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아 들을지어다(시50:7-15) 2022. 8. 7
<표제어>에 보면 시편 50편은‘아삽의 시’라고 되어 있다.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막 중심의 찬양과 악기를 총괄하는 음악 책임자였다. 레위지파의 후손이다. 시편에는 아삽의 시 12편이 실려 있다. 그 중의 하나인 시편 50편은 올바른 예배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하여 교훈하는 지혜시이다.
7절에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라고 했는데 이를 말씀의 제목으로 삼았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형식을 띠고 있다. 시편 50편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5절에 보면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는 ‘성도’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때에 시내산 언약을 맺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신약 시대의 모든 열방 백성들 중에서 주를 믿는 자들을 일컫는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하고 계신가.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성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한 자들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성도들에게 하신 약속이시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하나님이 내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가. 내가 어렵고 병들고 환난을 겪고 인생의 풍파가 심해서 도저히 그분의 도우심을 덧입지 않고는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이 없을 때에 다급하니까 ‘주여 주여’하고 찾아 나서는 그런 상대이신가. 아니면 나의 전 인격, 나의 전 존재의 범사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나의 삶의 주인이신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신 말씀이 열 가지 계명 즉 십계명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명과 율례와 법도 가운데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분명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던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엘리야였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숭배자들 간의 영적 격돌 장면이 소상히 담겨 있다. 바알 숭배자들 450명은 아침부터 정오가 지나고 저녁소제를 드릴 시간이 다 되도록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목이 터져라 하고 불러 댔다. 이른 아침에 갈멜산 꼭대기에 나무 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송아지를 각을 떠서 얹어 놓고 종일 바알이 응답하기를 부르짖었다. 심지어는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에서 피가 나도록 상하게까지 하면서 애타게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저녁나절이 되자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 450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열두 돌을 가져오게 해서 단을 쌓았다. 그 둘레에 도랑을 깊게 팠다. 그 위에 나무 단을 마련하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았다. 열두 통의 물을 퍼다가 번제단과 나무 위에 흠뻑 부었다. 물이 번제단 사방에 판 도랑에 가득차게 고였다. 엘리야는 저녁소제 드리는 시간에 제단 앞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 내용에 보면 두 번 반복되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있다.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다. 그렇다. 신앙이란 주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백성인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신앙이다. 엘리야는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때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다.
그렇지 않나. 신앙생활이란 내게 필요하고 다급하면 ‘주여 주여’하고 내 삶이 평안하고 안녕하면 주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 맘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회 역사에 주기철, 손양원, 김익두, 고당 조만식,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응칠 안중근, 헤이그 열사 이준 등을 계속하여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은 그 시대의 분명한 하나님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다니엘서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을 보라.
다니엘 3장 18절에 보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분명한 신앙이 저들에게 있었다.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는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는 믿음 말이다. 하나님은 저들 세친구들을 풀무불 가운데서도 생명을 보존하셨다. 다니엘 3장 28절에 보면 이 현장을 목격한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하나님을 높혔다. 이 얼마나 놀라운 간증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방 나라인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입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지 않나.
맞다. 출애굽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요단을 홍해 건너듯이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여리고 성을 무너트린 하나님, 헤브론을 점령하게 하신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삽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이런 찬송이 계속하여 찬송되는 은혜와 간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으라.
14절에 보면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라고 교훈하였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라는 말이 무엇인가. 그 앞 부분에 있는 8-13절까지의 내용을 보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소나 양이나 염소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산 속의 그 많은 짐승들, 하늘의 그 많은 새들이 나의 것이거늘 “네게 내게 바치는 수소의 고기를 먹기 원하며 네가 나에게 바치는 염소의 피를 마시기 원하겠느냐”(시50:13)라고 질문하시고 계시다.
그렇지 않나.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일천번제를 드린들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제사란 곧 오늘날의 예배인데 예배자의 태도에 감사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그게 무슨 예배이겠는가. 감사로 제사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제사가 감사의 제사이다.
우리 나라 번안곡 중에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가 있다. 알라 푸가초바(Alla Pugatcheva) 라는 발트 3국 중의 한 나라인 라트비아의 여가수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Million Of Red Roses>를 우리말로 번안한 곳이다. 원래 가사의 내용과 우리말 가사는 많이 다르다. 원래는 공산 체제 소련의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Andrey A. Voznesensky, 1933-2010)의 시(詩)에 곡을 붙인 것이다.
“먼 옛날에 한 화가가 살았지
가진 것이라곤 작은 집과 캔버스 뿐
그 화가는 꽃을 몹시도 좋아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 때 그는 자기 집을 팔았지
그림도 팔고 집도 팔고
그 돈으로 바다 만큼이나 많은 꽃을 샀어
아침에 너는 창가에 서서 넋이 나가겠지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을 할거야
광장이 꽃으로 가득 차 있으니 ...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겠지
도대체 어떤 부자가 여기에 이 꽃을 갖다놨을까 ?
그런데 창문 아래에는 가난한 화가가
숨도 쉬지 못하고 서 있었다네
만남을 짧았고
밤 기차는 그 녀를 머나먼 곳으로 데려갔지
하지만 그녀의 삶에는 황홀한 장미의 노래가 있었다네
화가는 혼자 살았지
아주 불행하게 ...
하지만 그의 삶은 꽃으로 가득한 광장과 같았어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
창문에서, 창문에서, 창문에서 너는 보겠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
너를 위해 자신의 삶을 꽃으로 바꾼 것을”
세상의 사랑에도 이런 사랑의 있거늘 우리가 십자가에서 피를 쏱아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그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 마지 못해 드리는 예배, 불 성실한 예배, 드려도 그만이고 못 드려도 그만인 예배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가 무엇인가. 서원이란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다짐하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끊임이 없는 약속의 이행이다. 그러므로 서원은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즐겁고 감사하게 행하여야 맞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자에게서 감사도 떠나고 서원을 행하는 기쁨과 감격도 사라져 버린다면 그게 무슨 제사이고 그게 무슨 예배가 되겠나.
이사야서 1장에 보면 마음에 없는 형식적인 제사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면서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안타까워하신 말씀이 있다.
시편 50편 마지막 절인 23절을 보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이 여름, 감사로 제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지존하신 이에게 서원을 갚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예배를 회복하는 구원 받은 자의 감격이 있는 은혜의 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부르면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5절을 함께 읽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그렇다. 이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시다. “사람 살려”하고 소리를 치며 도움을 청하면 사람이라도 귀 기울이는 법이다. 시편 65편 2절에 보면 다윗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기도 응답에 대하여 분명하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58장 9절에 보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2장 23절 이하에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이 소개된다. 노예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탄식은 부르짖음으로 이어졌다.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저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저들을 돌보셨다. 그 내용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2:25)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부르짖어 간구하면 외면하지 않으시고 귀 기울여 들어 주시는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예수께서 여리고 성 가까이 가고 계셨다. 한 맹인이 길가에서 구걸하고 앉아 있었다. 무리가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 주었다. 그 때에 그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더 큰 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를 데려 오라고 하셨다. 가까이 온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가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기도가 무엇인가. 부르짖는 것이다. 더군다가 환란을 당할 때에 잠잠할 자가 있는가. 내가 지금 물에 빠졌는데, 내가 지금 불길에 휩싸였는데, 내 몸이 지금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주님께 부르짖지 않을 자가 그 누가 있겠는가. 내 마음이 곤고하고, 내 마음이 답답하고, 내 마음이 슬프고, 내 마음이 억울하고, 내 속이 몹시 상하고, 내가 괴롭고, 내가 죽을 지경인데 주께 눈물 흘리고 주께 하소연하고 주께 간구하지 않을 자가 그 누구인가.
그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그 어느 유명한 상담가를 만나러 가서 내 넋두리를 다 털어 놓아도 시원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하는가. 누구에게 아뢰어야 하는가.
<사랑합니다>라는 찬양으로 우리는 그렇게 찬양하지 않나.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 합니다. 내 삶을 다해”
주께 부르짖어 나를 감싸시고 위로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서 새 힘을 얻는 우리 각 사람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