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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시17:1-7) 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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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8-06 23:58 조회 2,715 댓글 0
 

                           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시17:1-7)            2023. 8. 6

 

 

에덴 동산의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운데를 나뭇잎으로 가리고 동산 나무 숲 사이로 피하여 숨었다. 세월호를 운영하던 세모 그룹 산하의 청해진해운의 실 소유자였던 고 유병언의 둘째 아들 유혁기씨가 미국 영주권자의 신분을 기회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에 범인인도 기회를 피해서 숨어 살다가 지난 2020년 7월에 붙잡혔다. 그 후에도 3년간 범죄인 인도 국제법을 어기고 버티다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며칠 전 한국에 인도되서 인천 지검으로부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의 뒤로 피하고 법망의 뒤로 피하고 해외로 피하는 방법을 택한다.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며칠 전 분당구 서현역 가까운 곳의 백화점 안에서 벌어진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런 끔찍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칼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피해자의 곁을 한 시간 가까이 지키며 지혈에 힘썼던 17살된 소년의 무용담이 연일 뉴스에 보도 되었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도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그 현장을 지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열이면 열 거의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안전을 우선하며 피할 곳을 찾을 것이다. 

 

시편 17편은 다윗의 시이다. 7절에 보면 “주께 피하는 자들”이란 고백이 있다. 그렇지 않나. 내 주변에 나의 신변에 위협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거나 그 어떤 대적자의 세력이 있다고 여겨지면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보호를 요청하게 되지 않겠나. 그 어디론가 피하고 혹은 그 누군가의 도움이 가능한 상황으로 피하려 하지 않겠는가.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전해주는 대로 다윗은 몹시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고 있다. 아마도 사울 왕과 그가 뽑아 세운 3,000명의 자객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켜 달라는 호소일 것이다. 아니면 아들 압살롬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피신 길에 올랐을 때의 기도요 탄식일 수도 있다. 

 

“여호와여 나의 호소를 들어 주세요.

여호와여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해 주세요.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이렇게 시작되는 1절의 급박한 하소연을 보면 다윗의 생애 중에 절대 절명의 위급한 어느 순간을 기록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기도가 무엇인가. 절대자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평소에 시시콜콜한 일, 사소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나. 정상적인 성인은 1분 동안에 15-20번 숨을 쉰다. 아기들은 1분에 40-50번 호흡한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으앙’하고 울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호흡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우리가 코감기에 걸려서 코로 호흡하는 것이 힘들어지면 입으로라도 숨을 쉰다. 막힌 코를 찌르럭거리며 힘들어하고 답답해한다. 호흡이 불편해 지면 밤 잠을 설친다. 머리가 띵하고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답답하기 그지 없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고 집중력이 저하된다. 

 

그러나 건강하게 지내는 평소에는 한 시간 동안에 900번 내지 1,200번씩 호흡하는 것을 아무 의식이 없이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우리는 매 순간 계속하여 숨을 쉬는 호흡을 위하여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별 의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생활할 수 있는 매 순간과 하루가 얼마나 크나큰 축복의 시간인지 모른다.

 

우리가 이목구비(耳目口鼻)라는 말을 하는데 ‘귀와 눈과 입과 코’를 일컫는 표현이다. 다윗은 사람에게 귀와 눈과 입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주의 눈으로 살펴 주세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르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 가운데 이어진다. 

 

다윗의 비탄시 중의 한 편인 오늘 본문은 다윗의 다급한 기도의 장면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1절에 보면 “거짓 된 자”, 4절에 보면 “포악한 자”, 7절에 보면 “일어나 치는 자”, 9절에 보면 “나를 압제하는 악인”,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이란 표현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에 다윗은 그 어느 한 순간도 마음 편할 때가 없이 늘 쫓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급한 상황에 처한 다윗은 주께 무어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1절의 “주여 나의 호소를 들어 주세요. 주여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해 주세요. 주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는 다윗의 간청을 보면 이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위험에 처해 있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6절 끝에도 보면 “하나님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주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울부짖고 있는것이다. 

 

출애굽기 2장 23절과 24절에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계속되는 고된 중노동을 견디다 못해서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셨다.”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의 호렙산 자락에서 양떼를 치며 생활하던 모세에게 찾아 가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애굽의 동족을 구원하러 내려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았다”고 하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부르짖으면 들으신다.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신다. 들으실 뿐만 아니라 응답해 주신다.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 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라고 찬양하는 찬양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다음 주일은 광복 78주년 기념 주일이다. 우리 가운데 일제 시대에 태어나신 분들이 더러 계시다. 일제시대 말에 일본말로 공부해야 했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만 했다. 신사 참배를 강요당했다. 적지 않은 항일 인사들이 일제 시대 말기에 친일파로 돌아선 가슴 아픈 사연도 적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일제의 식민지가 끝났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로 들려 왔다. 꿈 같은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어려서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조회 시간에 <광복절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새롭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에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출애굽의 순간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인 것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에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의 날은 하나님의 크나큰 선물이 아닌가.

 

개인이나 가정의 기도 제목으로 하면 요즘도 오늘도 마치 다윗이 “주여 나의 울부짖음과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기도하듯 답답한 마음을 끌어 안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기도는 이처럼 믿는 자의 탄식이며 간청이며 하소연이다. 그렇지 않나. 정작 우리가 억울하고 괴롭고 답답하고 심각한 기도 제목 앞에 맞닥트리게 되면 “부르짖고 울부짖고 하소연하고 절규하는 기도”말고 다른 그 어떤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는가.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님”

 

이런 눈물겨운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던 날들이 기억에 새롭다. 오늘, 지금 그 어떤 형편 가운데 그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코 낙망하지 말고 “주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부르짖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의 눈으로 살피소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보살피시는 아버지이시다. 살펴 주시는 전능자이시다. 주께로 피하길 원하는 다윗의 기도는 이어진다 

 

“주여 나의 죄 없음을 판단해 주세요. 주의 눈으로 나를 살펴 주세요”

 

사람이 억울한 일에 휩싸이거나 대적자와 원수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면 그 누구라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온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 주의 눈으로 살펴 주세요.” 3절에는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셨지요. 주께서 밤에 나에게 오셔서 나를 감찰해 주셨지요” 8절에는 “주여 나를 눈동자같이 지켜 주세요.” 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이 감히 하나님께 부르짖고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평소에 그는 밤 낮 없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씨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 나는 거짓되지 않게 살아 왔으니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3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주의 눈으로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게 무슨 기도인가. 평소에 되는대로 세상을 막 살다가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 나의 지난 날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이런 식의 기도를 드린 다윗이 아니다. 다윗은 “그 동안도 주의 눈으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신 것처럼 나는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5절에 보면 다윗은 꽤나 떳떳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이다. 이는 감히 그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기도가 아닌가. 우리 중에 누가 감히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다윗의 기도는 다르다. 다윗의 기도는 계속된다. 

 

11절에 보니까 “하나님.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원수들이 에워싸서 노려 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12절에 보면 다윗을 위협하는 원수들의 세력은 마치도 움킨 것을 찢으려는 사자와도 같고 은밀한 곳에서 먹잇감을 노려보는 젊은 사자와도 같다. 그런 위급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다. 

 

13절을 보자. “여호와여 일어나셔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는 젊은 사자와 같은 원수를 대항하여 넘어뜨려 주세요. 여호와의 나를 움켜잡아 찢으려 하는 원수를 눈 여겨 보시고 건져내 주세요.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세요.”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잡아 삼키려 하는 젊은 사자와 같은 원수들의 세력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주께서 주의 눈으로 나를 판단하고 나를 살펴 주세요.”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은“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시는 언약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다. 뿐만 아니라 괴로움 당하는 학대의 현장도 보셨다. 맞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부르짖음과 울부짖음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고통당하고 학대당하는 현장을 지켜 보시고 돌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기이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알았다. 하나님이 천하 만민을 사랑하시되 특별히 선택하신 선민을 ‘기이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7절에 보면 다윗은 “오른 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 

 

오늘 본문이 시편 17편인데, 시편 71편에 보면 역시 “피하는 자의 기도”가 담겨 있다. 시편 71편 1절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라고 기도하고 있다. 3절에서는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라고 했다. 시편 71편 2절에도 보면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시편 71편의 기록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피할 바위과 반석과 요새가 되어 주세요”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기도란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그 어떤 힘을 의지하여 거기로 피하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기도란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다. 홍해나 요단강을 육지처럼 가르시고 출애굽한 200여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2000여만 마리의 짐승 떼에게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서 해갈하게 하시며 아침마다 만나로 배불리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주께로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주께로 피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민족이든 그 어느 시대의 그 어떤 나라, 그 어떤 민족이라고 주께로 피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앗수르나 바벨론을 의지하면 불행해지고 만다. 애굽과 암몬의 눈치를 살피면 초라해 지고 만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나를 판단하시며(시17:2)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시17:3) 나를 감찰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시17:3)의 그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이 나 자신과 우리 가족과 이 민족과 열방의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공평한 눈길과 손길로 판단하시길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삼가게 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입술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말씀의 ‘이르시되’는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술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으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75살된 아브람에게 찾아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이것이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시작이다. 이렇게 시작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아브람과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말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룩하신다. 성취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상에도 길이 있다. 하늘에도 비행기가 다니는 길이 있고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길이 있다. 비행기가 다니는 길을 항로라고 하고 배가 다니는 길을 뱃길이라고 한다. 육지에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고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있다. 요즘은 자전거가 다니는 길도 따로 있다. 산 속에는 야생 동물이 다니는 길이 있다. 이처럼 세상에 길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길이다. 신자가 “주의 입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며” 살아가면 복을 받게 된다. 5절에 보니까 다윗은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길’이란 ‘주의 말씀’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6) 여기서 말씀하는 ‘길과 진리’란 ‘주의 입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신자란 주께서 내게 보여 주신 그 진리의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자들이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저편의 거라사인의 지방에 가신 적이 있다. 배에서 내리시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 그 사람은 늘 무덤 사이에 거했다. 쇠고랑으로 묶어도 끊어 버리고 밤낮 무덤 사이에서 지냈다. 산에서 늘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였다. 이처럼 사람이 귀신에 들리면 그렇게 되고 만다. 물과 불 가운데 고꾸라지기도 하고 무덤 사이에서 지낸다.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하고 아낄 줄을 모른다. 소리를 질러 대고 쓸데 없는 힘이 넘쳐 난다. 쇠고랑이라도 끊어 버린다. 얼마나 불쌍한가. 왜 그런가. 사람이 정상인이라면 사람다운 길을 가야 하는데 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귀신에 사로잡혀서 그렇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귀신을 향하여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하고 명하셨다. 그리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셨다.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다. 우리가 많다”고 대답했다. 예수 앞에서 두려워 떨던 군대 귀신은 산 곁에서 지내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거의 2,000여 마리나 되는 돼지떼에게 귀신이 들어갔다. 그 많은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로 내리 달려 몰사하였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읍내와 마을로 들어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서 그 현장에 와서 보았다. 그 많던 돼지 떼는 보이지 않고 귀신 들려 고생하던 그 사람은 옷을 단정하게 입고 정신이 온전해 져서 앉아 있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읍내와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다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저들은 예수께 그 곳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귀신이 떠나가고 건강해 진 그 사람은 예수를 따라가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건강해진 그 사람은 데가볼리 지역에 이곳 저 곳을 찾아 다니며 예수를 통해서 귀신이 떠나가고 건강해진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놀랍게 여기게 되었다. 

 

하나님의 입술의 말씀에는 권능이 있다. 이처럼 예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다. 주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지키려는 자들이다. 4절의 다윗의 고백처럼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갈 때에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서 스스로 삼가며 살아갈 때에 주께서는 오른 손을 구원하시는 기이한 일들을 보여 주실 것이다. 주께 피하기를 원하는 다윗의 기도는 주의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이다.

 

13절에 보면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14절에 보면 “여호와여....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 어떤 형편, 그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라도 매 순간 주께 피하는 자의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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