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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창50:15-21)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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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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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9-18 06:24 조회 3,042 댓글 0
 

                                 용서(창50:15-21)                    2023. 9. 17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와 모든 인간관계가 언제나 좋고 항상 원만할 수만은 없다. 미움도 있고 시기도 있다. 시비도 있고 갈등도 있다. 원망도 생기고 손해를 볼 때도 있다. 억울할 때도 있고 감정이 격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과 형편을 따라 즉흥적으로 반응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다가 보면 일을 더욱 심각하게 거슬리고 인간관계는 점점 꼬여져만 가게 된다. 원한과 보복은 피차에 더욱 큰 불행을 부르고 말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23절 이하에 보면,“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라고 하였다. 이것을 동해보복법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용서와 화해가 없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용서란 사랑의 가장 큰 실천이다. 국어사전에 찾아 보면 “용서(容恕)란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엄하게 경고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불순종하였고 범죄하였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죄의 결과를 물으셔서 저들 부부를 죽이셨다면 인류 역사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다. 장성한 저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였다. 그러나 가인을 하나님은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두셨다. 오히려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가인과 그의 후손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용서가 무엇인가. 어느 날 제자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교훈해 주셨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 교훈해 주신 유명한 일화가 그 뒤에 이어서 나온다. 천국 비유로 교훈해 주신 말씀이다. 

 

어느 주인에게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다. 주인은 그를 아내와 자식들과 소유를 다 팔아서 내 빚을 갚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종이 엎드려 빌었다. 주인은 불쌍히 여기며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다. 멱살을 잡아 흔들며 “내 빚 갚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 소문이 원래 주인에게 들렸다. 주인은 “이 악한 종아내가 너의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네게 적은 빚을 진 동료에게 그렇게 함부로 대하느냐”그리고는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하라”라고 명하면서 옥졸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예수께서 교훈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날 수 있게 된 아버지 야곱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17년을 더 살다가 147살에 죽었다. 아들 요셉이 현직 총리였던 덕분에 거창한 장례를 치루었다. 바로 왕이 요셉에게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도록 배려 해 주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증조부 아브라함이 마련한 가나안의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다. 국경을 넘고 멀고 먼 길을 가서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장례하고 돌아 온 후의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지난날 도단 성 밖에서 17살 요셉을 발가벗겨서 애굽의 대상들에게 팔아 버렸던 기억이 저들 형제들에게 두려움으로 휩싸이게 한 것이다.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 말에 “매 맞은 놈은 두 다리를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라는 속담처럼 말이다. 지난 17년 세월 동안 애굽으로 피신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도움으로 고센 땅에 정착해서 번성하는 목축업으로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지난날 동생 요셉을 발가벗겨 국제 인신매매 현장에 팔아 버렸던 악행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며 지낸 것이 사실이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교훈하는 바를 차근차근 묵상해 가는 중에 은혜가 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두려움.

두려움이란 감정은 언제 생기는 것인가. 여러분은 일상생활 중에 어느 때에 두려움의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가.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잠28:1)라고 하였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때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하였다. 두렵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죄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라고 하였다. 

 

신앙생활은 죄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생활이다. 죄와 악은 사람을 결박한다. 사람이 죄를 짓지만 죄를 짓고 나면 그 지은 죄가 그 사람을 결박한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나면 그 저지른 악이 그 사람을 결박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죄와 악을 통해서 사람을 장악하고 무너트리려고 달려든다.

 

사울 왕은 하나님이 맘에 들어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다. 나이 40살의 사울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셔서 기름 붓게 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서 왕이 될만한 자를 택하여 세우신 것이다. 그런 사울이 말년에 잘못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하였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불행의 시작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불순종과 어리석은 판단이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부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에베레스트의 높은 고지에 등정하는 산악인들이 불행해 지는 경우를 보면 한 발자국 헛디디는 실수가 불행을 부르고 죽음을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주님과 같이 길 가는 생활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계신 동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서 생활했기 때문에 하와가 불행해지고 아담이 부인 따라서 불행해진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평생을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주님과 동행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어린 아이들은 아빠와 손 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없다. 어린 아이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인생에 왜 두려움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품 안에서 도망치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370장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의 2절이다. 이런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이 무엇인가. 용서를 구하며 요셉 앞에 와서 엎드려서 불안에 떨고 있던 형들에게 요셉은 울면서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용서의 시작은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의 악 순환은 점점 더 큰 불행을 초래하고 만다. 요즘 각종 언론에 도배를 하는 사건 소식이 무엇인가. 원한, 보복, 방화, 상해, 살인 등의 끔찍한 사건 소식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유대인 600만명 이상을 죽였다. 600명이 아니다. 600만명이다. 그 당시 지구 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수가 900만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 중의 삼분의 이를 죽인 것이다. 그는 1939년 9월,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주범이었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이 독일의 베를린을 점령하고 독일이 패망해 가기 시작하자 1945년 4월 30일, 총독 관저 지하에서 아내와 함께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거에는 권총 자살설이 있었으나 근래의 역사연구가들은 독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 것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그 날은 그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다음 날이었다. 그의 나이 56살 때의 일이다. 

 

악은 악을 부른다. 선으로 악을 다스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교훈해 주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그 어떤 악한 사람, 그 어떤 악한 사건 앞에서도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이 주님의 기대이다. 악은 더 큰 악을 부르고 악은 더 불행한 악을 부른다. 악을 다스리는 힘은 선이다. 악을 이기는 힘은 선이다. 

 

근대 역사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에게 주목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을 지냈기 때문에 유명하고 노벨상을 탔기 때문에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생각이 남달랐고 인생관이 남달랐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삶으로 실천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27년간의 감옥 생활, 독방 생활 중에도 자신을 지켰다. 그리고 장래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인종 차별, 이념의 차이, 정치 성향의 차이를 이유로 27년간의 긴긴 세월 감옥에 가두어 두었던 이들에게 보복하려 하지 않았다.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았다. 원한을 품지 않았다. 과거를 청산하고 흑백갈등을 극복하는 새 나라 건설에 온 힘을 바쳤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일어난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하고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치했다. “용서는 하되, 망각하지는 않는다”는 취지로 발족된 위원회에서는 흑인들의 인종 차별 반대 투쟁을 화형, 총살 등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면 사면하였다.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히는 일이 없도록 낱낱이 조사해서 보살폈다. 넬슨 만델라는 흑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택, 교육, 경제개발계획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는 용서의 사람이요 화해의 사람이요 선으로 악을 이긴 역사적인 지도자로 후대에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요셉의 그런 모습을 본다. 요셉은 지난 날 형들이 그에게 행한 악행을 다 털고 용서했다. 그리고 지난 날 형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하여 죄 값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형들의 악을 나로 하여금 선으로 바꾸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요셉의 생각, 요셉의 판단, 요셉의 결정, 요셉의 신념을 붙드는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요셉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형들의 만행을 오늘 날 나로 하여금 선하게 대하도록 바꾸셨습니다.”이게 무슨 말인가. “내 생각과 내 기억대로라면 형님들은 내 손에 일일이 보복 당해야 마땅하겠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다른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하려 하던 형들의 악행을 오늘 날 나를 통해서 선으로 바꾸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에게서 배우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자. 나를 향하여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판단에 순종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사는 성도라면 달라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 사죄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믿고 따르는 성도라면 달라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더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권면하였다. 

 

 

생명의 구원과 위로.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동생 요셉이 오히려 울면서 형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복하려 하기는커녕 형들과 조카들까지의 모든 삶을 책임 지겠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오늘날 내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녀들을 보살펴 주겠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라고 울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요셉을 통하여 그 동안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렇다. 지난 날 칠년 풍년 후에 찾아 온 칠년 흉년을 넉넉히 이기게 한 명 총리가 요셉이었다. 요셉은 누군가가 주는 월급을 받아서 자기와 식구 몇 명 먹고 살기를 소원하는 평범하고 소박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그 당시의 거대한 나라 애굽의 백성을 가난과 기근에서 건져 내셨다. 요셉은 자신만을 위해서 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30살에 총리가 되었고 110살에 죽기까지 80년간 애굽의 명 총리였다. 그는 나라를 발전시키고 천한 만민을 살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모세가 그랬고, 여호수아가 그랬고 갈렙이 그런 인물이었다. 사무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런 인물이었다. 에스더가 그랬고 느헤미야가 그런 인물이었다. 

 

과거에 덴마크의 니콜라이 구룬트비(Nikolai Grundtvig, 1783-1872)가 그런 인물이었다. 덴마크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신학운동(그룬트비주의)의 선구자였으며, 찬송가 작가, 역사가, 초기 스칸디나비아 문학 연구의 개척자, 교육이론가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덴마크는 지하자원도 없고 땅도 황무지였다. 해발 평균 30미터의 저지대이다. 가장 높은 산의 높이가 200미터도 안된다. 겨울이 영하 1. 5도, 한 여름의 평균 기온이 17도이다. 5-8월에는 낮이 18시간씩 계속된다. 80%가 루터교를 비롯한 개신교인들이다. 덴마크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 철학자 쇠렌 키에르 케고르를 배출한 나라이다. 

 

1864년 덴마크는 지금의 독일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패망했다. 현재 독일 북부에 슬레스비히 홀스타인이라는 아주 기름진 지역은 원래 덴마크 영토였다. 그러나 전쟁에 지는 바람에 곡창지대는 독일에 넘겨주고 말았다. 덴마크의 경제는 파탄에 이르러 결국 국립은행이 파산했다. 국민의 원성은 높아 가고 백성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국가에 대한 불신이 가득차 있었다. 하나님 신앙을 잃어버리고 백성들은 날마다 도박과 술에 취하여 하루 하루 지냈다. 

 

니콜라이 그룬트비 목사가 등장해서 청년들의 가슴에 희망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명 설교가였다. 그는‘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선배들과 교단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사역지도 빼앗겼다. 나중에 섬의 조그만 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목사였지만 우울증에 걸려서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42세에 성령 체험을 하고 우울증이 치료되고 교만이 사라지고 건강해 졌다.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이 그를 사로 잡았다. 민족의 앞날이 밝다는 꿈과 환상을 젊은이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덴마크는 다시 일어 설 수 있다고 외쳤다. 덴마크 청년들의 가슴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심어 지길 열망하였다. 그룬트비 목사는 덴마크를 살리기 위하여 내<지옥문에서 돌아서자> 는 표어를 내 걸었다. 세가지 사랑 운동을 벌였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감동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다. 조국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를 들은 공병대 대령이었던 달가스라는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 달가스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황무지를 비옥한 땅으로 개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1866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모아서 황무지를 개척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자고 했다. 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았다. 30여년 후 데마크의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종자와 품종을 개량하고 농업 발전에 힘을 쏟았다. 과학 영농에 지혜를 모았다. 농업과 축산에 첨단 과학을 접목하였다. 오늘 날 덴마크는 첨단과학 농법으로 세계 최 강국이 되었다. 과거에 이 운동에서 감동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구룬트비 목사는 나라를 살리는 방법이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감동한 크리스틴 콜은 “교육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국민정신을 깨워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골로 가서 국민 고등학교를 세웠다. 모든 학생과 선생님들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을 새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안학교 모델이 바로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다. 학교 교과 과정의 50%가 성경 교육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성경을 펴고 기도하는 지도자들이 나오자 결국 나라가 바뀌게 되었다. 국민이 부패와 타락에 젖어 있을 때 덴마크를 바로잡는 힘이 성경 말씀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일어나 예언자들처럼 외치며 무너진 나라 덴마크를 세계 역사에 위대한 나라로 발전시킨 것이다. 덴마크는 인구 600여만 명의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저들의 삶의 바탕에는 하나님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라면 구원 받을 수 있는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서로간에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기도 하고 나 또한 누군가를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맞다. 가족간에도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 친구 간에도 그렇고 이웃 간에도 그렇다. 층간 소음을 참지 못해서 이웃 집에 뛰쳐 올라가 윗층 사람을 죽이는 사건 소식이 있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이런 일이 실제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상이 험악하다. 

 

요한 복음 8장 1절부터 보면, 밤새워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예수께서 다음 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가셨다. 어느 해 초막절 기간에 예루살렘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 들었다. 예수는 저들을 가르치셨다. 천국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웠다. 그리고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저를 돌로 치라 명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말을 걸어 왔다. 저들은 이런 상황을 가지고 예수를 고발할 꼬투리를 잡아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말 없이 땅에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다. 대답하기를 종용하는 저들에게 허리를 펴서 일어서신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땅에 글씨를 쓰셨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저들은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그 현장을 떠나갔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끌려 온 여자만 남았다. 예수께서는 홀로 남은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여자가 대답했다. “없나이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친히 용서의 모범을 보이신 장면이다. 

 

용서가 무엇인가. 본문의 요셉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형들을 용서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전했다. 창세기는 마지막 부분에 이러한 내용의 기록을 통해서 용서와 화해의 큰 가치를 교훈해 주고 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하나 되게 하여 출애굽의 대 장정을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가정을 구원하고, 일가친척을 구원하고, 이웃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고, 열방을 구원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기를 원하신다. 원망과 시비와 악한 마음을 내려 놓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주님이 나의 죄를 사해 주신 것처럼 서로를 용서하며 살아가자.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가자. 은혜로운 나날이 계속되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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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축복 하시려고"최고관리자
"꿈꾸는 것 같은 날..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
"내 주 예수 주신 ..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