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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그의 생각(요일3:16-24)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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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4-21 12:17 조회 1,940 댓글 0
 
                          그의 사랑(요일서3:16-24)           2024. 4. 21


1709년 2월 9일, 영국 엡윗의 목사관에 불이 났다. 5살이던 존 웨슬리는 2층 창문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 와서 불을 꺼 보려했다. 한 장정의 어깨에 또 다른 장정이 무등을 타고 창가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존 웨슬리에게 “뛰어 내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이미 저쪽 맞은편에서는 불에 탄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 수산나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해서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라고 아들 존의 별명을 붙여 불렀다. 그 아들이 장성하여 오늘 날 세계에 7000만명의 감리교회를 탄생시킨 감리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다. 

80억이 넘는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감사한 일이며 축복 중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된다. 요한 사도의 요한일서의 강조는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계속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 사귐의 바탕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귀며 살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면서 어둠에 행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주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자는 항상 죄를 고백하는 자백(自白)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불의에서 떠나 성도의 순결한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밤낮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님의 말씀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대언자이시다. 또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 지난 주일에 요한일서 1장을 대하고 오늘 3장을 대하고 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에 보면 12절 이하에서,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아이들아...그리고 다시 아비들아, 청년들아”라는 강조를 통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요일서2:15)라고 교훈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교훈한 그 유명한 요절과 같이 기억하는 말씀이 요한일서 2장 16절에 나온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이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서2:16)

그리고 요한 사도가 경계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와 적 그리스도’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성도라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고 적 그리스도를 대적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목숨을 버리신 사랑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기독교를 한마디 말로 정의하면 ‘사랑’이다. 성경 66권을 한 단어로 정의하면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인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 수직적인 사랑이 17절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수평적인 사랑은 23절의‘서로 사랑’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아니다.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의 편지인 ‘야고보서’의 강조가 바로 그러하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요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빛, 사랑, 생명”과 같은 단어들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왜일까.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나. 



목숨을 버리신 사랑.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곡을 붙여 찬양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라는 말씀이다. 불순종하고 죄 범하여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심으로 저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21)

우리가 성탄절을 지내며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사순절과 함께 종려주일과 부활주일을 맞았다. 오늘이 그 후 네 번째 주일이다. 예수의 탄생,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 그 모든 바탕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배어 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 하니라”맞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에 보냄을 받으셨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사랑이다. 좌편 강도의 조롱을 그대로 참고 감내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십자가 죄편 강도의 조롱이란 곧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조롱하는 조롱이었다. 대제사장들의 조롱이며 공회원들의 조롱이며 헤롯 왕과 로마의 병정들의 조롱이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의 약속 가운데 담긴 구원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십자가의 좌편 강도처럼 하나님을 비방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며 살아간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 39)라고 조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신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이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라고 교훈해 주셨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구원의 신비가 담겨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이 아름다운 계절에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이 부활의 복음을 주변 사람에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형제의 궁핍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구원 받은 성도라면 마땅히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을 요한 사도는 사랑의 실천으로 풀어 설명해 주었다. 내게 주어진 세상 재물을 가지고 주변의 궁핍한 형제자매를 도와 줄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닫힌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만약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다.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 보면 ‘용서’를 주제로 한 예수의 비유가 나온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그 때에 예수께서 비유로 대답해 주셨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만나서 붙들고 목을 잡아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라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도 안다.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너희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는 가르침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교훈해 주셨다. 영벌을 받을 자와 영생에 들어갈 자가 구별될 순간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서3:18)라는 요한 사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한 삶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가 선교 헌금과 구제 헌금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개인이 나서서 성실하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재물을 드리고 그 모여진 것들이 누군가에게 빵이 되고 떡이 되고 한 잔의 마실 물이 되며 한 벌의 옷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인가. 

오늘은 장애인 선교 주일이다. 가족을 돌보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특별히 연약한 지체를 돌보고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숭고한 일인가. 다운 증후군 자녀 돌보기, 지적 장애 자녀 돌보기, 뇌성 마비 가족 돌보기, 자폐성 자녀를 돌보며 대하기, 치매 어른을 돌보기, 각종 장애를 가진 가족과 자녀를 돌보기, 중병으로 고생하는 환우를 돌보며 수 십년을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일인가. 2살 정도의 지능으로 멈추어 버린 36살이 된 지적 장애 아들을 먹이고 마시도록 돕고 씻기고 양치질과 대 소변 갈아 주고 치매 걸린 아내를 돌보며 지내는 80대 가장이 아버지로 남편으로 지내는 일상이 영상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지금 건강한 나 자신이라고 해도 언제 어느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질문하신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너도 이와 같이 하라”이 비유와 교훈은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답하신 비유의 교훈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반문하셨다. 그 때 율법교사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나이다.”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이어서 비유로 교훈하신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우리가 제사장 혹은 레위인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 사도는 분명히 말씀한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이다. 


진리에 속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서4:8)라고 했다. 본문 19절에 보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야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래야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길은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마음 속으로만 사랑해야지라고 생각만 할 뿐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범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빛과 어둠, 성령과 마귀, 두려움과 사랑”을 구분하는 것이 진리이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3장의 앞부분에서 이런 내용을 분명하게 풀어 설명하였다. 3장 8절에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니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3장 12절에 보니까,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었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라고 하였다. 

<공동번역성경>으로 요한일서 3장 8-10절을 읽으면,
“언제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실 죄는 처음부터 악마의 짓입니다. 악마가 저질러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공동번역성경/요한일서 3:8-10)라고 하였다. 

요한일서 5장 6절 끝에 보면, “성령은 진리니라”라고 하였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한일서 5:7-8)

사랑이 진리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리다. 
성령과 물과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한다. 
주는 진리를 믿고 따르며 행하는 자 안에 거하신다. 
진리를 알고 행하므로 하나님 사랑, 서로 사랑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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