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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기억하는 감사 기도Ⅱ(엡1:15-23)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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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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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1-27 01:48 조회 3,377 댓글 0
 

                         기억하는 감사 기도Ⅱ(엡1:15-23)            2023. 11. 26

 

 

지난 10월 29일, 주일에 데살로니가전서 1장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오늘과 똑같은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다. 바울의 편지를 읽다가 보면 이처럼 표현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1장 16절에도 보면,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다. 바울의 기도 생활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자신과 관련된 선교 현장과 그 동안 세워진 교회들과 그동안 만났던 성도들의 형편을 일일이 기억에 떠올리며 기도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의 기도는 ‘감사하는 기도’였다.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의 바탕은 찬양과 감사여야 한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간구를 하며 지내지만 사실 기도의 바탕, 기도의 출발은 찬양과 감사와 경배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7장 11-12절에 보면 수많은 천사들이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것이 천천만만을 이룬 천사들의 경배 찬송 내용이다. 그 내용 중에 ‘찬송과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중언부언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졸며 깨며 몽롱한 상태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의 기도 내용은 분명하다. 바울은 수많은 기도 제목들을 일일이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감사 기도는“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설명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

 

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다. 그 뿐만 아니라 “영광의 아버지”이시다. 사도 바울은 그러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저들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성령을‘지혜와 계시의 성령’이시라고 하였다. 여기서 ‘지혜’(知慧)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사역들을 깨닫고 이해하는 전반적인 이해력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또한 ‘계시’(啓示)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바알 숭배자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상태에 붙잡혀 살고 있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우상이 바알이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겨서 만들어 숭배하는 우상의 이름이다. 바알(Baal)이란 셈족 언어로 ‘주인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주전 1,400여년 전부터 고대 중동 사람들은 ‘바알’이란 이름의 신을 만들어 신으로 여기며 숭배하였다. 

 

열왕기 18장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합 왕의 명령을 받은 바알 숭배자 450명과 아세라 숭배자 400명이 갈멜산에 모였다. 저들은 제단을 차려 놓고 그 위에 송아지 한 마리를 각을 떠서 올려 놓았다. 바알 숭배자들은 제단의 둘레를 뛰어 돌면서 오전 내내 바알 신을 불렀다. 그러나 우상인 바알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얼리야는 “큰 소리로 불러 보아라 바알이 신이라면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외출하였는지 어딜 가도 있는지 아니면 잠깐 잠이 들어서 깨워야할 것인지”라고 조롱하였다. 다급해진 바알 숭배자들은 큰 소리를 질렀다.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해서 피가 흘렀다. 그들은 저녁 소제를 드릴 시간이 되기 까지 미친 듯이 떠들며 소란을 피웠다. 열왕기상 18장 29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엘리야는 저녁 나절에 소리쳤다.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엘리야는 앞장 서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였다. 야곱의 12아들들을 상징하는 12돌을 취하였다. 그 돌로 제단을 쌓았다. 돌아가며 도랑을 팠다. 나무를 벌이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서 각을 떠서 올려 놓았다. 네 통의 물을 가져다가 제물과 제단이 흠뻑 젖도록 부었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였다. 열두 통의 물을 갇다 부었다. 물이 제단의 도랑에 넘치도록 가득 찼다. 저녁 소제 드릴 시간에 엘리야가 제단 앞에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중에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불이 제단에 내려 왔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불태웠다. 도랑의 물을 핥았다. 그 현장을 지켜 보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입을 모아서 소리쳤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명령하게 하셨다. 한명도 남기지 말고 바알 숭배자들을 기손 시내로 끌어다가 죽이라고 하셨다. 엘리야는 임금 아합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들리나이다”라고 말했다. 아합 왕이 먹고 마시러 올라간 사이에 엘리야는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서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 엘리야는 계속하여 기도하며 사환에게 말했다.“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 보아라”사환이 다녀 와서 말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말했다. “일곱 번이라도 다시 가라”다녀 온 사환이 말했다.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구름이 일어납니다.”아합이 대답했다. “왕에게 올라가서 비에 길이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타시고 내려 가시라고 해라”

 

잠시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더니 하늘이 캄캄해졌다.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삼년 육개월 만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자 엘리야 선지자는 마차를 타고 달려 가는 아합 왕보다 앞서서 달려 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래에도 영원히 영존하시는 전능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도 계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천지를 만드셨다. 천지와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 해와 달과 별들을 다스리신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신다. 하나님은 큰 일도 주관하시고 작은 일도 주관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땅의 뛰고 달리고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과 물 속의 각종 물고기를 주관하신다. 악어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피래미 새끼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아합을 통해서 엘리야 주변에 일어난 기사와 이적을 전해 들은 왕비 이세벨은 “내일 이맘 때가 되기 전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역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합과 이세벨의 나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신 전능자이시다.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리신다. 역사의 수레 바퀴는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지만 정교하게 돌아간다. 하나님의 역사의 수레 바퀴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인생은 역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없다.

 

수 많은 인생들이 ‘바알이여 바알이여’하던 그 당시에도 하나님은 칠천명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구별시켜 두셨다. 하나님은 그 칠천명을 언급하시며 엘리야를 격려하시고 그에게 용기를 북돋어 주셨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책으로 읽어서 아는 차원이어서는 안된다. 체험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 다윗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시18:1)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총괄한 로마의 백부장과 그의 곁에서 예수릐 죽음을 목격한 자들이 지진이 나며 해가 빛을 잃고 정오의 시간이 한 밤중처럼 깜깜해지는 것을 목격한 후에 고백하였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바라기는 모든 성도들이 각각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길 바란다. 늘 쉽게 설명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호흡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별로 못 느끼고 살아간다. 아니 전혀 못 느끼고 살아간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 목사는 “성경(聖經), 이성(理性), 전통(傳統), 체험(體驗)” 이 네 가지를 신앙 생활의 네 가지 틀로 설명해 주었다. 체험이 중요하다. 하나님 체험, 예수님 체험, 성령님 체험이 중요하다. 사도 베드로는 한창 믿음이 무르익을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늘날과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체험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크신 능력을 알게 하소서.

사도 바울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하나님.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의 눈이 밝혀지게 해 주세요”마음의 눈이 무엇인가. 사람이 몸의 눈이 어두우면 얼마나 답답한가. 어제 결혼식장에 가기 위해서 시내를 지나는데 건널목을 건너는 앞 못 보는 오십대 후반 쯤 되는 여성을 보았다. 앞길을 안내하는 긴 지팡이를 연신 더듬거리며 걸었다. 불안한 발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2-23)라고 교훈해 주셨다. 

 

몸의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의 일상이 답답하고 어두워진다. 지식의 눈이 어두우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어두워지고 만다. 각 분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만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이 밝혀 지기를 기도한다”라고 하였다. 마음의 눈이 무엇인가.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므로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이 밣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온전히 바르게 깨달아 알고 믿고 전파하며 살아가는 영적 분별력과 영적 능력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서 세 가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기도하고 있다. 

 

그 첫째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세요” 라는 기도이다. 에베소서 1장 15절을 다시 보자.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고 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는 알고 믿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에게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예정되고 선택받은 성도인 저들이 부르심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분명한 깨달음이 부족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이 기도하고 있으며 이런 편지의 글을 통해서 저들을 깨우쳐 주려 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부르심의 소망에 의해서 구원이 완성되고 만물이 주 안에서 통일되므로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아마도 에베소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을 깨닫고 실천했으나 부르심의 소망이 불분명했던 것 같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처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분명한 소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우리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라는 찬송가로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을 담아서 찬송하지 않나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이 찬송가의 가사는 1,300년 전인 8세기 때에 아이리쉬 사람들이 부르던 찬송가의 가사라고 전해지고 있다. 맞다.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성도의 소망은 한결같은 것이다. 분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오늘날로부터 사천년 전 인물이다. 모세는 삼천 오백 년 전 인물이고 다윗은 삼천 년 전 인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천 년 전에 이 땅을 다녀가셨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주 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기업’이란 성도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딸로 누리게 될 그 모든 영광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 성도가 성도와 더불어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천국의 모형과도 같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리는 영광의 풍성함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성도가 성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딸로 사귀고 돌보며 나누고 베풀며 돕고 사랑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혈육을 나눈 그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대신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어머니가 낳은 형제 자매라도 일년에 명절이나 집안의 애경사에 잠깐 보고 헤어지는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성도가 성도와 더불어 누리는 성도의 교제라는 것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경험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그래야 한다. 성도들의 사이가 그래야 한다. 속회가 그래야 한다. 찬양대가 그래야 하고 성가대가 그래야 한다. 교사들 간에 그래야 한다. 부서와 기관에서 섬기고 봉사할 때에 그래야 한다. 교회 안에서는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경쟁하거나 비교하거나 자랑하거나 무시하거나 따돌리거나 쑥떡 거리면 안된다. 성도들은 성도들 간에“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진심으로 담아서 서로를 대해야 한다.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의 가사를 보라.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이런 은혜가 우리 각 사람에게 늘 계속되길 축원한다.

 

셋째, “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소원과 계속되는 감사의 기도 내용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공급해 주시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모든 성도가 깨닫고 경험하여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다.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히 크신 능력이시다. 615장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 큰 일을 행하시는 주님”이시다. 다음 주일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 중의 큰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신 성탄의 기쁨은 주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신 기사와 이적 중의 최고봉인 것이다. 그 크신 능력의 절정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에 살리신 부활의 능력이시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 신앙이다. 우리는 윤회설을 믿는 자와 다르다. 우리는 사람이 죽어서 동물이나 뱀이나 새나 벌레와 같은 미물로도 태어날 수도 있다는 식의 어리석은 신앙을 가진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지리도 못 살고 찢어지게 가난하던 우리나라가 이렇게 세계적인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이 놀라운 일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분명하게 깨닫고 마음의 눈을 밝혀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또 한가지는 “하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지극히 크신 능력의 위력”을 깨닫고 알아야 한다. 체험하고 간증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부활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와 권세와 주권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심을 믿는 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는 영원하고 존귀하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알게 하소서.

그 주님이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가 무엇인가. 22-23절을 보라.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라고 하였다.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배당 건물은 사람의 손의 힘으로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예배당 건물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자원하여 드리는 헌금으로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다. 예수는 교회의 머리다. 머리이신 예수의 몸된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이다. 이 땅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 믿고 영접한 이들이 교회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가 교회인데 이는 곧 성도를 뜻한다. ‘에클레시아’ 라는 말은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주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단순한 통치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한 연합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경험하는 충만은 곧 그리스도의 충만이며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충만이란 곧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가 누리는 충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충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이것이 교회이다. 이런 곳이 교회이다. 이래야 교회인 것이다. 만물 가운데 계시며 만물을 통치하시고 그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는 주님의 권세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이다. 성도의 거룩한 연합인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중의 만복을 누리며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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