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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시107:1-9) 20240707 맥추감사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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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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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7-08 06:54 조회 1,306 댓글 0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07:1-9)            2024. 7. 7 맥추감사주일

 

시편 107편은 누가 쓴 시편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BC586-538)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슬픔 속에 지내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선조의 땅에 되돌아가게 되었다. 시편 107편은 예루살렘 규환을 경험한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을 찬송한 내용인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107편의 시작이 무엇인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인간의 노력이나 지혜로 풀려 날 수 없었던 것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바사의 고레스 임금이 어명을 선포하였다. 고레스는 서양사에서 시루스(Cyrus the Great, 재위 B.C 559-530)라고 불려지는 페르시아의 초대 임금이다. 그는 바벨론과 메대 제국을 점령하고 페르시아를 건국한 초대 임금이다. 에스라 1장 1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 해가 바벨론 포로들이 이스라엘 땅에 되 돌아갈 수 있는 조서를 공포한 주전 538년이다. 바사 제국을 건국한 고레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동을 입고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들은 모두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공포하였다. 온 나라마다 공포하고 조서를 내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1:3)

 

이는 사람의 생각이나 결정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기적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가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이 기적인 것처럼 말이다.

 

오늘 다 읽지 못한 시편 107편의 8,  15, 21, 31절에 보면 4번 반복되는 구절을 관찰하게 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맞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 아니었더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포로로 지내며 자식을 낳고 포로 신세로 대를 이어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 결박에서 풀려 나서 다시 선조들의 땅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되돌아 갈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이란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고래스 임금에게 감동을 주신 하나님은 그의 조서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물자를 모두 다 준비해 가지고 돌아가라는 명령도 덧붙어 공포하였다.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스1:4)

 

이런 은혜와 감격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군가가 시편 107편과 같은 은혜로운 찬송과 감사의 시편을 기록한 것이다. 오늘 맥추 감사 주일을 맞은 우리가 묵상할 본문 말씀이 은혜가 되길 바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과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그 구체적인 감사의 내용이 무엇인가.  

 

 

속량(贖良)하시는 하나님.

2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량하셨다고 하였다. 늘 말씀 나누지만 ‘속량’이란 노예의 값을 치루고 자유인이 되게 해 주는 값을 속량이라고 한다. 새번역 성경이나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 보면 속량을 구원이라고 번역하였다. 맞다. 속량이란 구원 받는 것을 뜻한다. 생각하여 보라. 새는 창공을 훨훨 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새를 잡아서 새장에 가두어 두고 모이를 주는 것으로 제한한다면 그 새가 평화를 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이 창조된 광활한 공간에서 살아가도록 지으셨다. 물론 하늘과 물 속에도 생태계의 약육강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면 질문하게 된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바벨론 포로가 되었는가”성경은 분명하게 그 대답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한 죄의 값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찬송하고 하나님만 경배하고 하나님만 따르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의 중심에 세움 받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시시 때때로 떠났다. 어떤 때에는 돌을 들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 들기도 하였다. 날마다 만나와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종살이하던 애굽에서의 생활을 그리워 하기도 하였다. 그런 저들을 모세의 대를 이은 여호수아의 때에 요단강을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진멸하게 하셨다. 분배받은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절히 누리며 살게 하셨다. 그런 저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주변의 이웃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하였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을 끝으로 나라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 이유와 원인은 우상숭배와 불신앙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며 북 왕국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다. 북왕국의 멸망을 목격한 남 유다 백성들인데도 정신 차리지 않고 여전히 우상 숭배를 즐겨 하며 하나님을 떠나 살던 중에 주전 586년에 남유다마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나라의 젊은이들과 유능한 자들이 모조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이 그런 격동기에 바벨론에 포로롤 끌려 갔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러한 시대에 믿음을 지키며 살려고 씨름하던 자들이었다. 

 

이웃 집에 불이 나면 그 집만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모든 이웃들이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되고 만다. 그처럼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섬기는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자가 썪기 시작하면 그 주변 감자들이 악취와 함께 더불어 썪어 들어가는 것처럼 신앙 생활이란 것도 변질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게 변질되는 것이다. 

 

변화는 좋고 필요하고 귀한 것이지만 변질은 위험한 것이다. 우상숭배로 인한 영적 타락과 육체의 쾌락을 따라 치닫는 세속화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피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고난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었다. 그런 저들은 3절 말씀처럼 ‘동서남북 각 자방으로’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하나님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던 땅에서 불러 모으셨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귀환이다. 감격스러운 순간, 놀라운 순간, 기적의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을 시편 기자는 시편 107편 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속량하셨다”라고 찬송한 것이다. 

 

인생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값을 치루게 마련이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는 두려운 마음에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바벨론 포로 시대의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라고 하였다. 광야나 사막 길에서 방황하고 어디 마땅히 거할 곳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마르고 심신이 피곤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치도 엄마의 품 안에서 쌔근 쌔근 잠 자고 있는 어린 아기처럼 평화와 안식을 누리길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처럼 주님 안에서 진정한 위로와 안식과 평화를 누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의 참 복락을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고통 중에서 건지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포로의 땅에 끌려가서 흩어져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난과 고통의 땅에서 매 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병약해 지면 건강하게 지낼 때와 다름 마음 가짐을 갖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자세가 달라지게 된다. 사람이 누구라도 옥에 갇히게 되면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겸손하게 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땅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고 나니까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 왔던 날들이 절절이 생각 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에 예루살렘에 살던 집이 없었나. 가족이 없었나. 성 밖에서 조들이 키우던 양과 염소가 없었나. 그 많던 포도 나무, 무화과 나무, 감람 나무 밭을 다 버려 두고 포로 신세로 끌려 가야 했다.

 

요즘 우리가 열왕기하를 묵상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인 25장에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질문하여 보라. 남북 왕조에 선지자가 없었나.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 없었나. 아니다. 그러면 왜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왕국 유다에 바벨론이 쳐들어 왔나. 왜 남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성민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가야만 했나.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짝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 낙에 사로 잡혔던 언약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이다. 

 

남 유대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이다.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치러 올라 왔다. 2년이 넘도록 토성을 쌓은 바벨론의 군대에 예루살렘은 고립되고 말았다. 드디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기근이 극심해 졌다. 시드기야 왕은 밤 중에 무너진 성벽 틈 사이로 도망쳤다. 바벨론 군대가 뒤 좇았고 여리고 평지에서 시드기야 왕이 사로 잡혔다. 바벨론 군대는 남 유다의 사로 잡힌 시드기야 왕을 립나에 있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갔다. 느브갓네살은 시드기야 왕을 심문하였다. 저들은 시드기야 왕이 보는 앞에서 왕자들을 죽였다. 급기야는 시드기야 왕의 눈을 뺏다. 놋 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을 끌고 갔다. 참담한 유다의 멸망의 장면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거두어 지면 인간은 누구라도 허탄해 지고 만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누구라도 참담해지고 만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가 떠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면 않된다. 교만하면 안된다. 어리석게 생각하고 살아가면 안된다. 세월이 흐르며 바벨론의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모조리 불 살랐다. 여호와를 섬기던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을 모두 다 불태워 버렸다. 예루살렘 안의 고관 대작들이 살던 좋은 집들을 모조리 불 살라 버렸다.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던 성벽도 헐어 버렸다. 젊은이와 유능한 자들을 모조리 포로로 끌어 가 버렸다. 열왕기하 25장 12절에 보니까 “그 땅의 비천한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다.”비천한 자들을 남겨 두어 농사 짓게 하고 수확철이 되면 그 수확을 모조리 빼앗아 갔다. 

 

6-7절에 보니까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급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하였다. 고난과 고통과 금심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그 누구나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인간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 같아도 막상 어려움을 겪게 되면 누구나 다 거기서 거기다. 인간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출애굽이 하나님의 은혜이지 모세나 아론의 전략이나 지혜의 결과가 아니지 않나. 여리고 성을 함락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지 군대의 힘이 아니지 않나. 다윗이 잘나고 유능해서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었는가. 물론 다윗에게 남다른 능력 남다른 역량과 됨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붙들어 그의 한 평생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누리고 덧입은 인생이 아니었나.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선하시고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주께 부르짖으면 들으신다. 고통 중에서 전져 주신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  주의 품에 안아 주신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가난하고 못 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 그런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부강하고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정치 빼고는 다 잘하는 민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7년 7월 7일에 경부고속도로 416.2km가 개통된 후 47년 동안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교통망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개나라 봇짐을 이고 지고 산허리를 넘던 얘기는 멀고 먼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서울 양양 고속도로에만도 63개의 터널이 있다. 그 중에서 인제양양터널은 길이가 10,965m에 이른다. 우리나라 전국의 고속도로 터널 중에서 가장 긴 터널이다. 우리라는 자동차, 조선,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온 백성이 정신을 차리고 탐심과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복음 한국이 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은 굽은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7절을 다시 보라.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거하게 하셨도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회복의 은총을누리고 간증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뿐만 아니라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시다.”그렇지 않나.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이 좋은 것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고 마련해 주고 구해 주는 것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예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비가 있겠느냐.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아비가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매였다. 사랑의 채찍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민족이 버림을 받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뉘우치고 깨닫고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민족으로 번성하길 원하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열왕기하 25장에 보면 마지막 네 구절이 그런 희망을 말씀하고 있다. 27-30절에 보면 “유다의 왕 야호야긴이 사로 잡혀 간지  삼십칠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말씀으로 열왕기 상하의 긴긴 역사 기록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내용인가. 남유다 제 19대 왕 여호야긴이다. BC 598년, 18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다. 37년을 구금 상태에서 지내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왕의 대를 이은 에윌므로닥 왕 원년에 그에게 자유를 선물해 주셨다. 포로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관대한 사면 정책을 펼친 것이다. 물론 풀려난 여호야긴 왕은 다시 고국에 돌아갈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방 땅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때가 되어 저의 후세들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에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은혜의 날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렇다. 영원한 선과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회개하고 진정으로 주께 돌아오길 원하는 각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생각하여 보라. 예수의 우편 십자가에 달렸던 자는 살인한 강도였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고 주께 간청하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예수 우편의 강도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천국 입성의 축복을 받았다. 그의 과거가 무엇인가. 사람을 죽인 살인마이다.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된 강도이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임한 것이다. 구원은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스스로 죄에서 자신을 구원할 자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송하여야 하는 것이다.

 

시편 107편 10-11절에 보면,“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그 어느 누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는 것을 원하겠나.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는 자들”이 겪는 고난의 날들이 그러하다고 경고하지 않나.

 

그러므로 진심으로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예배자의 삶을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시편 107편 15절은 고백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어다”그렇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감사하며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예배자의 삶이 평생토록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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