각을 벌렸다. 죄는 죄를 낳고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의 마음에 평안과 감사와 기쁨을 선물로 주신다. 

 

믿음의 사람은 매 순간마다 문방구 앞의 놀이기구 안에서 고개를 드는 두더치처럼 시시 때때로 고개를 드는 두려움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주님이 원하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능력이란 ‘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폭발적인 탁월한 힘’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라고 기도할 때의 ‘권세’가 뒤나미스이다. 하나님은 주를 믿는 우리 각 사람이 병아리나 참새로 살다가 끝나길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고 공중을 날개쳐 날아 오르는 독수리와 같은 인생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히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사랑이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십자가 사랑을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에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하였다. 반면에 “사랑은 시기히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3장 2-3절에 보면“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이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는 “덤벙대지 않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자제력”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있는 마음’의 주인공답게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苦難)을 받으라.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이제 얼마 후면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할 바울 자신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지금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상황과 형편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다가 갇히게 된 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나 오늘 날이다 다 마찬가지이다. 내가 지금 예수 믿고 복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 중심, 예수 중심, 성령 중심, 교회 중심, 목회자 중심, 성도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모든 범사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요즘 창세기를 계속하여 묵상하고 있다. 이미 대한 말씀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애굽 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했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처지와 형편을 그 난감한 상황에서 건져 내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아내 사라를 구하고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아갈 수 있었을까.

 

최근에 묵상한 창세기 34장의 내용은 어떠한가. 야곱의 하나 뿐인 딸 디나가 하몰 족속 족장의 아들 세겜을 통해서 강간당하였다. 뒤 늣게 이 사실을 알레 된 오빠들 중에서 시므온과 레위가 나서서 하몰과 그의 족속들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였다. 할례를 행하지 사흘 째 되던 날 저들의 거처에 쳐 들어 가서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칼로 쳐 죽였다. 다른 형제들이 쳐들어 가서 노략질을 감행하였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창34:28-29) 이 후로 야곱은 큰 두려움 가운데 휩싸였다. 창세기 34장 30절에 보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라고 탄식하며 큰 두려움 가운데 떨고 있었다. 그런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세겜에서 48km 떨어진 루스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그곳을 베델이라 이름하게 하시며 야곱으로 하여금 그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셨던 언약을 다시 반복해 말씀하셨다. 20년 전 그 곳 루스 광야에서 밤중에 나타나 사닥다리를 오르 내리는 천사들과 하늘 문이 열린 신비 체험 가운데 말씀하셨던 축복의 언약의 말씀을 일일이 다시  또 언급하셨다. 그리고 야곱의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그 하나님이 오늘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찬양을 함께 부르자.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 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초대 교회 당시나 오늘 날이나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라는 이 권면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라는 336장 찬송가 2절에 보면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밤새워 갇힌 적이 있었다. 사도 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성의 길거리에서 전도하다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16:18)라고 명할 때에 그 여자 아이가 깨끗해 졌다. 

 

이 일로 그 점치던 여자 아이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관청에 고발하였다. 매를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다. 바울과 실라는 몸이 아프지만 밤새도록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렸다. 사도행전 16장 26절에 보면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매인 결박을 풀어 내고 끊어 내는 권세가 있다.

 

우리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는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초조, 불안, 우울, 낙담, 번민의 먹구름이 아침 햇볕 앞에서 안개가 사라지듯이 싹 사라지기를 축원한다. 우리의 온갖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 이름 권세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이겨 내며 기쁨과 감사와 소망과 즐거움과 평화가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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