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을 지키려면(시119:9-16) 2025. 4. 6
시편 119편은 시편 150편의 분량 중에서 그 길이가 가장 긴 시편이다. 무려 176절이다. 8절씩 22연으로 되어 있다. 구약 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의 22단어를 알파벳 순서의 첫 글자로 사용한 특별한 구조이다. 답관체시(踏冠體詩)라고 일컫는다. 누가 썼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는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이 곳, 시편 119편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려 12종류의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율법,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말씀, 법, 규례, 증거, 기사, 진리의 말씀”등의 표현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다. 물론 하나님을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하려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우스워 보일 수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을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을 조롱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시편 119편 51절에 보면,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실로 이 시편 119편은 기록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다 보니 주변에서 그를 무시하는 자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사업하는 거래처와의 관계에서든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면모가 주변의 불신자들에게 드러나면 “너만 예수 믿냐, 너만 유난 떨지 말아라, 예수 믿는다고 다냐”라면서 비아냥거리고 무사하고 조롱하는 경우를 왕왕 겪게 될 것이다.
어제 구파발역 지하도 입구에서 전도하는데 어느 대학교 남녀 학생들 이십여명이 광장에 모여 들었다.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같은 학교 이름이 잔등에 새겨진 패딩을 입고 있었다. 그 중에 어느 남학생은 참이슬 소주를 박스로 안고 끙끙거리며 에스커레이터를 빠져 나왔다. 아마도 어디에 팬션을 예약해 놓고 과 후배 신입생들을 초청해서 환영 파티라도 여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학교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일단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나면 왕따를 당하기 시작할 것이다. “야 나도 교회 다녀, 너만 교회 다니냐, 나도 예수 믿어, 너만 예수 믿냐”라면서 조롱과 무시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술 한 잔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의 정도로 구분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시시 때때로 폭풍과 거센 파도가 휘몰아 치는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시편 119편은 끝까지 읽으려면 20분 정도 결리는 분량이다. 단숨에 읽어 보면 “비방, 멸시, 고난, 교만, 조롱, 악인, 거짓, 원수, 올무, 박해”이런 표현들이 여기저기에 자주 눈에 띈다. 시편 기록자가 이 시편 119편을 기록하던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란 누구나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편 119편의 기록자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씨름하는 자신의 신앙을 반복해서 고백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2번째 연인 9절부터 읽었다. 그러나 1, 2절에 보면 “이런 자가 복이 있는 자다”라는 말씀을 두 차례 반복되고 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사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다. 시편 119편에 가장 자주 반복되는 표현 중에 하나가‘지키리이다’라는 고백이고, 또 하나가‘즐거워하리이다’라는 고백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오늘날 우리 각 사람 또한 주의 말씀을 지키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
전심으로 주를 찾고 주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오직 하나님만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심으로 주를 찾는 태도이다. 본문 10절에 보면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라고 하였다. 시편 119편에는 이미 2절에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되 전심으로 찾고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되 전심으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되 전심으로 의지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되 전심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따르되 전심으로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고 하였다.
인지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한 쪽은 돈 모양의 가짜 돈 뭉치를 세게 하였다. 다른 한쪽은 진짜 돈 다발을 세게 하였다. 얼마 후에 50도의 물에 두 손을 담그게 하였다. 가짜 돈을 세던 사람들은 몹시 뜨거워 하였는데 진짜 돈 다발을 세던 사람들은 “아이 따뜻하고 좋다”그런 반응이었다. 왜 그럴까. 돈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돈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바알이 따로 없다.
신명기 15장 4-6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하나님의 명령만 지켜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라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신명기는 모세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유언하듯 남겼다.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갈 후손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낱낱이 강조하였다. 그러나 결국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과 풍요의 땅에서 바알 우상 숭배 앞에 점점 무너져 갔다.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책망이 무엇인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안 믿는 것도 아닌 회색지대의 흐리멍덩한 신앙 상태를 꼭 집어서 지적하신 책망의 말씀이다. 세상을 너무나도 좋아한단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주의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주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여야 한다. 16절 말씀처럼 주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97절에 보니까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자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라고 하였다. 148절에 보니까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하였다. 164절에 보니까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불행해지는 것이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라고 찬송하지 않나. <나 주를 멀리 떠났다>라는 273장의 찬송가 1절이다.
어느 중학교 여학생이 가출을 하였다. 여러 날이 지났다. 춥고 배가 고팠다. 용기를 내서 어느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은 돌아온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해 주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였다. 목사님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이 여학생이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달 후에 그 여학생이 다시 그 교회 목사님을 찾아 왔다. “그래 아빠가 너를 반겨 주시더냐. 새 신을 신겨 주시더냐”“아뇨 새 신은 커녕 발바닥이 부르트게 얻어맞았습니다.”“그래 아버지가 가락지를 끼워 주시더냐” “아뇨 가지고 있던 지갑마져 뺏기고 말았습니다.” “그래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해 주시더냐”“아뇨 나를 잡아서 송아지 먹이로 주려고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기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시편 기록자는 전심으로 주를 찾고 주의 계명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것이 복된 길인 것을 깨달아 알았던 것이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바쁘고 분주하다고 할지라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된 인생인 것이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11절에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시편 기록자는 그래야 자신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할 것이란 자기 믿음, 자기 신념이 있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 청년 요셉의 여주인이 요셉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주인이 요셉에게 눈짓하며 동침하자고 요청하였다. 그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여주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치분덕거렸다. 결국 요셉에게 누명을 씌워서 감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가짐을 아셨고 요셉의 입의 말도 들으셨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택하여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삶을 살려고 씨름했던 요셉을 평생토록 존귀한 자로 붙들어 사용하셨다. 그와 동행하셨다.
주의 말씀인 성경책을 책꽂이에 꽂아 두고, 자동차의 뒷 좌석 가림대 위에 두고, 침대 머리맡에 두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핸드폰에 성경 앱을 깔아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한다. 주의 말씀을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만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평상시에 주의 말씀이 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복이 있는 자의 모습이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이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라고 하였다. 그래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바쁜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떻게 밤낮없이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라는 말인가. 밤낮 없이 성경책만 펼쳐 들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지 않나. 내 하루 하루의 매 순간마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내 판단과 결정과 모든 것의 바탕에 주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갈 때에라야만 요즘처럼 죄의 유혹이 많은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한 순간의 경솔한 판단이나 신중하지 못한 행실이 사회적으로 꽤나 이름이 알려진 유명 인사들의 생을 되돌이킬수 없는 인생의 낭떨어지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비보를 수시로 접하며 살지 않는가.
11절을 다 같이 읽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께 범죄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무엇일까.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감찰하신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매 순간마다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는”믿음의 사람다운 자기 성찰이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말씀을 지키는 길이며 그것이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44절을 보라.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
우리가 매 순간의 범죄의 유혹을 피하고 12절 말씀처럼 날마다 매 순간마다 주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간구는 주의 말씀을 배우려는 열망과 자세가 담겨 있는 고백이 아닌가. 13절에서는 “주의 말씀인 주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매 순간마다 주의 말씀을 배우려 하고 깨닫기를 원하고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하며 살아갈 때에 주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나의 삶을 선하고 바른길로 이끌어 갈 것이다.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야 한다.
신앙생활은 주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14-16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읊조리고 주의 말씀에 주의하고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겠다”라고 다짐하였다.
그렇다. 교회 생활이 즐겁고, 성도의 교제와 사귐이 즐겁고, 예배가 즐겁고, 찬송이 즐겁고, 기도 생활이 즐겁고,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이 즐겁고 봉사하고 서로를 섬기는 생활이 즐거워야 한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 앞에 은혜가 임해야 한다. 억지로는 안된다. 억지로는 못한다. 소나 말을 맑은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그 물을 마시는 것은 소나 말 그 자신의 선택이다.
시편 119편의 기록자는 주의 말씀의 즐거움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72절에 보니까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라고 하였다. 77절에도 보니까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다”라고 하였다. 97절에 보니까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하였다. 103절에 보니까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하였다. 111절에 보니까 “주의 증거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127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였다. 131절에 보니까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함으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하였다. 162절에 보니까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광수 생각>이라는 시리즈의 네 컷짜리 만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광수 생각이란 만화는 1997년도에 3년 8개월 동안 날마다 일간 신문에 연재되던 만화이다. 나중에 연극 무대에도 올려 진 적이 있다.
대기업의 젊은 과장이 세상을 떠났다. 회사의 많은 사람이 조문을 왔다.
“과장님은 바나나 우유를 참 좋아하셨는데요.”조문객들 마다 똑 같은 조문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만화는 끝난다. 무슨 얘기를 담고 있는 만화인가. 자신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평생 돈돈돈 하며 살더니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을걸 어째서 그렇게 돈돈돈 하다가 죽고 말았는가.” 이런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평생 내 입에 단 것만 찾아서 먹고 마시고 내 얼굴 고치고 내 몸 하나 단장하는데 전념하고 나 좋아하는 것만 부지런히 챙기다가 눈을 감으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겠는가.
24절에 보면,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라고 하였다. 35절도 보니까,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 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40절에는 주의 법도의 말씀을 사모(思慕)한다고 했고 42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의지(依支)한다고 하였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이란 285장 찬송가를 보라.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날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이런 찬송이 말씀 안에서 늘 고백되는 각 사람의 찬송 생활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