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는 자(롬8:1-11) 2023. 7. 16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한다. 피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정해서 섬기기도 한다.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거나 다듬어 만들어서 신으로 모시기도 한다. 금신상 혹은 은신상을 세우기도 한다. 해나 달이나 별을 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곰이나 뱀이나 코끼리나 원숭이나 소를 신으로 여겨서 섬기기도 한다. 애굽 사람들은 파리나 개구리를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모세 때에 출애굽한 백성들은 형 아론을 앞장 세워서 금을 모아다가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절하며 섬겼다. 시내산에 오른 모세가 산 위에서 내려 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저들이 벌인 광란극이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떠나서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게 되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력이 약해져서 겪은 일이 아니라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실존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을 망각하고 지낼 때에 내려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었다.
이처럼 우상 숭배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 사람의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것은 크나 큰 은혜요 복 중의 복이 아닐 수 없다. 그 많고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자녀를 표현하는 사도 바울의 최고의 표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표현이다.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번역했다. <공동번역성경>은 이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번역하였다. 맞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다. 말로만 ‘주여 주여’하고 제 멋대로 살아가는 것은 성도가 아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로마서 8장의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자인 성도의 특징에 대하여 선언하고 있다.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다.
정죄라는 단어는 법적 용어이다. 유죄 판결을 받고 그에 따른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에덴 동산의 아담 부부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이다. 로마서 3장 10-18절에서 인용하는 시편의 말씀이 그것을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맞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와 같은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죄성을 거론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11:12)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잠22:15)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전에는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사람은 아담 이후로 누구나 다 죄인이다. 이처럼 인간의 죄인됨을 깨닫고 받아 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걸음이다. 타락한 인간은 본질상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무능(無能, whole impossibility)하고 무지(無知, whole ignorance)하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宣言)하였느니라.”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 ‘선언’은 ‘법률적인 선고’를 의미하는 법적 용어이다.
이처럼 아담으로부터 선천적으로 죄 속에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구원의 은총인지 모른다.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 각 사람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도록 보내셨다.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의 몸에 인간의 모든 죄를 전가하셨다. 이것이 주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의 은혜요 신비이다.
가사가 고쳐지기 이전에 오래도록 부르던 찬송가 210장 <내 죄 사함 받고서>의 옛 가사가 지금 고친 가사보다 더 익숙하고 더 은혜로 전해온다.
1절을 부르자.
“내 죄 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구원의 은총과 감격을 누리고 전하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영(靈)을 따르게 된다.
내가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사는지 아니면 영의 이끌림을 따라서 사는지를 스스로 확인하여 보라. 나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두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5절의 말씀처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는 말씀이 이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라.
“나는 매순간 때마다 일마다 영의 일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가”
“아니면 나는 대개 육신의 요구를 따라서 살면서 가끔씩 어쩌다 위기가 찾아 오면 영의 요구대로 살아보려고 다급하게 발버둥치는가 ”라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7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교훈해 주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어떤가.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란 말씀은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어서 죄의 요구에 끌려 가게 마련이란 말이다. 파리는 썪고 부패한 것을 찾아 다닌다. 그러나 벌과 나비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찾아 날아 든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욕구에 끌려 다니는 것이 나의 현주소라면 아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의 삶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은 3절 이하에서 거의 매 구절마다 ‘육신’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육신’이란 단순한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륵스’(σάρξ)라는 이 단어는 사지백체를 가진 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이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성도에게도 여전히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은 비록 육신의 요구가 내 육신 속에 있을지라도 육신의 요구에 끌려 살아가지 않고 영의 요구를 따라서 살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한다. 9절 끝에 있는 말씀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영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그 결정적인 증거는 11절이다. 다 같이 읽어 보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비요 성도의 축복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요 혜택이요 영원한 복인 것이다.
이것이 엊그제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인용한 요한복음 11장 25-26절 말씀이다. 어느 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틀을 다른 선교 현장에 머무셨다. 그러는 동안에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신 날은 나사로를 장사지낸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였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조문객이 많았다. 예수께서 베다니 마을에 가까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마르다가 마중 나가서 말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그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그 때에 마르다가 대답하였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였다. 영의 생각을 따르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에 이끌려서 살아가면 마귀가 기뻐한다. 예수께서는 이에 관해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탄 마귀의 정체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은 마귀의 일인지 하나님의 일인지를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를 분명히 선포하였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하였다.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살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이 각각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인가를 확인하는 세 번째는 “내가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8절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나는 내게 있는 것들로 내 육신의 욕망을 위해서 주로 쓰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데 쓰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라. 이는 시간 사용, 재물 사용, 돈 사용, 시간 사용, 여가 사용, 내 재주와 은사와 능력과 경험 사용, 내 건강 사용 등등이 나의 영적 상태를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8)라고 하였다.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성도란 매사에 범사에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삶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서 이렇게 교훈하였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우리가 부르는 찬양 중에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이 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씻어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우리 다 같이 이 찬양을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자. 우리의 범사가 주님의 기쁨이 되는 나날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