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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고린도 선교(행18:1-11)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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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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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7-15 06:31 조회 1,241 댓글 0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선교(행18:1-11)        2024. 7. 14

 

 

사도행전 16-17장에 기록된 네압볼리,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으로 이어진 사도 바울의 선교는 고린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 고린도는 로마, 에베소와 함께 3대 도시에 속하는 큰 도시였다. 70여만 명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운하가 개통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에게해와 이오니아 해가 육지로 나뉘어 있었다. 에게해 쪽에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고 이오니아 쪽에는 레케움 항구가 있었다. 고린도 운하가 개통되지 전에는 무려 700km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해안선을 따라서 한 바퀴 도는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역사적으로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배를 육지 위로 끌어 올려서 둥근 밀대 위에 얹어서 여러 마리의 소들이 끌고 사람이 미는 방법으로 육로로 해운을 연결하였다. 그 길이가 6.3km였다. 엄청난 노예가 동원되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식당, 음식점, 술집 등 상권이 발전하였다. 자연히 고린도라는 도시는 경제가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과 돈이 모여 들었다.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로마 시대에 노예와 유대인 6000여명을 동원하여 운하 공사를 시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81년부터 1893년까지 12년 동안에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대형 선박 외의 제한된 규모의 선박들이 이용하기에 적당한 길이 물길이 열린 것이다 

 

고린도는 격년마다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렸다. 요즘의 올림픽은 4년마다 열지만 그 때는 한 해 걸러서 열렸다. 이래 저래 고린도는 부유한 도시였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로티테 신전이 있었다. 뱃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빌었다. 그 곳에는 여성 사제가 1,000명이 넘었다. 어떤 사료에 보면 수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사제들은 제사 후에 몸을 팔았다. 제사 드리러 오는 이들과 잠자리를 같이했다. 고린도는 이처럼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음란하고 방탕한 도시였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탐방팀 일행이 고린도에 도착한 날은 출발한 지 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선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묵상하는 중에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 빌립보에 누가를 남겨 두고 왔다.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남겨 두었다. 복음이 전파된 그 곳에 복음이 더 잘 자리 잡기를 바라며 남아 있는 사역을 연이어 잘 감당해 주기를 바라는 소원 때문이었다. 

 

홀로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을 기다리는 부부가 있었다.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였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고 그의 아내는 로마 사람이다. 로마 명문 귀족 브리스가 가문 출신이다. 그 당시의 귀족들의 타락한 일상 생활에 실망한 그는 비롯 신분이 노예로 끌려 왔다가 풀려난 아굴라이지만 그의 성품과 신앙에 매료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아굴라와 결혼한 것이 분명하다. 

 

본도는 튀르키예 북부 흑해 주변에 있는 지명이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쓰고 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하던 당시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 간에 갈등과 분쟁이 계속되었다.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황제는 유대인들을 모조리 로마에서 추방시켰다. 누군가를 통해서 예수를 영접한 유대인인 아굴라는 로마 사람인 예수를 함께 믿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에까지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저들 부부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천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던 사도 바울은 자연스럽게 저들 부부와 가까워 지게 되었다. 홀몸이었던 사도 바울은 아예 저들 부부의 집에 함께 살면서 천막 만드는 일로 얼마의 수입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안식일마다 사도 바울은 회당을 찾아 가서 강론하였다. 예수의 부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 곳에는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헬라인이 함께 모여 예배하고 있었다. 

 

계속하여 낯설은 도시를  찾아 가며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이 홀로 찾아 나선 고린도에서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였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위하여 한 해 먼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고린도에 보내 놓으셨던 것이다. 아는 사람 한 사람도 없던 낯 설은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천막 만드는 같은 기술을 가진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이 축복의 시작이었다. 아예 저들 부부의 집에 함께 머물며 천막을 만들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던 곳에서 숙식이 해결된 것이다. 마침 저들 부부는 사도 바울을 만나기 전에 누군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만난 저들 세 사람의 만남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3-5)

 

맞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평생토록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쓰임 받았다. 저들 부부는 사도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목이라도 내어 놓을 정도의 끈끈한 동역자의 관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자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저들 부부에게 감사한다고 하였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집이 곧 교회였다. 

 

사도 바울의 순교 이전에 남긴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다시 또 저들 부부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처럼 고린도 선교 초기에 만난 저들 부부는 사도 바울이 주님 앞으로 돌아가기까지 그의 곁을 지키던 복음의 동지들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8장 26절에 보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언변에 능하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를 만났다. 아볼로는 주의 도를 배워서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하게 가르치며 다니던 자였다. 그러나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의 물 세례에 머물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 부부는 아볼로를 찾아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과 성령 세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후로 아볼로는 더욱 더 예수 부활 복음 전파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우리 각 사람이 서로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며 복음 동지의 끈끈한 우정과 사랑과 믿음과 신뢰를 평생토록 영원히 이어 나가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도 함께 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바울 사도.

사도 바울은 낯설은 선교지를 찾아 나설 때에 그를 반기고 환영하고 동역하려는 이들만을 만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도 바울의 예수 부활 복음 전파를 대적하고 비방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사도 바울을 위협하는 것은 이방사람들인 헬라인이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동족 유대인들이 정작은 그 복음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조직적으로 대적하고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여기 ‘대적하다’라는 표현은 전쟁 용어이다. 적군과 싸우기 위해서 전열을 정비한다는 의미이다. 그냥 한 두 사람이 대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똘똘 뭉쳐서 집단적으로 사도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한 것이다. 한 두 번 비방하고 만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가 불가능하도록 괴멸하려고 달려 든 것이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사도 바울이 옷을 털었겠는가. 옷을 턴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는 고대로부터 “엄숙한 맹세나 극심한 저주를 선포할 때” 나타내는 동작이었다. 우리 문화에도 “아휴 재수 없어. 옴 붙을라”라고 상대방을 냉소적으로 쏘아 붙이며 옷깃을 터는 동작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너희들이 동족이지만 이렇게도 복음을 거역하고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다시는 더 이상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을 한 것이다. 사도행전 13장 51절에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박해하고 쫓아 내었다. 그 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떠났다.”

 

예수께서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상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눅9:5)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박해하고 대적하며 비방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18;6)라고 단호한 입장을 전달하였다. 

 

맞다. 복음 전파는 구걸이 아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죄 값으로 죽은 인생에게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길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자의 부르심과 사명감이 분명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낯설은 도시 고린도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누가복음 4장 31절 이하에 보면 하루는 예수께서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 가셨다. 안식일을 맞아서 가르치셨다. 가버나움 동네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예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그 때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꾸짖시며 말씀하셨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서 넘어 뜨리고 나갔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 다 놀라서 말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그 일 후에 예수의 소문은 점점 그 근처 사방에 퍼져 나갔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생활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계속 의지하는 생활이다.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에 빠져서 사탄의 지배를 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충만으로 거하셔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밤이나 낮이나 성안에서나 들판에서나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는 늘 하나님이 충만하신 충만으로 내 안에 가하셔야 한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말씀의 충만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야 한다. 알콜 중독자는 술에서 깨어 나기 전에 또 술을 마신다. 계속하여 술을 마신다. 흡연 중독자들도 잠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하여 담배를 피고 또 핀다. 이는 마약 중독도 마찬가지다. 마약 중독자는 노인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노인이 되기 전에 마약으로 다 죽기 때문이라고 한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5장 3절에 보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삶”이란 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나의 삶의 지배자로 주님을 모셔 들이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대적하고 비방하는 유대인들 사이에 디도 유스도라는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웃을 만나게 하셨다. 디도 유스도는 동족들로부터 대적 받고 비방 받는 사도 바울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디도 유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지고 있다. 동족들은 대적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있던 이방 사람에게 예수의 부활 복음이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의 그의 집이 고린도 교회의 시작이 되게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회당장 그리스보로 하여금 온 집안이 다 같이 더불어 예수를 영접하게 하셨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나서서 조직적으로 사도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은 아예 회당장을 변화시키고 그의 가족이 모두 다 예수를 영접하게 하셨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대적하고 비방하였지만 하나님은  수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 복음을 영접하고 믿고 세례를 받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 보면,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와 외에는 너희 중에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또 한 사람‘가이오’가 ‘디도 유스도’이다. 디도 유스도와 그리스보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 초기 선교에 주신 큰 열매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힐 때에 모세는 역사적인 인물로 쓰임 받았다. 우리가 아는 사무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엘리야, 엘리사, 세례 요한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맛디아로 충원된 예수의 열두 제자, 사도 바울과 그 곁의 동역자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이는 기독교 이천 년 역사가 증언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길 간구하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우리 각 사람이 내 안에 가득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증거가 간증으로 계속되길 소망한다. 

 

 

환상 가운데 말씀하신 주의 말씀.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침묵하지 말아라

담대하게 말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게 할 것이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

 

이와 같은 주의 말씀을 환상 중에 듣게 된 사도 바울은 힘을 얻어 일년 반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바울의 세 차례의 전도 여정 중에 에베소 교회 삼년 말고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며 선교하는 동안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다. 그렇게 대적하고 비방하는 유대인들의 훼방이 극심한 중에서도 고린도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져 나갔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에 보낸 첫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렇다. 고린도 교회를 비롯하여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믿는 자가 탄생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바울은 몸이 허약하였다. 눈도 않 좋았다. 간질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병 낫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는 대답 뿐이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순교하기까지 연약한 몸으로 살았다. 하나님은 그를 약한 중에서 위대한 이방 복음 전도자로 붙잡아 쓰셨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기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그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사도 바울은 다시 선포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그렇다. 바울은 “몸은 언제나 약했고 말도 시원하지 않았다.”(고후10:10) 그래서 편지로만 바울을 상상하던 이들은 실물을 만난 후에 실망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그런 약한 면들을 주의 권능의 손으로 붙들어 사용하셨다. 

 

언제나 바울 자신은 자신의 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맞다. 바울 자신도 주변에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두려움도 있었고 심히 떨 정도로 약한 모습도 있었다. 그의 말은 늘 어눌했고 말이 시원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그런 사도 바울의 약함을 사용하셨다. 그를 평생 존귀하게 붙잡아 쓰셨다. 

 

오늘날, 나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는 핑계의 감옥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의지하자.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자.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두려워 하지 말아라. 침묵하지 말아라. 담대하게 말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게 할 것이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다.”주님이 우리 각 사람과 우리 공동체 가운데 영원히 함께 계시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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