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 바울의 권면(딤전2:1-7) 2022. 9. 18
지난 주일에는 디모데 전서 1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도자 바울의 감사”라는 제목의 묵상을 하였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전도자 바울의 권면”이란 제목의 말씀을 나누길 원한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불길처럼 번져 가던 영지주의 이단과 유대주의 세력에 대하여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그 주변의 성도들이 영적 분별력을 갖고 선한 싸움을 싸우길 원하였다. 영지주의 이단은 간단히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체로 계시던 분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던 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즉 예수의 육체의 탄생과 생애와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부정하는 저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단어가‘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영적으로 미혹이 심하고 이단의 횡포가 극심해져만 가던 그 당시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처처에서 어떤 이들은 신앙 양심을 버렸거나 믿음에 있어서 파선한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무엇을 권면한다는 내용인가.
기도의 대상을 넓히라.
사도 바울은 기도하여야 하는 대상을 제한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나의 생각이나 판단이나 인간관계의 한계로 금을 긋고 제한하지 말고 누구든지 기도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더군다나 2절에 보면 임금들,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 당시는 로마가 주변의 많은 국가들을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서 지역마다의 분봉왕들이 황제로부터 위임된 왕권을 행사하던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저들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고관대작들을 위하여서도 기도하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이 기도의 대상 중에서 저들을 제외시키지 말고 왕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고관대작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아는대로 그 당시 로마의 황제나 분봉왕들 중에서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호의적인 경우보다는 적대시하거나 핍박하고 박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 권력자들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백성들의 안녕과 평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과거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동서고금에 그 어떤 나라이든 그 어떤 민족이든 왕이나 고관들을 통해서 통치받지 않는 나라의 역사란 없었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정치 형태 속에서 살아가든지 권력자와 통치자와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정자 한 사람의 결정이나 판단이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 입법, 사법, 행정이 분리되어 국가가 운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구한말, 일제 식민지, 남북한으로 분단된 상태에서의 신탁 통치, 1948년 정부 수립, 1950년 6.25 전쟁과 휴전 이후로 오늘 날의 대한민국으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는가. 데모는 얼마나 많았고 박해는 얼마나 극심했는가. 부정과 불의와 불합리와 독재 체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항거하며 희생을 치러 왔는가.
독일의 경우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권 하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처신했으며 어떤 기도를 드려 왔는가. 저항도 필요하고 항거도 반드시 해야 하고 희생도 반드시 각오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악한 왕이든 선한 왕이든 정의에 편에 선 높은 지위의 위정자이든 불의를 일삼는 그 어떤 위정자이든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로마서 1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고 까지 말하였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기도하면 지혜도 주시고, 기도하면 용기도 주시고, 기도하면 분별력도 주시고, 기도하면 추진력도 주신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아말렉과의 전쟁 때에 여호수아는 최전선에 나서서 아말렉과 전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모세는 산 꼭대기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출애굽기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피곤해서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 아론과 훌이 돌을 준비하고 모세는 그 돌 위에 앉았다. 그리고 모세의 양편에 아론과 훌이 함께 서서 세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해가 지도록 저들 세 사람의 손이 내려 오지 않고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군대로 하여금 아말렉을 쳐서 이기게 하셨다.
히스기야 임금 때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군대 185,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다. 성 안에 포위 된 채 성 밖으로 물자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성 안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다. 히스기야의 편에서는 맞서 싸울 만한 군대와 병거가 부족하였다. 먹을 식량도 점점 부족해져 갔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 산헤립의 선전포고문을 들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이다.”(왕하 19:19)
하나님은 그 밤에 성전에서 기도하던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 밤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동원하셔서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5,000명을 치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예루살렘 성 밖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가 다 송장이 되어 있었다.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나오는 역사적인 장면이다.
불의한 권력 앞에 항거하고 맞서 싸우며 생명을 바쳐서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전에 기도하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왕 자신도 기도하고 백성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고관대작들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왕이나 그 높은 지위의 고관대작이 의롭든지 불의하든지 옳든지 그릇되었든지 진실하든지 거짓되든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리심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2장 1절에서 ‘간구, 기도, 도고, 감사’라는 네 가지의 각기 다른 기도의 표현을 접하게 된다. “간구(懇求)란 긴박한 상황에 놓인 개인이나 회중이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기도(祈禱)란 믿음의 사람인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소원을 아뢰며 찬양하며 기원하는 그 모든 것들”을 말한다. “도고(禱告)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를 말한다. “감사(感謝)란 믿음의 사람인 성도가 죄 가운데서 구원을 받고 그 심령의 기쁨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표현하는 감사의 기도생활”을 말씀한다. 이 모든 기도 생활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로 이어질 때에 내 주변의 그 모든 사람을 향한 중보의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응답이 있고 간증이 있는 생활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2절에서 교훈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씀하는 경건(敬虔)이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말한다. 단정(端整)함이란 사도 바울이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서만 단지 세 번 사용한 성도의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말한다. 즉 단정함이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므로 드러나는 고상한 신앙인의 품성과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덕행을 말한다. 디모데 전서 3장 2절과 디도서 2장 7절에도 ‘단정하며’라는 강조를 하였다. 믿음의 사람은 그 속과 겉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안과 밖이 한결같이 단정하여야 한다는 강조이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이란 하루의 생활 중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렇지 않나.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혁명이 일어나거나 지진이나 쓰나미나 홍수나 심한 가뭄 등과 같은 천재지변이 덮치면 어찌 고요하고 평안하게 생활할 수가 있겠는가. 지난 몇년 간의 코로나 19의 경험처럼 전염병이 극심하게 번지거나 하면 어떻게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나라의 지도자를 잘 못 만나서 나라가 뒤숭숭해지고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실직자가 늘어나고 물가가 폭등하고 금리가 불안정해지고 수출입에 어려움이 쌓이고 국제 경제 질서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고요하게 평안하게 생활할 수가 있겠는가.
한 가정으로 하면 가족 중에서 누가 중병에 걸린다든지 사고를 당한다든지 경제적으로 크게 손해를 입는다든지 안정된 직장에서 해고된다든지 가족 중의 그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무리를 일으키고 악을 행해서 감옥에 간다든지 하면 어떻게 하루하루의 일상이 고요하고 평안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교훈한다. 기도할 제목과 대상을 내 좁은 소견으로 제한하지 말고 기도의 대상을 넓혀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원을 알라.
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기서 말씀하는‘모든 사람’이란 천하만민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신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길 원하신다. 에덴에서부터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대상이다. 그러나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0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양이 주인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진리를 아는데 이르러야 한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의 ‘진리’(眞理)란 디모데전서 1장 10절의 ‘바른 교훈’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바른 교훈과 진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는 그 당시에 교회와 성도들을 어지럽히던 영지주의 이단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한 내용이다. 진리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의 뿌리이고 열매이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바른 교훈만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절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다. 예수는‘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성경에 예수를 말할 때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현은 이곳이 유일하다. 사도 바울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꼭 집어서 강조하였겠는가.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전능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그것이 골고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다.
이런 강조를 한 이유가 뭘까. 그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인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는 영으로 와서 영으로 살다가 영으로 죽고 영으로 부활났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는 자들이었다. 그런 주장과 거짓 이론을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한다. 오늘날도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에 빠져들어가며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많은가.
이처럼 영적으로 혼미한 세상에서 구원의 은총과 진리를 깨닫는 은혜가 자신과 가족과 주변 영혼들에게 강물처럼 흘러넘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주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알라.
바울 사도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다시 밝히고 있다. ‘전파하는 자, 사도, 이방인의 스승’이란 다양한 표현으로 자신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전파하는 자’란 고대 시대에 왕의 친서를 전달하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왕의 권위에 의하여 위임 받은 자가 왕의 중대한 선언문을 들고 상대 국가에 가서 전하는 자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복음 전파의 사명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도 한 국가의 통수권자가 친서를 써서 특사의 손에 들려서 상대편 국가를 방문하고 상대편 국가 원수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되 담대하여야 한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든 받아 들이지 않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는 이 사명은 거룩하고 존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렇지 않나. “나 자신은 언제 이 복음을 진리로 영접하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이 복음을 진리로 믿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하나님께 예배하며 믿음의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는가.” 뒤를 돌아보라. 지금 ‘나’라는 한 존재가 구원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믿고 영접하고 주를 경배하고 예배하며 섬기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구원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복음의 방해자요 핍박자였던 사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아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다시 선언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가 되었다.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고 존귀한 것인가. ‘이방인의 스승’이란 표현도 바울에게서는 이곳이 유일한 표현이다. 그렇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율법에 대하여 해박하고 능통하던 율법학자였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부활의 복음을 진리로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 복음을 이방에 가르치는 스승이 되게 하셨다. 주님이 이룩하신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하는 일이 다 다르고 분야와 전공과 업종이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의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구원을 받게 하는데 쓰임 받는 복음 전파자여야만 한다. 이런 은혜와 사명감이 불타 오르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