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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에 드리는 감사기도(시72:1-7)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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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7-03 01:45 조회 20,516 댓글 0
 
미국 역사에 신화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벤자민 프랭크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다. 그는 영국에서 이민해서 미국 보스턴에서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가난한 가정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살 이후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다. 형이 운영하는 인쇄소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쇄 기술을 배운 후에는 혼자 가출해서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 곳에서 따로 인쇄업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다. 24살 때에는 때로 인쇄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25살에는 펜실베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에 크게 일조했다. 30살에는 펜실베니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학교 공부를 거의 한 적이 없지만 명석하고 뛰어 났다. 그 후에도 15년간이나 국회의원 직을 수행했다. 과학적인 연구 실적도 돋보였다. 미국이 건국 되어 가던 초기에 체신부 장관 대리직을 수행하면서 우정 제도를 정착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연구해 낸 난로는 프랭클린 스토브라는 이름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피뢰침을 발명했고 다초점볼록 렌즈도 발명했다. 글을 쓰는 솜씨가 뛰어 났던 그는 토마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독립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13개 주의 독립 국가로 뿌리를 내리도록 영국과 협상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탁월한 대변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은 오늘 날까지도 읽히는 유명한 고전 중의 한 권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말하는 13가지의 덕목이 있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 이 13가지 덕목을 작은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며 저녁이 되면 점을 찍어 가면서 자신의 삶을 뒤 돌아 보고는 하였다고 전해 온다. 필라델피아 시내에 가면 그를 기리는 거대한 박물관이 있다. 시내에서 뉴저지로 건너 갈 때에 돈을 내야 건 널 수 있는 다리도 아예 그의 이름을 붙여서 사용한다. 미국 지폐에 대통령이 아닌 인물 중에서 100불짜리에 그의 얼굴 그림이 들어 있다. 벤자민 프랭크린! 그를 역사적인 인물이 되게 한 바탕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늘 감사하며 살아 간 청교도적인 믿음에 기초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에 한 가지의 덕목을 더한 다면 바로 감사(感謝)이다. 감사는 성숙한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는 매사를 감사한 눈으로 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른 비의 은택과 늦은 비의 은택을 골고루 감사하는 것이 감사의 마음이다. 아침에도 감사하고 저녁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봄에도 감사하고 가을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형통할 때도 감사하고 어렵고 답답하고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될 때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농사와 목축이 잘 안되었을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줄 아는 성숙한 믿음의 감사가 있어야 한다.

시편 72편은 시편 127편과 함께 솔로몬의 시로 알려져 있다. 물론 시편 72편에는 맨 마지막 절인 20절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고 되어 있어서 다윗의 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솔로몬의 시라는 점에 뜻을 모은다. 시편 72편은 메시아 예언의 시로 유명하다. 시편에는 2, 16, 22, 24, 45, 72 그리고 110편의 총 일곱 편의 메시야 예언시가 있다. 그 일곱 편의 메시아 예언 시 중의 한 편이 바로 오늘 본문인 72편이다. 유대인 들은 오순절에 이 시를 읽으며 성전에 올라가고는 하였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첫 이삭 한 단을 들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치는 초실절기에 관한 규례가 나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첫 소출을 하면 첫 단을 가지고 제사장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제사장은 그 곡식 단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기쁘시게 받으시도록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라고 했다. 그리고 겸해서 일 년 된 흠 없는 숫양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기름을 섞은 고운 가루를 준비해서 소제로 드려야 했다. 이를 불로 태워서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라고 했다. 거기에 포도주를 부어서 전제로 드리라고도 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전에 제사하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이나 생 이삭을 먼저 먹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께 우선 드려서 제사하고 예배하라는 강조이다. 이것이 맥추 감사의 전통이다.

시편 72편의 솔로몬의 감사기도 내용은 이 같은 감사 신앙을 대할 수 있다.

주께 공의(公義)와 평강(平康)을 구하는 기도.
매사에 공의롭고 정의로운 판단의 지혜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평강이 임하는 것이다. 솔로몬 임금은 하나님께 판단력과 공의와 정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1절에서 말씀하는 ‘왕의 아들’이란 솔로몬의 후손들 중에 계속될 왕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2절에 말씀하는 ‘그는’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의 근본이시며 온갖 판단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왕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했고 공의와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2절에 보면 가난한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공의와 정의로 섬길 수 있을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3절에서 말씀하는 산들과 작은 산들은 하나님이 내신 자연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의로 말미암아 산들과 작은 산들이 평강을 준다고 했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의 원천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공의와 정의와 평강을 구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기쁨이요 이것이 응답이요 이것이 축복인 것이다. 지난주(2011. 6. 28)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정권의 살아남아 있는 핵심 4인방의 범죄자들을 재판하는 내용을 뉴스와 언론에서 접했을 것이다. 1975년에서 1979년의 4년 동안 200여만 명의 동족을 악랄하고 무참하게 학살했으면서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재판정에서 오히려 큰 소리치고 전혀 회개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며 세계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당시 2인자였던 누온 체아는 유엔 국제전범재판소 첫 재판정에서 “재판이 불공평하고 불쾌하다”고 말하면서 퇴정해 버렸다. 사람이 악하면 어떻게 저렇게 악할 수 있을까. 그 재판 장면을 보면서 저렇게 뉘우침이 없고 양심이 화인 맞은 극악 범들을 위해서라도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회개하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요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심판을 받는 곳이 지옥이다. 본문 4절 끝에도 보면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라고 했다. 역사에 어디서나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평강은 반드시 공존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다. 1절이 말씀하는 주의 판단과 주의 공의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이 땅 위에 공의로운 판단과 정의로운 재판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악의 소굴이 되고 말 것이다. 감사가 떠난 인간의 최후는 악마적인 것이다.

요즘 우리가 대하는 “헐몬의 이슬이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3)는 말씀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에는 온 산에 이어 내리는 저 북방의 헐몬 산의 이슬이 귀하듯이 이 땅의 천하 만민들에게는 의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시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금번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방문한 태백과 도계 지역의 산세는 참으로 깊고 웅장했다. 논은 찾아 볼 수가 없고 아주 높고 가파른 산언덕을 개간해서 자갈밭에 고랭지 배추 농사를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간간이 평지에는 비닐하우스에 곰치 같은 강원도 특산물을 가꾸기도 했다.  근래에는 고랭지 포도 재배도 인기라고 한다. 아주 당도가 높고 맛이 있는 포도 농사가 한창이라고 한다. 짐승으로 쟁기질하기가 어려워 사람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그 넓은 밭들을 일구었다고 한다.

풍요(豊饒)로운 삶을 구하는 기도.
모든 사람은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탈피를 원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가난한 나라가 많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난과 궁핍 가운데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4절에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고 했다. 그렇다. 우리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구주이시다.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가난과 궁핍으로부터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이시다. 압박하는 자의 압박의 손을 발을 꺾으시는 심판의 주님이시다. 예수는 가난한 자의 복음이시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하시는 분이시다.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4;23-24)고 했다. 

전쟁과 기근과 가뭄과 흉년과 궁핍과 질병은 그 누구에게서라도 일순간에 평강을 빼앗아 가 버리고 만다. 창세기 46장에 보면 가나안 지경에 엄청난 기근이 덮쳐서 더 이상 목숨을 유지 할 길이 막연해진 상태에서 야곱의 일가족이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엄청난 부를 얻고 두 산 허리를 덮는 양과 염소와 소와 낙타가 떼를 이루었던 거부를 이룬 성공한 목축업자였던 야곱인데 아무 것도 가질 수 없고 더 이상 짐승 떼와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제적인 난국 앞에서 정처 없이 애굽을 향하여 국경을 넘어 피신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이 세상에 영원한 부요도 영원한 가난도 없다. 오직 생사화복이 주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길흉화복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에는 거창한 꿈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생을 출발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기근이 찾아 온 적이 있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도 기근은 있다. 가난도 있고 실패도 있고 질병도 있고 우울도 있다. 문제는 시대적인 변화와 격변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 가난과 궁핍과 질병과 우울을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가정도 교회도 이걸 가르쳐야 한다. 행복하게 살고 기쁘게 살고 감사하며 살고 희망을 갖고 살고 찬양하며 살고 예배하며 살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 없는 출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5절 말씀처럼 해가 있을 동안에나 달이 있을 동안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할 줄 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걸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최근에 칠십대 중반 되신 권사님께 6. 25 때 경상도 경산까지 피난 다니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쟁이 벌어지던 해에 13살 소녀였다고 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지나가다가 남의 피난 떠난 집의 장독 열어서 버리고 떠난 된장 해결하고 쌀독 열어서 쌀 해결하고 나뭇가지 주어다가 돌멩이 위에 솥 걸어 놓고 매 끼니를 해결하며 걷고 또 걸어서 끝없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던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을 경험하고 피난을 다녀 본 기억을 하면 살아가며 겪는 그 어떤 어려움도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건져 주시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시오 능력의 주님이시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극심한 고난과 역경과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경험했던 다윗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라고 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기드온,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그 어느 누구 한 사람 고난과 가난과 궁핍과 역경과 환란과 어두움과 갈등과 위험과 위기와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은 회복의 아버지이시다. 주님은 축복의 주님이시다. 6절을 보라.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시다. 소낙비 같은 은혜를 내려 주셔서 다시 번성케 하시고 창성하게 융성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현대의 신화를 이룩한 정주영 회장의 아우였던 한라그룹 정인영(1920-2006) 회장의 별명은 부도옹(不倒翁)이었다. 70에 뇌졸중이 왔으나 16년을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재계 12위의 기업을 일구었던 맨발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 마을의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노년에 질병과도 싸워 이긴 오뚝이 기업인, 휠체어의 부도옹이란 별명이 따라 다닐 정도였다. 그의 생전의 어록에 보면 “원칙을 지키고 남을 배려하라, 생각은 크게 하고 시작은 작게 하라”고 충고한다.

가난이나 궁핍은 죄가 아니다. 누구나 성실하게 살아가며 주와 동행하면 주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또한 풍요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범사에 감사로 제단을 쌓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의(義)로운 자의 풍성(豊盛)한 평강을 구하는 기도.
의로운 자의 흥왕(興旺)함이란 무엇인가. 7절에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다. 슬픔과 우울과 고통과 질병이 가득한 이 땅 위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평강의 풍성한 삶을 살아가려면 그의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넓은 집에 살아도 우울하고 좋은 옷 입고 루이비통과 샤넬 같은 500만 원짜리 1000만 원짜리 좋은 가방 들고 다녀도 만족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의로운 자의 흥왕함이란 눈에 보여 지는 것으로는 만족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잠언 22장 1절 말씀처럼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한 시대를 풍미하던 권력자라도 그 말년이 초라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영웅호걸이라도 절세가인이라도 다 헛되고 헛된 길을 갈 뿐이다.  그러므로 시편 72정 15절의 말씀처럼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깨닫고 본받을 줄 알아야 한다.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이 그 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게 된다. 그래야 흥왕하게 된다. 시편 72편 16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이 그런 내용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산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런 고백이 날마다 순간마다 입술의 고백이 되는 그런 감사의 삶을 살아가자. 17절에 보면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이 복을 받으리니”라고 했다. 모든 복, 만복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예수 가정, 예수 학교, 예수 기업, 예수 직장, 예수 장사, 예수님이 빠진 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의 대답을 얻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구주시오 메시아이시다. 유럽과 북미의 예수 잘 믿고 살아온 나라와 백성들을 보라. 예수 안에 살아야 흥왕해 지는 것이다. 예수 없이 잘 되는 것은 모래 위에 큰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런 집은 다 무너지고 만다. 예수께 기초하고 살아가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반석 인생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8장 2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라고 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한 인생은 영원히 흥왕하고 풍성한 평강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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