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미6:6-8) 2023. 1. 29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올해 99살이다. 내년 10월이면 100세이다. 1924년생 동갑이었던 죠지 워커 부시( George Herbert Walker Bush, 1924-2018) 대통령은 지난 2018년에 9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1976년,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지미 카터(Jimmy Carte, 1924.10.1.∼)는 그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공화당의 리처드 포드와의 선거에서 이겨서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 취임 연설 중에 구약 성경, 미가서 6장 8절을 인용하였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기에 보면 ‘정의, 인자, 겸손’이 강조된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이 세 가지라는 말씀이시다. 미가는 ‘미카야후’라는 이름의 준말이다.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난 주일에 묵상한 이사야서의 기록자인 이사야 선지자의 활동 기간이 60년이라고 했는데 미가 선지자 역시 그 활동 기간이 자그마치 60년에 이른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야 등의 선지자들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1장 1절에 보면, 남 유다의 제 11-13대 임금이었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의 선지자였다. 요담은 유다의 제 10대 왕 웃시야가 죽자 대를 이은 아들이다. 모레넷 사람이라고 했다. 모레넷은 예루살렘에서 40km 서남쪽에 위치한 매우 작은 시골 마을이다. 부모나 조상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매우 평범한 가정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7장 분량의 길지 않은 예언의 내용 중에 양을 치는 목자에 생활 습관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선지자 미가는 목동 출신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미가서는 크게 세 번의 설교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으로 읽은 미가서 6장은 그의 마지막 설교의 일부이다. 각 설교는‘들으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1장 2절에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3장 1절에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라고 했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6장이 세 번째 설교의 시작인데 1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개인이든지 민족이든지 그 시대의 타락의 시작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있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들어 알고 있다고 하여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물로 드리거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허물과 죄 사함을 원하여 장남을 비롯한 자식을 제물로 바칠지라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 그 자체이다. 시편 51편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라고 하였다. 이사야 1장 11절에 보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새 삶의 변화가 없다면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라고 질문하셨다.
미가 선지자는 남유다의 11대 임금인 요담 왕 통치 말기은 주전 735년부터 선지지 활동을 하였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이다. “여호와께서 네가 구하시는 것 세 가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나.
정의(正義)를 행하며.
6절과 7절의 말씀은 제사가 필요 없고, 예배가 필요 없다는 강조가 아니다. 제사가 소중하고 예배가 필요하지만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실천을 강조하신 말씀이시다. 예전에 오래도록 보던 <개역한글>성경에는 ‘공의를 행하며’라고 되어 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옳은 일을 행하며”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본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행실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공의, 정의, 옳은 일’이란 생각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 이어지는 실천 덕목이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마무레 상수리 나무 숲에 머물던 당시의 일화가 실려 있다. 날이 뜨거운데 한 낮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아브라함은 장막으로 모셔 들이고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기름지게 잘 자라고 있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면서 급히 요리하도록 하였다. 엉긴 젖과 신선한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상수리 나무 그늘 아래 차려 놓고 세 나그네를 대접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곁에 보낸 천사들이었다. 정성스런 대접을 받은 저들 세 천사는 “일년 후에 네 가정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축복하였다. 장막 뒤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 사라는 웃었다. 그 때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런 대화 후에 세 사람의 천사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돔을 향하여 떠났다. 아브라함은 저들을 전송하려 할 때에 하나님이 계속하여 다시 말씀하셨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보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여호와의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불의가 없으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인생들에게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스가랴 8장 8절에 보면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선언하셨다. 불의를 행하는 나라와 불의를 행하는 민족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다. 이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나라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아모스서 5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아모스 5장 15절에 보니까 하나님은“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라고 엄히 말씀하셨다. 아모스 5장 24절에도 보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강조하셨다. 이러한 강조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아모스 5장 4절과 7절에 보니까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반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생활인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성도의 삶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역대하 31장 20-21절에 보니까 남 유다의 제 13대 임금 히스기야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 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라고 하였다. 역대하 14장 2정에 보면“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라고 하였다.
오늘날 이 시대의 위기는 무엇인가. 선과 정의의 기준이 무너지고 정당 논리와 진영 논리에 가려서 선의 기준, 정의의 기준이 혼미해져만 가고 있다. 목소리가 크고 강하면 선이고 정의인 것처럼 착각하는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다수가 목소리를 키우고, 많은 사람이 촛불을 치켜 들면 정의인양 착각하는 시대 속에 휩싸여 돌아가고 있다.
여러 해 전에 우리나라에도 자주 언급되던 책 중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미국 허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황을 예로 다룬다. 그 내용 중에는 자유, 도덕, 윤리, 정의를 주제로 한 수 없이 많은 사회 문제와 일상적인 상황들을 거론하며 정의의 문제를 풀어간다.
좀 딱딱할 수 있지만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마이클 샌델은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쉬운 예를 든다. 만약 한 어린이가 사탕을 사러 동네의 어느 가게에 왔다고 치자. 아이는 백원 짜리 사탕을 들고 와서 계산해 달라고 한다. 여기서 가게 주인은 아이가 너무 어려 오백원에 팔아도 전혀 눈치를 못챌 거라는 생각이 살짝 든다. 하지만 잠깐의 유혹을 참고 원래 가격인 백원에 사탕을 팔았다. 이 경우 가게 주인은 도덕적이었을까? 역시나 칸트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순수한 도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게 주인이 유혹을 참고 원래 가격인 백원에 판 이유를 상상해 보자. 만약에 오백원에 팔았다면 혹시나 그 아이의 부모가 이를 알게 되어서 문제를 삼고, 마을 사람들은 가게가 아이에게 사기를 쳤다고 소문을 낼 것이다. 그런 나중이 두렵다는생각에서 원래 가격인 백원에 팔았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본인의 이익에 따라 도덕적 행동을 선택했기에 ‘순수한 도덕'이라고 할 수 없다.
직장, 사업, 상업 등 사회생활 전반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경 본문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와 결정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정의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신다. 미가서 3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들과 통치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 뒤에 섬뜩하고 끔찍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고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선을 행하고 정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여기 인자라는 말은‘헤쎄드’라는 단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와 인자와 자비와 사랑을 통칭하는 말씀이다. 이는 마치도 마음씨가 넉넉한 어른이 아랫 사람에게 진심을 담아서 베푸는 모든 친절과 자비를 일컫는다. 미가 6장 8절의 ‘인자’라는 단어가 구약의 하나님을 통칭하는 단어라면 신약에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사랑’즉 ‘아가페’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라면 미가서 6장 8절에서 말씀하는 ‘인자’란 ‘헤세드’가 그런 단어요 그런 의미요 그런 말씀이시다. 정의와 인자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두 단어이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자가 풍성하신 ‘헤세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헤세드’ 즉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와 인애와 사랑하심은 끊임이 없으시다.”그래서 죄 범한 인생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사랑 받고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이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을 멸망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두 천사를 소돔 성에 보내셔서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을 구출하려 하신다. 그 장면을 설명하는 창세기 19장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자비’가 오늘 미가서 6장 8절에 나오는 ‘인자’이다. 이미 그 앞 장면에 보면 롯의 두 사위들은 두 천사의 말을 전달한 장인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인애와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인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인자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면서 존귀하게 쓰임 받은 인물이 느헤미야이다. 52일만에 꿈처럼 예루살렘 성곽을 중건한 후에 학사 에스라를 앞 장 세운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다. 율법책이 낭독되기를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면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여기 저기서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고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느헤미야는 이는 여호와의 거룩한 날 성일이니 슬퍼하거나 근심하거나 울지만 말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의 너희의 힘이니라.”(느8:10)라고 격려하였다. 온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켰다. 백성들은 처처에 초막을 지었다. 날마다 율법책을 낭독하였다. 여덟째 날에는 규례를 따라서 성회로 모였다. 그 스무나흩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같이 모여서 금식하였다.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였다. 저들은 다 같이 목소리를 높여서 부르짖고 여호와를 송축하였다. 그 긴긴 내용에 보면 느헤미야 9장 17절에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나오는 ‘인자가 풍부하시므로’라는 말씀이 오늘 미가 6장 8절에 소개된 ‘인자를 사랑하며’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시다. 그렇다. 인자가 풍부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이방신을 섬기며 타락해 가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시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그렇다. 맞다.“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교훈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무엇인가.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느 날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말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반문하셨다. 그 때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율법교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제사장도 그 현장을 보그는 피하여 그냥 지나갔고 레위인도 보고는 피하여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그 길로 여행 중이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정성스럽게 싸매어 주었다.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을 찾아 갔다. 밤새도록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값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부탁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분부하셨다.
여기 율법교사가 대답한 ‘자비’라는 단어가 미가서 6장 8절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인자를 사랑하라”는 같은 단어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인자는 생각에 갇혀 있는 단어가 아니다. 실천을 명령하시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이 찾고 구하시는 선한 인생이란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여 실천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지난 해 성서 주일에 헌금한 기드온 성경 보내기 헌금을 협회에 보냈더니 편지가 왔다. 우리가 보낸 헌금으로 500권이 넘는 성경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손길들이 모여서 우리 나라 말과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성경이 제작되고 수 천만권 수 억권의 성경에 계속하여 누군가의 손에 들려 읽혀지고 누군가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양날 선 검과 같이 은혜로 임한다고 상상하여 보라. 우리가 속한 서울 연회에서 시행한 성탄절 사랑의 푸드언박스 운동으로 1억 8,620만원의 기금이 모금되었다고 한다. 나의 작은 정성, 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여서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 선물로 사랑의 마음이 담겨 1,000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올 한해 그리고 평생토록 자자손손 이와 같은 인자와 자비의 실천이 계속하여 이어질 수 있기를 축원한다.
겸손(謙遜)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이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예수는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인류 구원을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미가서에는 미가 선지자를 통한 책망의 말씀이 이어진다. 미가서 3장 9-12절에 보니까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라고 경고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가의 입을 통해서 미가 6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라고 분부하시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이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창세기 18장 2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소돔과 고모라 성민들을 멸망시키지 마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나 재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서로 간에 겸손하게 대하여야 할 것을 권면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라고 분부하였다. 야고보서 4장 10절에 보니까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교훈해 주었다. 우리 속담에 “잘 익은 이삭이 고개를 숙인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반대로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나. 빌립보서 2장 3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다.
사사기 8장 1-3절에 보면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을 물리친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지파가 나서서 시비를 건 적이 있었다. “왜 미디안과의 전쟁에 에브라임 지파에게 참전 기회를 주지 않았느냐”는 시비였다. 이러한 시비는 그냥 말의 시비가 아니라 큰 다툼이 되었다. 그러나 기드온은 겸손하게 이 모든 다툼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혔다. 이러한 다툼의 배경은 므낫세 지파 출신인 기드온을 향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시기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아시는 대로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들로 형성된 지파였다. 야곱은 눈을 감기 전에 두 손을 어긋 맞추어 얹고 축복하였다. 그러한 사연을 전해 들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의 후손들은 두고두고 늘 서로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 그런 심정으로 크게 다투려고 달려드는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 앞에서 기드온은 침착하게 사태를 진정시키고 겸손하게 응대하였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결국 기드온의 겸손한 태도와 마음씨는 사납게 달려 들어 크게 다투려 하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봄 눈 녹듯이 가라앉게 하였다. 벌써 이렇게 1월을 다 보내고 새 달 2월을 맞이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